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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 정지용 별 - 정지용 누워서 보는 별 하나는 진정 멀─고나. 어스름* 다치랴는* 눈초리와 금(金)실로 이은 듯 가깝기도 하고, 잠 살포시* 깨인 한밤엔 창유리에 붙어서 엿보노나. 불현듯, 솟아날 듯, 불리울 듯, 맞아드릴 듯, 문득, 령혼 안에 외로운 불이 바람처럼 이는 회한(悔恨)*에 피어오른다. 힌 자리옷* 채로 일어나 가슴 위에 손을 념이다.* - 출전 《가톨릭청년》(1933. 9) ◎시어 풀이 *어스름 : 조금 어둑한 상태. 또는 그런 때. *다치랴는 : 닫히려는. *살포시 : ① 포근하게 살며시, ② 드러나지 않게 살며시. *회한(悔恨) : 뉘우치고 한탄함. 후회, 한탄. *힌 : 흰. *자리옷 : 잠옷. 잠잘 때 입는 옷. *념이다 : 여미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혼자 있는 밤, 방 안에서 창밖.. 2020. 9. 3.
석류(石榴) / 정지용 석류(石榴) - 정지용 장미꽃처럼 곱게 피어 가는 화로에 숫불, 입춘 때 밤은 마른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겨울 지난 석류 열매를 쪼개어 홍보석(紅寶石)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여릿여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 해 시월 상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작은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졸음 조는 옥토끼가 한 쌍.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 고기의 손가락, 손가락,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실, 은실 아아 석류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신라 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 《정지용시집》(1935) 수록 ◎시어 풀이 *새론 : 사이로는. *여릿여릿한 : 부드럽고 약한. *시.. 2020. 9. 2.
바다 1 / 정지용 바다 1 - 정지용 오·오·오·오·오· 소리치며 달려가니, 오·오·오·오·오· 연달아서 몰아 온다. 간밤에 잠 살포시 머언 뇌성*이 울더니,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부풀어졌다. 철썩, 처얼썩, 철썩, 처얼썩, 철썩 제비 날아들 듯 물결 사이사이로 춤을 추어. - 출전 (1935) 수록 ◎시어 풀이 *뇌성(雷聲) : 천둥 치는 소리.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생명력 넘치는 아침 바다의 모습을 경이적인 자세로 바라보며 청각적·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다의 심상을 감각적인 심상으로 그려내는 이 시는 다양한 심상을 통해 바다의 역동성을 형상화함으로써 이미지즘 계열의 시 세계를 보여 준다. 2행씩 4연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1연에서 시적 화자는 파도가 몰려오는 바다의 역동적인 모습을 .. 2020. 9. 2.
어머니의 그륵 / 정일근 어머니의 그륵 - 정일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 2020. 9. 1.
흑백사진 – 7월 / 정일근 흑백사진 – 7월 - 정일근 내 유년의 7월에는 냇가 잘 자란 미루나무 한 그루 솟아오르고 또 그 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내려와 ​어린 눈동자 속 터져나갈 듯 가득 차고 찬물들은 반짝이는 햇살 수면에 담아 쉼 없이 흘러갔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착한 노래들도 물고기들과 함께 큰 강으로 헤엄쳐 가버리면 과수원을 지나온 달콤한 바람은 미루나무 손들을 흔들어 차르르 차르르 내 겨드랑에도 간지러운 새잎이 돋고 물 아래까지 헤엄쳐가 누워 바라보는 하늘 위로 삐뚤삐뚤 헤엄쳐 달아나던 미루나무 한 그루. 달아나지 마 달아나지 마 미루나무야, 귀에 들어간 물을 뽑으려 햇살에 데워진 둥근 돌을 골라 귀를 가져다 대면 허기보다 먼저 온몸으로 퍼져오던 따뜻한 오수, 점점 무거워져 오는 눈꺼풀 위로 멀리 누나가 .. 2020. 8. 31.
밥이 쓰다 / 정끝별 밥이 쓰다 - 정끝별 파나마 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 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 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 2020. 8. 30.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 2020. 8. 29.
햄버거에 대한 명상 /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 장정일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 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 오늘 내가 해 보일 명상은 햄버거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나 손쉽게, 많은 재료를 들이지 않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명상 어쩌자고 우리가 가운데서 빠질 수 있겠는가? 자, 나와 함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행하자 먼저 필요한 재료를 가르쳐주겠다. 준비물은 햄버거 빵 2 버터 1.5 큰술 쇠고기 150g 돼지고기 100g 양파 1.5개 달걀 2 빵가루 2컵 소금 2작은술 후춧가루 1/4작은술 상치 4잎 오이 1 마요네즈 소스 약간 브라운 소스 1/4컵 위의 재료들은 힘들이지 않고 당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믿을 만한 슈퍼에서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2020. 8. 28.
남상학 교장의 《아름다운 동행》을 읽고 / 홍영일 남상학 교장의 《아름다운 동행》(뿌리)을 읽고 삶의 과정에서 함께한 이들은 모두 "아름다운 동행자(同行者)" - 홍영일(전 염광고등학교장) 남상학 교장(전 숭의여고)이 자서전을 발간하였다. 신앙 간증집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는 꽃재교회 장로이기도 하다. “이제야 어렴풋이 그 끝이 보이는 긴 여행의 뒤안길, 그 길에서 쓰는 절대주를 향한 사랑의 고백록”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 볼 때,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동행하시며 삶의 모든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개입하셨고, 인도해 주셨으며, 섭리해 주셨다. 기독교적인 이념에 따라 운영하는 학교에서 16년간 교장으로, 꽃재교회에서 31년간 장로로 지낸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뜻을 같이하는 동료 .. 2020. 8. 27.
하숙(下宿) / 장정일 하숙(下宿) - 장정일 녀석의 하숙방 벽에는 리바이스* 청바지 정장이 걸려 있고 책상 위에는 쓰다만 사립대 영문과 리포트가 있고 영한사전이 있고 재떨이엔 필터만 남은 켄트* 꽁초가 있고 씹다 버린 셀렘*이 있고 서랍 안에는 묶은 플레이보이*가 숨겨져 있고 방 모서리에는 파이오니아* 앰프가 모셔져 있고 레코드 꽂이에는 레오나드 코헨*, 존 레논*, 에릭 클랩튼*이 꽂혀 있고 방바닥엔 음악 감상실에서 얻은 최신 빌보드 차트*가 팽개쳐 있고 쓰레기통엔 코카콜라와 조니 워커* 빈 병이 쑤셔 박혀 있고 그 하숙방에, 녀석은 혼곤히* 취해 대자로 누워 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짝도 않고 -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수록 ◎시어 풀이 *리바이스:미국의 청바지 상표 *켄트·셀렘:미국의 담배 상표명 *플.. 2020. 8. 27.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수 있다면 / 장정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수 있다면 - 장정일 그의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 시집 《길 안에서의 택시 잡기》(198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김춘수의 시 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사랑’을 라디오를 끄고 켜는 행위에 비유하여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현대인의 사랑을 풍자하고 있다. 화자인 ‘나’는 사랑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일회적으로 소비할 수 있.. 2020. 8. 26.
옛 노트에서 / 장석남 옛 노트에서 -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1995)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과거에 겪었던 감정의 혼란을 이겨낸 현재에서, '옛 노트'를 보면서 꿈 많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화자는 젊은 시절 품었던 꿈과 이상을 회상하고.. 2020. 8. 25.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 장석남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 –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200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수묵화에서의 ‘번짐’처럼 모든 사물과 관념이 서로 어울려 조화로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세계를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이 형상화하여, ‘번짐’을 통해 경계와 차이가 사라진 세계, 즉 조화로운 세계에 .. 2020. 8. 24.
‘배를 배며’ · ‘배를 밀며’ / 장석남 ‘배를 배며’ · ‘배를 밀며’ 장석남 시인의 시 와 는 그의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에 나란히 실려 있는 작품으로, 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을 배를 미는 행위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다. 와 는 모두 사랑과 이별을 배를 밀고 매는 일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유추에 의해 시상이 전개된다. 하지만 는 사랑의 시작과 본질에 대해 노래한 반면, 는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을 노래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장석남 시인은 이 두 작품 외에도 라는 작품이 있다. 그는 이와 같이 3부작에서 사랑과 슬픔의 정서를 배를 매고 밀어내는 구체적 행위와 연결시킨다. 장석남 시인은 ‘배를 밀며’, ‘배를 매며’, ‘마당에 배를 매다’로 이어지는 배에 관한 시 3부작에서 사랑과 슬픔의 정서를 배를 매고 밀어내는 구체.. 2020. 8. 23.
궁금한 일 - 박수근의 그림에서 / 장석남 궁금한 일 - 박수근의 그림에서 장석남 인쇄한 박수근 화백 그림을 하나 사다가 걸어놓고는 물끄러미 그걸 치어다보면서 나는 그 그림의 제목을 여러 가지로 바꾸어보곤 하는데 원래 제목인 ‘강변’도 좋지만은 ‘할머니’라든가 ‘손주’라는 제목을 붙여보아도 가슴이 알알한* 것이 여간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러다가는 나도 모르게 한 가지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가 술을 드시러 저녁 무렵 외출할 때에는 마당에 널린 빨래를 걷어다 개어놓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 빨래를 개는 손이 참 커다랬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장엄하기까지 한 것이어서 성자(聖者)의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는 멋쟁이이긴 멋쟁이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또한 참으로 궁금한 것은 그 커다란 손등 위에서 같이 꼼지락거렸을 햇빛들이며는 그가 죽은 후에 그를 .. 2020. 8. 22.
현해탄 / 임화 현해탄 - 임화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1연)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2연) · (중략) ·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간 폐허의 거칠고 큰 비석 위 새벽 별이 그대들의 이름을 비출 때, 현해탄의 물결은 우리들이 어려서 고기떼를 쫓던 실내(川)처럼 그대들의 일생을 아름다운 전설 가운데 속삭이리라. (20연)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바다 높은 물결 위에 있다. (21연) - 시집 《현해탄》(1938) 수록 ►시어 풀이 *현해탄 : 우리나라와 일본 규슈(九州) 사이에 있는 해협 ▲이해와 감상 구한말, 한반도를 둘러싸고 세계열강들의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던 그 당시, 우리 젊은 청년들은 일본을 오가며 발달한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 2020. 8. 21.
모비 딕(Moby Dick) / 이형기 모비 딕(Moby Dick) - 이형기 영화는 끝났다 예정대로 조연들은 먼저 죽고 에이허브 선장은 마지막에 죽었지만 유일한 생존자 이스마엘도 이제는 간 곳이 없다 남은 것은 다만 불이 켜져 그것만 커다랗게 드러난 아무것도 비쳐주지 않는 스크린 희멀건 공백 그러고 보니 모비 딕 제 놈도 한 마리 새우로 그 속에 후루룩 빨려가고 말았다 진짜 모비딕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이렇게 만사를 허옇게 다 지워버리는 그리하여 공백으로 완성시키는 끔찍한 제 정체를 드러낸다 - 시집 《절벽》(1998) 수록 ►참고사항 : 영화 (Moby Dick) 이라는 이름으로 1956년 존 휴스턴 감독한 작품이다.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을 원작으로 했는데, 이 작품은 19세기의 ‘위대한 미국 소.. 2020. 8. 20.
살아있는 날은 / 이해인 살아있는 날은 - 이해인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 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197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화자 자신의 삶의 과정을 한 편의 글을 쓰는 과정에 비유하여 ‘살아 있는 날은’ 절대자(신)의 뜻에 따르는 경건한 삶을 살고자 다짐하고 있다. 수녀인 그의 시에는 수도의 길을 걸으면서 내면화된 종교인으로서의 자세와 삶의 진실성을 추구.. 2020. 8. 19.
낙타 / 이한직 낙타 - 이한직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선생님이 걸어오신다 회초리를 들고서 선생님은 낙타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에 등을 지고 낙타는 항시 추억한다 - 옛날에 옛날에 - 낙타는 어린 시절, 선생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의 옛 이야기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의 오후. - 《문장》(1939) 수록 ▲이해와 감상 '낙타'는 어린 시절 선생님을 회상하게 하는 매개체로, 화자는 화창한 봄날 오후 동물원에서 늙은 낙타를 보며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고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과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다. 5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현재(1연)→과거(2, 3연)→현재(4, 5연)의 시간 순서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직유와 은.. 2020. 8. 18.
가을 떡갈나무 숲 / 이준관 가을 떡갈나무 숲 - 이준관 떡갈나무 숲을 걷는다. 떡갈나무잎은 떨어져 너구리나 오소리의 따뜻한 털이 되었다 아니면, 쐐기집*이거나, 지난 여름 풀 아래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벌레들의 알의 집이 되었다. 이 숲에 그득했던 풍뎅이들의 혼례, 그 눈부신 날개짓소리 들릴 듯한데, 텃새만 남아 산 아래 콩밭에 뿌려둔 노래를 쪼아 아름다운 목청 밑에 갈무리한다*. 나는 떡갈나무잎에서 노루 발자국을 찾아본다. 그러나 벌써 노루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오는 골짜기를 찾아 떠나갔다. 나무 등걸*에 앉아 하늘을 본다. 하늘이 깊이 숨을 들이켜 나를 들이마신다. 나는 가볍게, 오늘 밤엔 이 떡갈나무 숲을 온통 차지해 버리는 별이 될 것 같다. 떡갈나무 숲에 남아 있는 열매 하나... 2020. 8. 18.
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 《금성》(192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고양이에 대한 섬세하면서도 치밀한 관찰과 분석에서 오는 연상 작용을 통해, 봄이 주는 느낌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꽃과 같은 자연 사물로 표현되던 일반적인 방식과는 달리, 고양이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예리한 분석으로 고양이의 이미지와 봄의 이미지를 시적 감각으로 형상화하여 봄의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4연으로 된 이 시는 1, 2연과 3, 4연이 각.. 2020. 8. 17.
절규(絶叫) / 이장욱 절규(絶叫) - 이장욱 모든 것은 등 뒤에 있다.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거리의 나무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만 몸을 떨었다. 곧 네거리에 서 있는 거대한 주유소를 지나야 할 테지만 나는 아무래도 기나긴 페이브먼트*, 이 낯선 거리의 새벽 공기가 다만 불안하였다. 천천히 붉은 구름이 하늘을 흐르기 시작했으며 흐릿한 전화 부스에는 이미 술 취한 사내들 어디론가 가망 없는 통화를 날리며 한량없었으므로 나는 길 끝에 눈을 둔 채 오 분 후의 세계를 다만 생각할 수 있을 뿐, 어느 단단한 담 안쪽 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믿을 수 없는 고음역*의 레퀴엠* 등 뒤를 따라오는 몇 개의 어두운 그림자, 쉽게 부러지는 이 거리의 난간들, 나는 온 힘을 다해 아주 오래된 멜로디를 떠올렸으나 네거리.. 2020. 8. 17.
바다의 마음 / 이육사 바다의 마음 - 이육사 물새 발톱은 바다를 할퀴고 바다는 바람에 입김을 분다. 여기 바다의 은총(恩寵)*이 잠자고 있다. 흰 돛(白帆)은 바다를 칼질하고 바다는 하늘을 간질여 본다. 여기 바다의 아량(雅量)*이 간직여 있다. 물은 바다를 얽고 바다는 대륙(大陸)을 푸른 보*로 싼다. 여기 바다의 음모(陰謀)*가 서리어 있다. - 시집 《이육사전집》(2004) 수록 ►시어 풀이 *은총(恩寵) : ① 높은 사람에게서 받는 특별한 은혜와 사랑. ②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 *아량(雅量) : 속이 깊으면서 너그러운 마음씨. *보(褓) : 물건을 싸거나 씌워 덮기 위해 네모지게 만든 천. *음모(陰謀) : 좋지 못한 일을 몰래 꾸밈. 또는 그런 꾀. 음계(陰計).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중국을 거쳐 만주까지 .. 2020. 8. 16.
노정기(路程記) / 이육사 노정기(路程記) -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음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다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 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를 밀항(密航)*하는 정크*와 같아 소금에 쩔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과 싸워 가고 전설(傳說)에 읽어 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 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빈저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 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에워 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인 양 다 삭아 빠진 소라 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을 .. 2020. 8. 16.
자야곡(子夜曲) / 이육사 자야곡(子夜曲) - 이육사 수만 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내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라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 소리 숨 막힐 마음속에 어디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드리느라 수만 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 《문장》(1941. 4) 수록 ►시어 풀이 수만 호(水曼胡) : 빛이 아름답고 광택이 나는 석영의 하나. ‘석영’은 광석. ▲이해와 감상 ‘자야(子夜)’는 밤 11시부터 새벽 1까지의 한밤중을 가리.. 2020. 8. 15.
교목(喬木) / 이육사 교목(喬木) -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하리. - 《인문 평론》(1940) 수록 ◎시어 풀이 *교목(喬木) : 줄기가 곧고 굵으며 8m 이상 높이 자라고 위쪽에서 가지가 퍼지는 나무. 소나무·향나무 따위의 큰키나무. ‘관목(灌木)’의 상대어.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줄기가 곧고 높이 자라는 나무를 의미하는 ‘교목’을 통해 고통스런 시련 속에서도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화자의 강인한 신념과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교목은 오랜 세월 동안 고통과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뚝 서서 꿋꿋하게 .. 2020. 8. 15.
오랑캐꽃 / 이용악 오랑캐꽃 - 이용악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인문평론》(1939. 10) 수록 ◎시어 풀이 *도래샘 : 도랑가에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 ‘도래'는 '도랑'의 함경북.. 2020. 8. 14.
하늘만 곱구나 / 이용악 하늘만 곱구나 - 이용악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두 손 오구려 혹혹 입김 불며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거북네는 만주서 왔단다 두터운 얼음장과 거센 바람 속을 세월은 흘러 거북이는 만주서 나고 할배는 만주에 묻히고 세월이 무심찮아 봄을 본다고 쫓겨서 울면서 가던 길 돌아왔단다 띠팡*을 떠날 때 강을 건널 때 조선으로 돌아가면 빼앗겼던 땅에서 농사지으며 가 갸 거 겨 배운다더니 조선으로 돌아와도 집도 고향도 없고 거북이는 배추 꼬리를 씹으며 달디달구나 배추 꼬리를 씹으며 꺼무테테한 아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배추 꼬리를 씹으며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누 첫눈 이미 내리고 이윽고 새해가 온다는데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 2020. 8. 14.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嶺)*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리켰다 때늦은 의원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의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시집 《분수령》.. 2020. 8. 13.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 이용악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 이용악 삽살개 짖는 소리 눈보라에 얼어붙은 섣달그믐 밤이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걸어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은 자옥* 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 어머닌 서투른 마우재 말*도 들려 주셨지.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등불이 깜빡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다시 내게로 헤여 드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 2020. 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