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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by 혜강(惠江) 2020. 3. 10.

 

<출처 : 네이버블로그 'prodigy jang>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문학 춘추》(1965)

 

 

<시어 풀이>

 

음탕 : ‘음란하고 방탕하다의 어근.

야경꾼 : 밤사이에 화재나 범죄 따위가 없도록 살피고 지키는 사람.

야전 병원 : 싸움터에서 생기는 부상병을 일시적으로 수용하고 치료하기 위하여 전투 지역에서 가까운 후방에 설치하는 병원.

 

 

 

이해와 감상

 

 

  이 작품 화자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부정한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가 만연한 사회에서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옹졸한 소시민적 삶에 대한 자기반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는 언론의 자유’, ‘월남 파병같이 중요한 일에는 분개하지 못하고, ‘땅 주인’, 구청 직원‘, ’동회 직원같이 힘 있는 자에게는 반항하지 못한다. 반면에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옹졸하게 분개하며, ’이발쟁이‘, ’야경꾼처럼 힘없는 자에게는 옹졸하게 반항한다. 화자는 옹졸한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자조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시 전체에 독백적 어조를 사용한 것은 바로 자기 고백과 반성의 진정성과 진솔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화자는 이러한 자신의 태도를 중요한 일조그만 일을 대조적으로 제시하여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고 주제를 부각하고 있다. 그리고 ’50원짜리 갈비‘, ’20‘, ’스펀치‘, ’거지‘, ’개 울음소리‘, ’애놈의 투정‘, ’은행나무 잎등 일상적인 시어를 사용하여 일상의 실제적 삶을 사실적이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과 같은 비속어를 사용한 것은 화자 자신의 속된 모습을 언어 표현으로 노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조그만 일에 분개하는 의 옹졸함을 표현하고 있다. ’왕궁‘, ’왕궁의 음탕분개하지 못하고,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분개하고, 애꿎게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욕을 하는 옹졸함을 드러낸다.

 

  2연은 중요한 일에 분개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반성을 보여준다. ’언론의 자유‘, ’월남 파병과 같은 중요한 일은 이행하지 못하는 대신, 조그만 일을 하는 야경꾼만 증오하는 자신에 대한 반성을 드러낸다.

 

  3연은 화자의 옹졸함이 포로수용소 시절부터 몸에 밴 것이었고 회상한다.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라는 표현은 화자의 옹졸함이 오래도록 몸에 배어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화자가 부산 포로수용소 야전 병원에 있을 때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는 일따위의 사소한 일에 종사한 것을 예로 들고 있다.

 

  4연은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신변의 조그만 일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왜소하고 무력한 모습의 자신인 것을 발견한다. ‘개의 울음 소리에 비명을 지르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지고,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을 무기력하게 갈 뿐이다.

 

  5연에서는 절정에서 비켜서 있는 의 비겁함을 표현하고 있다. ‘절정 위에 서 있지 않다는 의미는 비판과 저항의 정점에서 벗어나 있어 불의에 맞서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6연에 와서 화자는 땅 주인’, ‘구청 직원’, ‘동회 직원과 같이 가진 자, 힘 있는 자에게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이발쟁이’, ‘야경꾼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 힘없는 자에게는 사소한 일로 흥분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모멸감에 빠지게 된다.

 

 

  7연에서는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미비한 자연물(모래, 바람, 먼지, )에 대조시키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옹졸하고 비겁한 자신의 모습을 자조적인 독백을 통해서 반성하고 있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아무 죄 없는 소설가를 구속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권력에 정면에서 대적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의식을 폭로하며 진지한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자 김수영(金洙暎, 1921~1968)

 

 

  시인. 서울 출생. 1947. 그의 문학 활동은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 뒤 김경린·박인환·임호권·양병식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 주목을 받았다. 이때는 모더니스트의 일반적 경향인 현대문명과 도시 생활을 비판적으로 노래했으나, 서구 사조를 뒤쫓는 일시적이고 시사적인 유행성에 탐닉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전진로를 개척하려 했다는 점에서 서구 취향의 모더니스트의 자기 극복 과정을 보여준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지적 방황과 번민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시화하였다. 1959년에 간행된 달나라의 장난은 이 시기의 시적 성과를 수록한 첫 개인시집이다. 대표작으로는 달나라의 장난, 헬리콥터, 병풍, , 폭포등을 꼽을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1960년 이후다. 강렬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 정신에 뿌리박은 그의 시적 탐구는 1960년대 참여파 시인들의 전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의 대표작품으로 푸른 하늘을, 강가에서〉, 거대(巨大)한 뿌리,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을 들 수 있다. 그는 현실의 억압과 좌절 속에서 일어서고자 하였던 196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며 현실참여의 생경하지 않은 목소리를 보여줌으로써 197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시집으로 달나라의 장난(1959) 외에 죽은 뒤 출판된 거대한 뿌리(1974),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6)와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 퓨리턴의 초상등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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