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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767

고지(高地)가 바로 저긴데/ 이은상 고지(高地)가 바로 저긴데 - 이은상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핏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 《자유문학》 창간호 (1956. 5) ▲이해와 감상 이 시는 1954년 제야에 노신이 쓴 작품으로, 6.25 민족전쟁 중에 잃었던 수도 서울로 환도(還都)되고, 휴전이 협정된 상황에서 통일에의 의지와 비원을 노래한 전쟁시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뒤의 혼돈을 읊은 것이다. 이런 유의 전쟁시에는 유치환의 , 모윤숙의 , 조지훈의 , 구상의 등이 있다. 국토 분단의 민족 수난을 제재로 한 이 시는 1연.. 2020. 2. 13.
아차산 / 이병기 아차산 - 이병기 고개 고대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 쪽이 발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 (1939) ▲이해와 감상 3수로 된 연작 시조. 첫 수와 둘째 수는 종장 끝 귀가 일반적인 3자 율격과는 달리 4자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반 시조의 율격으로 볼 때 파격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가람의 시조는 종장 끝 구를 3ㆍ4자로 된 경우가 많다. 아차산은 서울 워커힐 뒤에 있는 산이다. 삼국시대 백제의 요충지로서 지금도 성터가 남아 있다... 2020. 2. 13.
난초(蘭草) / 이병기 난초(蘭草) - 이병기 1 한 손에 책(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 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 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내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 2020. 2. 13.
개화(開花) / 이호우 개화(開花) - 이호우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빛도 숨을 죽이네. 나도 아려 눈을 감네. - 《현대문학》(1962.5) ▲이해와 감상 이호우는 현대시조의 큰 산맥이다. 시조문학사에서 가람과 노산이 현대시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면 이호우는 초정(艸丁)과 더불어 그 뒤를 이어받아 현대시조의 개화기를 열었다. 그의 작품으로 , , , 등은 연시조들이고, , , , , , 등은 단시조인데 이들 단시조는 작기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는 총 글자가 53자에 불과한 작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그 신비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보통의 평시조보다는 좀 늘어진 글자 수를 가졌으면서도 시조로서의 형식미(形式美)에 .. 2020. 2. 13.
종소리 / 박남수 <사진 : 안동시, 2019 제야의 종 타종행사 장면) 종소리 - 박남수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 2020. 2. 13.
새 / 박남수 <출처 : 다음 블로그 '윤슬 윤서 아빠의 행복한 육아일기'> 새 - 박남수 ​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 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릇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의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다스한 체.. 2020. 2. 13.
아침 이미지 / 박남수 - 다대포의 아침 아침 이미지 - 박남수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한다. - (1968) ▲이해와 감상 (1968)에 처음 발표하고, 그 후 (1970)에 수록한 이 시는 모든 사물이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는 밝고 신선한 아침의 이미지를 노래한 것이다. “밤에는 모든 물상이 어둠에 묻혀 버려 그 형상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던 것이 아침이 되면 밝음 속에 그 본래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낸다. 그리하여 어둠의 세계인 밤과는 전혀 다른 생동하는 밝.. 2020. 2. 13.
그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 심 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고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인경(人磬):옛날, 밤에 통행 금지를 알리기 위해 설치해서 치던 큰 종. 인.. 2020. 2. 12.
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 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히 끼일 일인 것이다. - [현대공론](1954년 8월호)- 무등(無等) : 호남 광주의 산 이름. 남루(襤褸) : 헌 누더.. 2020. 2. 12.
질마재 신화 - 신선(神仙) 재곤(在坤)이 / 서정주 신선(神仙) 재곤(在坤)이 - 서정주(徐廷柱) 땅 위에 살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재곤(在坤)이라는 이름을 가진 앉은뱅이 사내가 있었습니다. 성한 두 손으로 멍석도 절고 광주리도 절었지마는, 그것만으론 제 입 하나도 먹이지를 못해, 질마재 마을 사람들은 할 수 없이 그에게 마을을 앉아 돌며 밥을 빌어먹고 살 권리 하나를 특별히 주었었습니다. ‘재곤이가 만일에 목숨대로 다 살지를 못하게 된다면 우리 마을 인정(人情)은 바닥난 것이니, 하늘의 벌(罰)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두루 이러하여서, 그의 세 끼니의 밥과 추위를 견딜 옷과 불을 늘 뒤대어 돌보아 주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갑술년(甲戌年)이라던가 을해년(乙亥年)의 새 무궁화(無窮花) 피기 시작하는 어느 아침 끼니부터는 재.. 2020. 2. 12.
꽃밭의 독백(獨白) / 서정주 꽃밭의 독백(獨白) - 시소(娑蘇) 단장 - 서정주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 (1960)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사소 설화'(娑蘇說話)를 모티프로 인간 세계의 유한성과 인간 본질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원한 절대 세계를 갈망하는 구도적(求道的) 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는 전통 설화를 창조.. 2020. 2. 12.
춘향유문(春香遺文) / 서정주 춘향유문(春香遺文) - 춘향의 말 3 - 서정주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서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兜率天)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 제3시집 (1955)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고전 소설 ‘춘향전’을 모티프로 삼아 새로운 시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시로, ‘춘향의 말’이라는 부제가 붙은 세 작품 중 마지막 작품이다. 제목의 ‘유문(생전에 남긴 글)’에서 알 수 .. 2020. 2. 12.
추천사(鞦韆詞) / 서정주 추천사(鞦韆詞) - 춘향(春香)의 말(1) - 서정주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밀 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 서정주 제3시선 (1955) *추천 : 그네 *서(西) : 여기서는 극락세게를 가리킨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그 부제(副題)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춘향이 향단과 그네를 타면서 독백 형식으로 .. 2020. 2. 12.
국화 옆에서 / 서정주 국화 옆에서 - 서정주 한 송이 국화꽂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꽂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꽂이여. 노오란 네 꽂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1947. 11.9) ▲이해와 감상 ‘국화 옆에서’는 4연 13행의 자유시로 서정주의 대표작이다. 1947년 11월 9일자 『경향신문』에 발표되었다. 그후 이 작품은 『서정주시선(徐廷柱詩選)』(1956)에 수록되었다. 윤회설에 바탕을 둔 이 시는 국화를 소재로 하여 계절적으로는 봄·여름·가을까지 걸쳐져 있으며, 인고(忍苦)를 통해 결정(結晶.. 2020. 2. 12.
귀촉도(歸蜀途) / 서정주 귀촉도(歸蜀途) - 서 정 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어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은장도(銀粧刀)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은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1943.10) 수록 귀촉도 : 두견 서역 : 중국의 서쪽에 있던 여러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 여기서는 저승을 뜻함. 파촉 : 중국의 서쪽에 있던 땅 이름. 여기서는 저승을 뜻함. 메투리 : ‘미투리’의 방언. 삼이나 노 따위.. 2020. 2. 11.
화사(花蛇) / 서정주 화사(花蛇) - 서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석유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드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스며라, 배암! - 2호 (1936) *.. 2020. 2. 11.
황혼(黃昏) / 이육사 황혼(黃昏) ​ - 이육사 ​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 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 저 십이성좌(十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우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2020. 2. 11.
절정(絶頂) / 이육사 절정(絶頂) -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재겨 : 촘촘한 틈을 비집고 찔러 넣어. - (1940. 1) ▲작품의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시인이 시대 상황과 맞서 싸우면서 치열한 갈등을 통해 도달한, 비극을 초월하려는 정신적 경지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시에 나오는 ‘매운’, ‘갈겨’, ‘칼날진’ 등은 매우 강렬하고 남성적인 이미지를 주는 시어이다. 이러한 시어들은 화자가 처한 현실의 극한 상황을 표현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인의 강한 지사적 의지와 신념을 드러내는 데 효.. 2020. 2. 10.
청포도 / 이육사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작품해설과 감상-권영민·시인 1939년 『문장(文章)』 8월호에 발표한 이육사의 시 작품이다. 남성적이고 의지적인 어조를 주로 사용한 다른 작품에 비해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가진 점이 특징이다. 청색과 백색의 선명한 색채 대비를 통해 밝고 희망적인 느낌을 주고 있으며, 전통적 소재를 활용하여 정감어린 고.. 2020. 2. 10.
별 헤는 밤 / 윤동주 별 헤는 밤 - 윤 동 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는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2020. 2. 10.
자화상(自畵像) / 윤동주 자화상(自畵像)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해와 감상 윤동주의 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마음이 여린 영혼의 소유자란 생각이다. 이렇게 여리디 여린 심성의 소유자를 우리는 조금은 억센 의미가 담긴 .. 2020. 2. 10.
참회록(懺悔錄) / 윤동주 참회록(懺悔錄) -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ㅡ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는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ㅡ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둣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구리거울 : 패망한 조선 왕조의 유물. 왕조(王朝) : 같은 왕가에 속하는 통치자의 계열, 또는 그 왕가가 다스리는 시대. 참회(懺悔) :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침. 운석(隕石) : 지구에 떨어진.. 2020. 2. 10.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 최남선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 최남선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서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파륜, 너희들.. 2020. 2. 10.
불놀이 / 주요한 불놀이 - 주요한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江)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四月)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 밀어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냄새, 모래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不足)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江)물 우에 내어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 2020. 2. 10.
오다 가다 / 김 억 <출처 : 다음 블로그 'thlee1946'> 오다 가다 - 김 억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예고 말건가 산(山)에는 청청(靑靑) 풀 잎사귀 푸르고 해수(海水)는 중중(重重) 흰 거품 밀려든다. 산새는 죄죄 제 흥(興)을 노래하고 바다엔 흰 돛 옛길을 찾노란다. 자다 깨다 꿈에서 .. 2020. 2. 10.
벽모(碧毛)의 묘(猫) / 황석우 <출처 : wvlnvdtnep 님의 블로그 > 벽모(碧毛)의 묘(猫) - 황석우 어느 날 내 영혼의 낮잠 터 되는 사막의 위 숲 그늘로서 파란 털의 고양이가 내 고적한 마음을 바라보면서 "이애, 너의 온갖 오뇌(懊惱), 운명을 나의 끓는 삶 같은 애(愛)에 살짝 삶아 주마. 만일에 네 마음이 우리들의 세계.. 2020. 2. 10.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을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이름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이해와 감상 사라졌지만 잊지 못하는 것, 갔지만 남는 것, 사람이고 사랑이다, 기억이고 세월이다. 전쟁 직후 대폿집에서 첫사랑을 떠올리며 '명동 백작' 박인환이 일필휘지로 쓴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임만석이 노래로 불렀다는 전설적 가을 명품이다. 이 시를 남기고 며칠 지나 숙취의 심장마비로 .. 2020. 2. 10.
혼야(婚夜) / 이동주 혼야(婚夜) - 이동주 금슬(琴瑟)은 구구 비둘기…… 열두 병풍 첩첩 산곡(山谷)인데 칠보 황홀히 오롯한 나의 방석. 오오 어느 나라 공주오이까. 다수굿 내 앞에 받아들었오이다. 어른 일사 원삼(圓衫)을 입혔는데 수실 단 부전 향낭(香囊)이 애릿해라. 황촉 갈고 갈아 첫닭이 우는데 깨알 같은 정화(情話)가 스스로와 …… 눈으로 당기면 고즈넉이 끌려와 혀끝에 떨어지는 이름 사르르 온몸에 휘감기는 비단이라 내사 스스로 의(義)의 장검을 찬 왕자. 어느새 늙어 버린 누님 같은 아내여. 쇠갈퀴 손을 잡고 세월이 원통해 눈을 감으면 살포시 다시 찾아오는 그대 아직 신부고녀. 금슬(琴瑟)은 구구 비둘기. -1950년 ▲이해와 감상 이 시는 1950년 지에 추천된 작품이다. 이동주는 이 ‘혼야(婚夜)’와 함께 ‘황혼.. 2020. 2. 10.
첫날 밤 / 오상순 첫날 밤 - 오상순 어어 밤은 깊어 화촉 동방의 촛불은 꺼졌다. 허영의 의상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그 청춘의 알몸이 깊은 어둠 바닷속에서 어족(魚族)인 양 노니는데 홀연 그윽이 들리는 소리 있어, 아야… 야! 태초 생명의 비밀 터지는 소리 한 생명 무궁한 생명으로 통하는 소리 열반(涅槃)의 문 열리는 소리 오오. 구운의 성모 현빈(玄牝)이여! 머언 하늘의 뭇 성좌는 이 밤을 위하여 새로 빛날진저! 밤은 새벽을 배(孕胎)고 침침히 깊어 간다. ▲작품이해 이 시의 '첫날 밤'은 속세 인간사의 남녀 관계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열반의 문 열리는 소리"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를 종교의 경지에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시상이 집결된 대목은 "아야……. 야!"로서 태초 생명의 비밀이 터지는 .. 2020. 2. 10.
방랑의 마음 / 오상순 방랑의 마음 - 오상순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魂) … 바다 없는 곳에서 바다를 연모(戀慕)하는 나머지에 눈을 감고 마음 속에 바다를 그려 보다 가만히 앉아서 때를 잃고 … 옛 성 위에 발돋움하고 들 너머 산 너머 보이는 듯 마는 듯 어릿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다 해 지는 줄도 모르고 … 바다를 마음에 불러일으켜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깊은 바닷소리 나의 피의 조류(潮流)를 통하여 오도다. 망망(茫茫)한 푸른 해원(海原) … 마음 눈에 펴서 열리는 때에 안개 같은 바다와 향기 코에 서리도다. - (1923)- ▲작품의 이해와 감상 낭만적, 관념적, 명상적, 불교적인 성격을 지닌 시로 자연과 인간의 합일이라는 오랜 동양적 이상 표현한 시다. 이 시는 두 편으로 된 연작시.. 2020.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