유리창
- 정지용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寶石)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山)새처럼 날아갔구나!
- 《조선지광》 (1930)
<시어 풀이>
*열없이 : ① 기운 없이, ② 별다른 의미 없이, ③ 약간 부끄럽고 계면쩍게.
*길들은 양 : 서투른 일이 익숙하게 된 듯.
*폐혈관(肺血管) : 폐로 통하는 피의 관.
이 작품은 시인이 어린 자식을 잃고 아버지로서 느끼는 애절한 슬픔과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유리(유리창)’는 차가운 이미지의 실체로서 창 안과 밖을 단절시키는 동시에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시적 자아와 그리워하는 대상(죽은 아들)을 격리시키는 동시에 창을 통해 나타나는 영상(별), 즉 죽은 아이의 영혼과 교감하게 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선명하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감정을 절제하여 화자의 슬픔을 극대화하는 한편, 모순 어법(역설법)을 사용하여 시의 함축성을 높이고 있다.
1~3행은 유리창에 어리는 죽은 아이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화자는 유리창을 향해 입김을 불어 본다. 주변부터 지워지며 모양이 변하는 입김 자국은 마치 날개를 파닥이는 새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새의 작고 병든 모습 속에서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한다. 유리에 어리는 ‘차고 슬픈 것’은 죽은 아이의 환영이며, ‘열없이’는 ‘맥없이’라는 뜻으로 자식을 잃은 화자의 상실감 때문이다.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라는 표현은 사라지는 입김을 시각화한 것으로, 죽은 아이의 영상이 사라지는 모습이다.
4~6행은 창밖의 밤의 영상을 그린 것인데, 유리창에 비친 죽은 아이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입김이 사라지자 아이의 영상인 새도 날아가 버리고, 오직 컴컴한 어둠만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허탈감과 상실감을 느끼는 아버지의 눈에는 어둠 저편에 작은 별이 보이고, 화자는 그 별에서 죽은 아이를 떠올리며 눈물짓는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의 반복적인 행동은 죽은 아이를 보고 싶어 하는 화자의 안타까운 심정의 표현이며,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는 밤을 동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것으로 화자의 상실감과 허탈감을 표현한 것이다. 또 ‘물 먹은 별’은 눈물 고인 화자의 눈에 비친 별이며, ‘별’은 죽은 아이라고 볼 수 있다.
7~8행에서는 화자가 홀로 밤에 유리를 닦는 심정을,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자식의 죽음과 다시 만날 수 없는 둘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서 느끼는 ‘외로운’ 감정과 그러면서도 입김이나 별과 같은 이미지를 통해 자식을 느낄 수 있다는 데서 오는 ‘황홀한’ 감정을 복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순된 두 어휘를 사용하여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낸 역설적 표현이다. 따라서, ‘유리창’은 둘 사이의 단절 표상이면서 동시에 만남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9~10은 아이의 죽음에 대한 탄식을 표현하고 있다. ‘고운’을 통해 어린아이의 부드럽고 약한 모습을, ‘폐혈관’을 통해 죽음의 원인을(실제로 시인의 아이는 폐렴으로 죽었다고 한다). ‘찢어진’을 통해 ‘아이의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화자의 슬픔이 ‘아아’라는 깊숙한 탄식을 통해 표출된다. 화자는 ‘너’라는 대명사로 아이를 직접 가리켜 절제했던 감정을 어느 정도 노출하면서, 잠시 살다가 훌쩍 세상을 떠난 어린 자식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죽은 어린 자식의 모습을 ‘차고 슬픈 것’, ‘언 날개’, ‘물 먹은 별’, ‘산(山)새’로, 둘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을 ‘밤’, ‘별’ 등으로 표현하여 슬픔의 정서를 객관적 사물의 상황과 연계하여 암시하고 있다. 또한, 슬픔의 눈물이 어리는 모습을 ‘물 먹은 별’, ‘반짝’으로 표현하거나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고’하는 행위를 통해 암시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각 시어가 주는 폭넓은 이미지를 연상하면서 독자가 그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작자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시인. 충북 옥천 출생. 섬세한 이미지와 세련된 시어를 특징으로 하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초기에는 이미지즘 계열의 작품을 썼으나, 후기에는 동양적 관조의 세계를 주로 형상화하였다. 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1941) 등이 있다.
해방 후 조선 문학가 동맹(카프)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50년 6·25전쟁 이후 월북한 이유로 그의 작품은 한동안 금기시되어 왔으나 한국시문학사에서 그가 이룩한 감각적인 시 세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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