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살아있는 날은 / 이해인
by 혜강(惠江)
2020. 8. 19.
살아있는 날은
- 이해인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 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197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화자 자신의 삶의 과정을 한 편의 글을 쓰는 과정에 비유하여 ‘살아 있는 날은’ 절대자(신)의 뜻에 따르는 경건한 삶을 살고자 다짐하고 있다. 수녀인 그의 시에는 수도의 길을 걸으면서 내면화된 종교인으로서의 자세와 삶의 진실성을 추구하는 시적 경향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시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작가가 지니고 있는 절대자에 대한 구도적 삶의 자세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시인은 이러한 구도자로서의 삶을 형상화하기 위해 자신을 ‘연필’에, 자신의 삶을 한 편의 글을 쓰는 과정에 비유하고 있다.
이해인의 시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시 역시 대체로 어려운 어휘가 사용되지 않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언어가 사용된다. 시어의 선택뿐만 아니라, 시의 소재 역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들이다. 작가는 예리한 감수성과 시각을 바탕으로 그러한 소재들의 내면적 속성을 꿰뚫으면서 시의 의미를 끌어내고 있다.
1연에서는 구도자로서의 경건한 삶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마른 향내’는 은은하게 풍기는 냄새로 수도자가 지녀야 할 품격과 경건한 태도이며, ‘연필’은 정직한 삶의 가치를 표방한다.
2연에서 ‘사각사각 소리 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라는 표현은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는 행위를 통해 끊임없는 성찰과 자기반성의 태도를 보여 준다. 맑고 경쾌한 음성상징어 ‘사각사각’과 ‘연하고 부드러운’의 이미지는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
3연에서는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라고 자신의 소망을 드러낸다. ‘예리한 칼끝’은 외부로부터 오는 시련으로 그로 인해 몸을 깎이는 희생이 있더라도 단정하고 꼿꼿한 연필처럼 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연필’은 화자의 소망이 투영된 곧고 올바른 삶의 표상이 된다.
4연에서는 ‘나는 당신의 살아있는 연필’로 절대자에 순응하며 살아가겠다는 순종적인 태도를 보인다. 여기서 ‘나’와 ‘연필’의 관계가 구도자인 ‘나’와 절대자인 ‘당신’의 관계로 전환된다. 연필의 나의 도구였던 것처럼, 이제 ‘나’는 절대자를 위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는 글을 쓰겠습니다’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절대자의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말로’ 쓰겠다는 것은 비록 내가 처한 상황이 절망적(부정적)이라 해도 희망적(긍정적)인 진리의 말씀으로 당신이 원하는 글을 쓰겠다는 것이다.
마지막 5연에서는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이 말은 절대자인 당신을 위하여 살다가 향내가 사라지는 것처럼 조용히 소멸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결한 몸짓’은 구도자로서 신을 닮고자 하는 경건한 모습이며,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라는 시구는 마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희생한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이처럼 시인은 절대자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헌신의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결국, 이 시는 연필은 깎아 글을 쓰듯이, 자신을 깎아 내며 경건한 자세로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며, 정직한 자세로 절대자의 뜻에 따라 순종적으로 살며, 절대자를 위하여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삶의 자세를 다짐하고 있다.
이해인 시인은 장석주 시인이 말했듯이, 신을 향한 절대의 사랑과 인간의 미소(微小)함에 대한 겸손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가 선택하는 시어들은 범속하고 담백한 것들이며, 표현 또한 평이하게 소박하다. 그렇지만 그의 맑고 투명한 서정으로 빚어 경건하고 차분한 독백적 어조로 표현하는 시들은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함, 거기에 응축된 진실과 열화 같은 사랑으로 조화롭게 직조되어 세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울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작자 이해인(李海仁, 1945 ~ )
시인·수녀. 강원도 양구 출생. 1970년 월간 《소년》에 동시(童詩) 부문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주로 영혼의 구원이나 절대자에게로의 귀의를 주제로 한 시를 발표하였다. 따라서 시의 형식 역시 신에 대한 기도의 형식으로 쓰인 것이 많다. 시집으로는 《민들레의 영토》(1976), 《내 혼에 불을 놓아》(1979),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 《시간의 얼굴》(1989), 《엄마와 분꽃》(1992),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1999), 《엄마》(2008), 《희망은 깨어있네》(2010),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2014)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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