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네이버 블로그 '굴렁쇠(kwangbong)'>
춘향유문(春香遺文)
- 춘향의 말 3
- 서정주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서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兜率天)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 제3시집 <서정주시선>(1955)
이 시는 고전 소설 ‘춘향전’을 모티프로 삼아 새로운 시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시로, ‘춘향의 말’이라는 부제가 붙은 세 작품 중 마지막 작품이다. 제목의 ‘유문(생전에 남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옥에 갇힌 춘향이 죽음을 앞두고 이몽룡에게 남긴 유서의 형식으로 각색되어 있으며, 시적 화자인 춘향은 여성적인 섬세함과 부드러운 어조로 시공과 생사의 경계를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이 시 역시 불교의 윤회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1~2연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화자 춘향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작별 인사를 하는 상황이 제시되고 있다. 3~4연에서는 화자가 소망하는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3연의 ‘저승(=죽음)’, 4연의 ‘천 길 땅 밑(=저승)’과 ‘도솔천(兜率天)의 하늘(=극락)’ 조차 결국은 도련님의 곁이 아니겠느냐는 반문은 시간과 공간,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선 화자 춘향의 영원한 사랑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도솔천’은 미륵보살이 사는 곳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의 육욕천(六欲天) 가운데 넷째 하늘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제를 집약하고 있는 5연에서 화자는 영원한 사랑 속에서 임과의 새로운 만남(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이러한 화자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불교의 윤회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검은 물 → 구름 → 소나기’로 연결되는 자연 현상을 통해 이러한 불교적 상상력을 구체화하고 있다. 화자는 ‘천 길 땅 밑’을 흐르는 ‘(검은) 물’을 거쳐 ‘도솔천의 하늘’을 나는 ‘구름’이 되고, 그 ‘구름’이 다시 ‘소나기’가 되어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불변의 사랑)에 비를 퍼붓는, 오랜 윤회의 과정을 통과하여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있다. 이런 사랑이기에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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