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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질마재 신화 - 신선(神仙) 재곤(在坤)이 / 서정주

by 혜강(惠江) 2020. 2. 12.

 

 

<사진: 국화꽃으로 단장된 질마재>

 

 

신선(神仙) 재곤(在坤)

 

 

- 서정주(徐廷柱)

 

 

 땅 위에 살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재곤(在坤)이라는 이름을 가진 앉은뱅이 사내가 있었습니다. 성한 두 손으로 멍석도 절고 광주리도 절었지마는, 그것만으론 제 입 하나도 먹이지를 못해, 질마재 마을 사람들은 할 수 없이 그에게 마을을 앉아 돌며 밥을 빌어먹고 살 권리 하나를 특별히 주었었습니다. 

 

 ‘재곤이가 만일에 목숨대로 다 살지를 못하게 된다면 우리 마을 인정(人情)은 바닥난 것이니, 하늘의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두루 이러하여서, 그의 세 끼니의 밥과 추위를 견딜 옷과 불을 늘 뒤대어 돌보아 주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갑술년(甲戌年)이라던가 을해년(乙亥年)의 새 무궁화(無窮花) 피기 시작하는 어느 아침 끼니부터는 재곤이의 모양은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일절(一切) 보이지 않게 되고, 한 마리 거북이가 기어 다니듯 하던, 살았을 때의 그 무겁디무거운 모습만이 산 채로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마다 남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줄 천벌(天罰)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가 거듭 바뀌어도 천벌은 이 마을에 내리지 않고, 농사(農事)도 딴 마을만큼은 제대로 되어, 신선도(神仙道)에도 약간 알음이 있다는 좋은 흰 수염의 조선달(趙先達) 영감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재곤이는 생긴 게 꼭 거북이같이 안 생겼던가. 거북이도 학()이나 마찬가지로 목숨이 천 년은 된다고 하네. 그러니 그 긴 목숨을 여기서 다 견디기는 너무나 답답하여서 날개 돋아난 하늘로 신선(神仙)살이를 하러 간 거여…….”

 

 

이해와 감상

 

 서정주의 시집 질마재 신화》 (1975)는 시인 서정주가 질마재를 배경으로 설화들과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시집이다. 시인은 이 책에서 자신의 고향 질마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상으로 삼아 창작한 한국인의 전통적 심성을 연작시 형태로 노래하였다

 총 45편의 산문시가 수록된 이 시집은 대부분 토속적이며 주술적인 원시적 샤머니즘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서정주는 이 시집에서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재현해 내고 있다. 자신의 내밀한 경험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토속적인 방언과 구어를 활용하여 우리의 전통 세계를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다.

  거지였던 앉은뱅이 재곤이가 신선 재곤이가 된 사연을 순차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 시에선 재곤이를 돌봐 주는 시골의 인정과 천벌을 두려워하는 순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재곤이가 사라진 사건을 해석하는 과정에서의 조선달 영감의 의견과 마을 사람들의 동조가 흥미롭고 삶의 바람직한 귀결을 바라는 데서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을 생각하게 한다. 이 시는 질마재 사람들이 재곤이라는 앉은뱅이 사내를 신선 재곤이로 생각하게 된 과정을 설화 형식으로 쓴 산문시다. 

 줄글로 되어 있어 마치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시에서 1연은 앉은뱅이 재곤이라는 사내에게 마을 사람들이 밥 빌어먹을 권리를 주었다는 내용으로 설화를 시작하여, 2연은 마을 사람들이 재곤이를 특별히 생각하는 이유, 즉 인정과 천벌이라는 전통적 윤리관을 보여준다. 이어 3연은 재곤이 마을에서 사라진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천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4연은 재곤의 사건에 대한 조 선달 영감의 해석을 보여준다. 재곤이가 거북이처럼 생겼는데 지상 마을이 답답하여 날개가 돋아나 하늘로 신선 놀이하러 간 것이라고 한다. 5연은 마을 사람들도 영감님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거지 재곤이가 신선 재곤이가 되었다는 설화로 끝맺고 있다.  

 이 시가 담고 있는 내용에서 보면, 앉은뱅이 사내 재곤이를 돌보는 일을 자신들의 의무로 생각하는 마음은 우리 민족이 지닌 심성의 전통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사라진 것이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인정미 넘치는 우리 선인들의 삶 그 모습 그대로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재곤이가 어디 좋은 곳에 갔으리라는 기원도 품고 있다.  

 

작자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시인. 호는 미당(未堂). 전라북도 고창 출생.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교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36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 이 당선되어 등단한 뒤 김광균(金光均김달진(金達鎭김동리(金東里)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발간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화사집에서 인간의 원죄의식과 전율·통곡·형벌·비원(悲願) 등 운명적 업고를 시화하였는데, 문둥이> <자화상> <화사(花蛇)등이 대표작품이다. 이어 만주에서> <살구꽃 필 때> <민들레꽃> <귀촉도(歸蜀道)등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2 시집 귀촉도를 간행하였다. 이 시기부터는 초기 원죄적 형벌과 방황에서 벗어나 동양사상으로 접근하여 화해를 주제로 삼았다

 1956년 간행된 서정주시선에서는 풀리는 한강가에서> <상리과원(上里果園)등 한민족의 전통적 한과 자연의 화해를 읊었고, > <기도등에서는 원숙한 자기 통찰과 달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달관적인 세계는 신라초(新羅抄)(1960)에 이르러 미당의 인생관 정립을 위한 신라정신이 시적 주제로 등장 새로운 질서로 확립되었고, 1968년에 나온 시집 동천(冬天)에서는 불교의 상징세계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1975질마재 신화는 고향 질마재에서 전해오는 설화를 소재로 했다. 이야기체를 그대로 수용하여 산문시 형식을 이루고 있으며, 이 시집은 미당이 회갑에 이른 때로 고향에 대한 회귀 의식이 시적 구성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1976년에 나온 떠돌이의 시이후의 작품은 그 전 작품만큼 정제되어 있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밖의 저서로는 한국의 현대시등이 있다. 흔히 미당 서정주를 가리켜 한국의 현대시를 대변하는 언어 연금술사이며, 토속적 불교적 내용을 주제로 한 서정시를 쓴 생명파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그가 현대문학사에 남긴 업적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협력했다는 이유로 친일행적에 휩싸여 그의 진가는 빛이 바랜 느낌이다. (해설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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