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광주 무등산>
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히 끼일 일인 것이다.
- [현대공론](1954년 8월호)-
<시어 풀이>
무등(無等) : 호남 광주의 산 이름.
남루(襤褸) : 헌 누더기
갈매빛 : 짙은 초록빛
지란 : 영지와 난초 - 고결한 이미지
농울쳐 : 기운을 잃고 풀이 꺾이어
청태 : 푸른 이끼 - 품위 있는 삶의 모습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서정주 초기 시에 보이던 강렬한 생명의 솟구침이 가라앉고, 화해와 달관의 세계로 다가선 서정주 문학의 제2기 대표작이다. 1954년경 광주 조선대학교 교수로 있던 그는 6ㆍ25의 상처와 물질적 궁핍이 극심한 가운데 무등산(無等山)의 크고 의젓한 자태를 삶의 모형으로 삼아 가난을 이겨내 보고자 하는 신념과 긍지를 통하여 본질적 가치에 대한 긍지와 신념을 노래했다.
가난이라는 것은 우리 몸에 걸친 헌 누더기 같은 것일 뿐 그 속에 있는 몸과 마음의 근원적인 순수성까지를 덮어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 작품 전체를 떠받치는 바탕이다. 이 시에는 육체적 곤궁과 물질적 궁핍에 처하여 그를 이기고 극복하는 시인의 의젓한 정신적 긍지가 잘 나타나 있다. 궁핍 속에서라도 높은 정신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는 이 시인의 인격이 낳은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진초록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산'처럼, 한낱 가난 때문에 우리들의 본질이 남루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무릎 아래 지란(향초)'을 기르는 무등산처럼 우리들도 자식들을 기르며, 부부의 정을 나누며 살아가다가 달관과 여유로운 자세로 인생의 오후를 받아들이자는 내용이다. 그래서 가시덤불 속에 뉘어질지라도 옥돌처럼 호젓하게 묻혔다고 위안을 삼자고 노래한다. ‘청태가 끼인 옥돌’이야말로 영원한 인간의 품위와 지조로서 비명(碑銘) 이상의 함축적 표현이다. 세사에 시달리면서도 짐짓 세상을 관조(觀照)하는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시 중에서 높은 예술적 승리를 보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군더더기가 없는 시어, 말쑥한 시경(詩境)이 가을 하늘처럼 투명하게 우리를 감동시킨다. (해설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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