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일(雪日)
- 김남조
겨울나무와
바람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祝宴)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김남조 시집》(1967)
▲시어 풀이
축연(祝宴) : 축하연, 축하하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베푸는 잔치.
▲이해와 감상
‘설일(雪日)’은 ‘눈 오는 날’과 ‘새해 첫날’이라는 중의적(重義的) 의미의 제목으로, 화자인 ’나‘는 눈이 오는 첫날에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겨울나무도 혼자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신의 존재를 느끼고 건강하고 수수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노래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있는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것을 인식한다. ‘겨울나무’는 싸늘한 세월을 견디는 고독한 존재요, ’바람‘은 떠도는 존재다.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겨울나무가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지만, 실상은 바람이 겨울나무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은 보이지 않는 바람을 시각화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2연은 자연물이 혼자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대되어 화자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고 한다.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이 함께 해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은 절대자를 상징한다.
3연은 인간의 삶과 사랑은 절대자의 은총과 섭리로 살고 있음을 드러낸다. ‘삶’은 돌층계를 걷는 것과 같은 고난의 길일지라도 결국은 신의 은총이며, ’사랑‘도 자갈밭을 걷는 것과 같이 힘들어도 결국은 신의 섭리 아래 있음을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 아래 4연에서는 우리의 삶을 황송한 축연이라 여기고 신에 의탁하여 너그러운 삶을 살자고 다짐한다. 여태까지는 불평과 불만을 ’말’로 내뱉으며 타인을 탓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이제는 조용히 내면을 살펴보고 너그럽게 세상을 누리며 살자고 한다. ‘황송한 축원’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삶은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축하연인데 그것을 황송하게 받는다는 뜻으로 화자의 겸손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5연은 눈이 오는 새해를 맞이하며 눈을 바라보는 순수한 마음으로 마무리한다.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은 눈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화자는 고통을 이겨나가는 순수한 마음을 ’눈시울→ 눈물→ 승천→ 백설→ 얼음꽃‘의 순환 과정을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눈이 내리는 것은 단순한 자연현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 속에 지닌 순수한 마음과 안으로 삭인 슬픔의 눈물이 하늘에 올라 눈이 내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김남조는 시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종교적인 신앙심을 바탕으로 해 왔다. 그의 시에는 신에 의탁하는 시인의 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가 두드러진다. 이 시 역시 새해를 맞이하는 날의 눈 내리는 풍경을 배경으로 하여 신의 존재를 느끼며, 고독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화자의 다짐이 여성 특유의 감상을 바탕으로 잔잔하고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하찮게 보이는 자연현상 속에서도 신의 은총과 사랑을 발견하는 그의 자세는 전 우주적인 관점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시는 서술적 문체를 사용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바람’을 ’빨래’로, ’은총’을 ’돌층계’로, ’섭리’를 ’자갈밭’으로 표현하는 등 구체적 사물로 시각화하였고, 동일한 시어나 문장을 반복하여 의미를 강조하였으며, 청유형 어미의 사용으로 설득력을 높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작자 김남조(金南祚, 1927 ~ )
시인. 대구 출생.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 잔상’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진솔한 자기 삶의 증언과 묘사를 통해 인간의 삶과 사랑을 그리는 시를 주로 썼다. 시집으로 《목숨》(1953), 《겨울 바다》(1967), 《설일》(1971), 《귀중한 오늘》(2007), 《사람아, 사람아》(2020)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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