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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 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둘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 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 던고 - 조지훈 시선집 《산우집(山雨集)》(1956) ◎시어 풀이 *어디메 : ‘어디’의 방언 *성긴 : 반복되는 횟수나 도수(度數)가 뜬, .물건의 사이가 뜬. *후둘기다 : ‘두들기는’의 방언 ▲이해와 감상 조지훈의 시 는 자연과 마주 대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삶을 지향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제목의 ‘파초우’는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이라는 의미이다. 청록파인 시인답게 자연의 모습을 시.. 2020. 9. 22.
홍성 한용운 생가, 시인의 꿈과 독립사상을 키운 곳 홍성 한용운 생가 한용운 시인의 꿈과 독립사상을 키운 곳 글·사진 남상학 만해 한용운의 삶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곳은 인제의 백담사와 만해기념관과 남한산성, 그리고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 등이 있지만, 정작 그가 태어나 결혼할 때까지 유년시절과 소년시절 꿈을 키운 곳은 충청남도 홍성이다. 만해 한용운 생가는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있다. 토굴새우젓으로 소문난 홍성군 광천읍 외곽도로 사거리에서 우회전, 천수만 방면으로 향해 가다보면 결성면 소재지가 나온다. 결성우체국 앞에 이르러 우측으로 심하게 굽은 도로를 따라가면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에 닿는다. 양옆으로 과수원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한가로운 길에다가 안내판도 잘 되어 있어 생가를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만해문학체험관 밭 사이 좁은.. 2020. 9. 21.
봉황수 / 조지훈 봉황수(鳳凰愁) - 조지훈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鳳凰)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 종구품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泉)*에 호곡(呼哭)*하리라. - 《문장》(1940.2) 수록 ◎시어 풀이 *봉황수 : 봉황(우리 민족의 상징)의 슬픔 *두리기둥:둘레를 둥그렇게 깎아 만든 기둥 *단청(丹靑):벽이나 천장, 기둥.. 2020. 9. 21.
인제 문학기행, 만해 한용운의 혼이 살아 숨쉬는 백담사와 만해마을 인제 문학기행 만해 한용운의 혼이 살아 숨쉬는 백담사와 만해마을 글·사진 남상학 만해 한용운의 가르침과 향기를 찾으려면 그의 고향 땅 홍성의 만해 생가와 그의 생애에서 지조와 절조로 일관한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 서울 남한산성의 만해 기념관, 그리고 만해 정신의 산실 내설악 백담사와 만해마을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백담사 부근에서 만해와 관련되는 자료를 보려면 백담사 경내에 있는 만해기념관과 백담사 입구에서 인제 쪽으로 한참을 내려와 왼쪽으로 다리(만해교)를 건너서 만해마을을 찾아가야 한다. 만해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백담사를 행해 오르면 어디선가 바람소리, 시냇물 소리에 섞여 속삭이듯 한 편의 시가 들리는 듯하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 2020. 9. 19.
민들레꽃 / 조지훈 민들레꽃 - 조지훈 까닭 없이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 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距離)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 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 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 《신천지》(1950)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의인화된 민들레꽃 한 송이를 통해 애틋한 그리움의 마음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인 ‘나’는 죽도록 사랑하는 임의 현신(現身)일 수 있는 민들레꽃을 바라보며,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외로운 그리움을 차분한 어조로 나지막이 고백하고 있는 연시(戀詩)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이 있다. 더욱이 외로.. 2020. 9. 19.
사과 한 알 / 조인선 사과 한 알 - 조인선 나는 탯줄이 가는 줄 알았다 송아지 탯줄처럼 저절로 끊어지는 줄 알았다 의사는 가만히 가위를 내밀고 나는 곱창처럼 주름진 굵은 탯줄을 잘라냈다 사과 꼭지를 잘라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탯줄처럼 사과 꼭지는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사과 한 알을 떨구면서 나무는 얼마나 아팠을까 배꼽 같은 꼭지가 키워낸 맑은 사과 한 알 몸과 몸이 이어진 줄 하나에 삶이 있었다 죽음은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다 아내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다듬으며 고생했다고 하자 아내는 배트남 말로 엄마를 찾았다 - 시집 《노래》(2010) 수록 ▲이해와 감상 조인선의 2010년 작품인 은 그의 여섯 번째 시집인 《노래》에 실려 있다. 이 시는 아내의 출산을 목격하고 아이의 탯줄을 자른 경험을 사과를 수확하.. 2020. 9. 18.
난초(蘭草) 잎 / 조운 난초(蘭草) 잎 - 조운 눈을 파헤치고 난초(蘭草)잎을 내놓고서 손을 호호 불며 들여다보는 아이 빨간 손 푸른 잎사귀를 움켜쥐고 싶고나 - 《조운 시조집》 (1947) 수록 ▲이해와 감상 조운의 시조 은 온갖 고난을 인내하고서 피어나는 난초 잎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과 생명과의 교감이 주는 감동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화자는 눈을 파헤쳐 나온 난초를 발견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에게서 가치 추구의 열정을 발견하며 감탄하고 있다. 이 시조는 모두 3장으로 이루어진 평시조인데, 시조의 형식을 변용하고 대립적인 색채 이미지를 사용하여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평이한 시어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언어 사용을 통해 깊이 있는 주제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초장 ‘눈을 파헤치고/ 난초 잎을 내놓.. 2020. 9. 17.
'상록수'의 산실 필경사와 심훈기념관 당진 여행 '상록수'의 산실 필경사와 심훈기념관 글·사진 남상학 우리나라 농촌소설의 거장 심훈(沈熏,1901~1936)의 문학적 산실인 필경사(筆耕舍)와 심훈기념관을 찾아가는 길은 가을 햇살을 받아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을 끼고 달리는 길이어서 풍요가 넘치고 평화스러웠다. 서해안고속도로 하행선을 타고 서해대교를 지나자마자 우측 나들목으로 빠진 차는 당진군 송학면으로 접어든다. 필경사 주변의 가옥들은 모두 개량 주택으로 바뀌고 논밭은 알곡이 익어가는 정경이 풍요로 넘친다. 한참을 달려 한진포구 입구에서 '필경사'라는 표지판을 따라 왼쪽으로 들어가면 상록초교와 종탑이 높은 상록수교회가 보이고, 좁은 길을 따라 좀 더 진행하면 길 왼쪽으로 필경사가 나온다. 왼쪽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초가집이 심훈이 직접.. 2020. 9. 16.
상치쌈 / 조운 상치쌈 - 조 운 쥘상치* 두 손 받쳐 한입에 우겨넣다* 희뜩* 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 흩는* 꽃 쫓이던 나비 울* 너머로 가더라 - 시조집 《조운 시조집》(1947) 수록 ◎시어 풀이 *상치 : ‘상추’의 잘못. *쥘상치 : ‘쥐다’와 ‘상치(상추)’를 엮은 말로, 상추쌈을 쥐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말 *우겨넣다 : 억지로 밀어 넣다. *희뜩 : 얼굴을 돌리며 슬쩍 돌아보는 모양 *우긴 : ‘우겨넣은’의 줄인 말 *흩는 : 흩어지는 *울 : 울타리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제목인 ‘상치쌈’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순간적으로 한 장의 그림처럼 포착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현대시조이다. 무심코 쌈을 먹다가 자각하게 된 자신의 재미있는 표정에 착안하여 쓴 현대시조이다. 이 .. 2020. 9. 16.
물구나무서기 / 정희성 물구나무서기 - 정희성 뿌리가 뽑혀 하늘로 뻗었더라 낮말은 쥐가 듣고 밤말은 새가 들으니 입이 열이라서 할 말이 많구나 듣거라 세상에 원 한 달에 한 번은 꼭 조국을 위해 누이는 피 흘려 철야 작업을 하고 날만 새면 눈앞이 캄캄해서 쌍심지* 돋우고 공장문을 나섰더라 너무 배불러 음식을 보면 회가 먼저 동하니* 남이 입으로 먹는 것을 입으로 삼켰더라 대낮에 코를 버히니* 슬프면 웃고 기뻐 울었더라 얼굴이 없어 잠도 없고 빵만으론 살 수 없어 쌀을 훔쳤더라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보고 멀리 고향 바라 울었더라 못 살고 떠나온 논바닥에 세상에 원 아버지는 한평생 허공에 매달려 수염만 허옇게 뿌리를 내렸더라 -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 수록 ◎시어 풀이 *쌍심지 : 한 등잔에 있는 두 개의 심지. .. 2020. 9. 15.
답청(踏靑) / 정희성 답청(踏靑) ― 정희성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 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 시집 《답청》(1974) 수록 ▲이해와 감상 ‘답청(踏靑)’은 음력 삼월 삼짇날이나 청명일에 산이나 계곡으로 나가 먹고 마시며 봄의 경치를 즐기는 풍속이다. 특히 삼월 삼짇날을 ‘보리밟기’ 등 전통 민속놀이를 하는 풍속이 있어 답청절(踏靑節)이라 하는데, 이날 풀이 더 잘 자라게 밟는 것처럼 우리도 희망적인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단련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화자는 ‘우리’로 힘겹게 살아가는 민중을 지켜보며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는 인식 아래 희망적인 미래를 만들기 위해 단련.. 2020. 9. 14.
눈 덮인 산길에서 / 정희성 눈 덮인 산길에서 - 정희성 눈이 내리네 바람 맞서 울고 섰는 나무들이 눈에 덮이네 그대와 걷던 산길 북한산 기슭의 그 외딴 숫막* 함께 앉던 그 자리에도 눈이 내려 쌓이네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와도 굳은 맹세 변함 없건만 괴로워라 지금 여기 없는 그대를 위해 나는 술잔을 채울 뿐 눈이 오는 날은 울고 싶어라 그러나 기약한 그날은 갑자기 눈처럼 오는 법이 없기에 빛나는 아침을 위해 나는 녹슨 칼날을 닦으리 눈보다 차갑고 눈보다 순결한 마음으로 깊이 깊이 사랑을 새겨두리 -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수록 ◎시어 풀이 *숫막 : ‘주막’의 옛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그대’와의 추억이 깃든 북한산의 산길에 내리는 ‘눈’을 보며, ‘그대’가 없음에 슬퍼하면서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 노력하.. 2020. 9. 13.
숲 / 정희성 숲 - 정희성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 가끔 서 있더군 제 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 시집 《답청》(1974) 수록 ◎시어 풀이 *제가끔 : 제각기.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듯 ‘그대’와 ‘나’도 숲을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외로움을 느낀다. 이를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시의 화자인 ‘나’도 숱한 사람들 틈에서 외로움을 느끼면서 인간 사회도 나무들이 모여 아름다운 숲을 이루듯 인간적 교감을 나누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을 소망하고 있다. ‘숲’은 .. 2020. 9. 12.
민지의 꽃 / 정희성 민지의 꽃 -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꽃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시집 《시(詩)를 찾아서》(200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민지의 모습을 통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도 순수하고 맑은 시선으로 바.. 2020. 9. 12.
파도타기 / 정호승 파도타기 - 정호승 눈 내리는 겨울밤이 깊어갈수록 눈 맞으며 파도 위를 걸어서 간다. 쓰러질수록 파도에 몸을 던지며 가라앉을수록 눈사람으로 솟아오르며 이 세상을 위하여 울고 있던 사람들이 또 이 세상 어디론가 끌려가는 겨울밤에 굳어 버린 파도에 길을 내며 간다. 먼 산길 짚신 가듯 바다에 누워 넘쳐버릴 파도에 푸성귀로 누워 서러울수록 봄 눈을 기다리며 간다. 다정큼나무숲 사이로 보이던 바다 밖으로 지난 가을 산국화도 몸을 던지고 칼을 들어 파도를 자를 자 저물었나니 단 한 번 인간에 다다르기 위해 살아갈수록 눈 내리는 파도를 탄다. 괴로울수록 홀로 넘칠 파도를 탄다. 어머니 손톱 같은 봄눈 오는 바다 위로 솟구쳤다 사라지는 우리들의 발. 사라졌다 솟구치는 우리들의 생(生) -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1.. 2020. 9. 10.
이별 노래 / 정호승 이별 노래 - 정호승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 시집 《서울의 예수》(1982)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시랑하는 ‘그대’와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그대’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다짐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그대 떠난 뒤에도 ~ 늦지 않으리’라는 역설법과 ‘그대’를 위한 ‘노을’과 ‘별’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태도를 통해 임을 향한 간절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2020. 9. 10.
연북정(戀北亭) / 정호승 연북정(戀北亭) - 정호승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다 여기로 오라 내 책상다리를 하고 꼿꼿이 허리를 펴고 앉아 가끔은 소맷자락 긴 손을 이마에 대고 하마 그대 오시는가 북녘 하늘 바다만 바라보나니 오늘은 새벽부터 야윈 통통배 한 척 지나가노라 새벽 별 한두 점 떨어지면서 슬쩍슬쩍 내 어깨를 치고 가노라 오늘도 저 멀리 큰 섬이 가려 있어 안타까우나 기다리면 임께서 부르신다기에 기다리면 임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신다기에 연북정 지붕 끝에 고요히 앉은 아침 이슬이 되어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의 사랑도 일생에 한 번쯤은 아침 이슬처럼 아름다운 순간을 갖게 되기를 기다림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시와 시학》(1997)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제주도의 연북정(戀北亭)이라는 정자를 본 시인이 이를 소재로.. 2020. 9. 10.
수선화에게 / 정호승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라고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물가에 홀로 핀 수선화를 보며 느낀 외로움의 정서를 모든 인간을 상징하는 수선화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담아낸 시이다. 화자는 직접 드러나지 않으나 외로움에 대해 성찰하면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2020. 9. 9.
달팽이 / 정호승 달팽이 - 정호승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을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 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미물처럼 보일 수 있는 달팽이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적 강인함과 타인을 사랑하고 포용하는 자세에 대해 그리고 있는 시이다. 즉, 육체적으로 연약한 달팽이의 모습에서 강인한 정신과 포용적인 자세를 읽어내고 .. 2020. 9. 8.
풍경 달다 / 정호승 풍경 달다 -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88) 수록 ◎시어 풀이 *운주사 :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 있는 사찰. 많은 석불과 석탑이 있으며, 석조불감·9층석탑·원형다층석탑·와불(臥佛) 등이 대표적이다./ *와불(臥佛) : 누워 있는 부처. / *풍경(風磬) : 처마 끝에 매달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어 소리가 나게 한 경쇠.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운주사의 와불을 보고 오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풍경을 다는 행위를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임에 대한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짧고 간단.. 2020. 9. 8.
우리가 어느 별에서 /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랑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 시집 《서울의 예수》(1982)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별을 제재로 하여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 2020. 9. 7.
봄길 / 정호승 봄 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에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시련을 극복하고 스스로 사랑을 개척하는 삶의 태도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는 사랑과 희망의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통해 희망을 잃지 않는 의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문장 구조를 반복하여 의미를 강조하면서 시에 운율을 형성하고 있으며, 특.. 2020. 9. 7.
맹인 부부 가수 / 정호승 맹인 부부 가수 - 정호승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 2020. 9. 6.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 정호승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 정호승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고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두운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기다림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 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 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 눈 내리는 보리밭 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2020. 9. 6.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그늘’과 ‘눈물’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다른 사람의 .. 2020. 9. 5.
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시집 《서울의 예수》(1982)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심정을 서정적 어조로 표현하여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형상화하고 있다.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세상은 어둠에 잠들고 새벽달만 떠 있는 빈 길에서 오지 그대만을 그리워하는 마음, 화자는 그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인, 사.. 2020. 9. 5.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2020. 9. 4.
연필로 쓰기 / 정진규 연필로 쓰기 - 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 2020. 9. 4.
추억- '감자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 정진규 추억 - '감자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 정진규 식구들은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말없이 먹었다 신발의 진흙도 털지 않은 채 흐린 불빛 속에서 늘 저녁을 그렇게 때웠다 저녁 식탁이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여도 삐걱거렸다 다만 세째형만이 언제고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된 나날이었다 잠만은 편하게 잤다 잘 삶아진 굵은 감자알들처럼 마디 굵은 우리 식구들의 손처럼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 삽질소리들을 꿈 속에서도 들었다 누구나 삽질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맛있는 잠! 잠에는 막힘이 없었다 새벽에는 빗줄기가 조금 창문을 두드렸다 제일 부드러웠다 새싹들이 돋고 있으리라 믿었다 오늘은 하루쯤 쉬어도 되리라 식구들은 목욕탕엘 가고 싶었다 - 《시집 반 .. 2020. 9. 4.
그대들 돌아오시니 – 재외 혁명 동지에게 / 정지용 그대들 돌아오시니 – 재외 혁명 동지에게 - 정지용 백성과 나라가 이적(夷狄)*에 팔리우고 국사(國祠)*에 사신(邪神)*이 오연(傲然)히* 앉은 지 죽음보다 어두운 오호 삼십육 년!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허울* 벗기우고 외오* 돌아섰던 산(山)하! 이제 바로 돌아지라 자취 잃었던 물 옛 자리로 새소리 흘리어라 어제 하늘이 아니어니 새론 해가 오르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밭이랑 문희우고* 곡식 앗어가고 이바지하올 가음*마저 없어 금의(錦衣)*는커니와 전진(戰塵)* 떨리지 않은 융의(戎衣)* 그대로 뵈일 밖에!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사오나온 말굽에 일가친척 흩어지고 늙으신 어버이, 어린 오누이 낯설어 흙에 이름 .. 2020.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