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Moby Dick)
- 이형기
영화는 끝났다
예정대로 조연들은 먼저 죽고
에이허브 선장은 마지막에 죽었지만
유일한 생존자
이스마엘도 이제는 간 곳이 없다
남은 것은 다만
불이 켜져 그것만 커다랗게 드러난
아무것도 비쳐주지 않는 스크린
희멀건 공백
그러고 보니 모비 딕 제 놈도
한 마리 새우로
그 속에 후루룩 빨려가고 말았다
진짜 모비딕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이렇게
만사를 허옇게 다 지워버리는
그리하여 공백으로 완성시키는
끔찍한 제 정체를 드러낸다
- 시집 《절벽》(1998) 수록
►참고사항 : 영화 <모비 딕>(Moby Dick)
<백경>이라는 이름으로 1956년 존 휴스턴 감독한 작품이다.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백경(모비 딕)>을 원작으로 했는데, 이 작품은 19세기의 ‘위대한 미국 소설’로 평가받았다. 그 줄거리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포경선의 유일한 생존자 이스마엘이 고래와 목숨을 건 싸움을 회상 형식으로 쓴 작품이다. '모비 딕'이라는 거대하고 횡포한 흰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 선장은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피쿼드호를 타고 난타스케트 항을 출발한다. 오랜 항해 끝에 드디어 흰고래를 발견하여 3일간에 걸친 사투를 벌이나 선장을 포함한 승무원 전원이 수장되고 간신히 이스마엘만 살아남는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모비 딕’이라는 ‘흰고래’에 복수하는 것이지만, ‘자신과의 싸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거대한 백경의 투쟁을 웅장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인간의 집념과 욕망의 집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고래와 대적하는 한 인간의 처절한 사투(死鬪)를 그린 영화를 보면서, 욕망과 집념의 대상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공백만 남자 인간의 욕망과 집념(執念)의 허무함, 부질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화자가 본 영화를 주관적 감상을 배제한 채 서술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이에 대한 화자의 인식과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1연에서는 <모비 딕> 영화가 끝나고 조연들과 에이허브 선장도 죽고 유일한 생존자인 이스마엘 등 등장인물들의 퇴장을 보여준다. 에이허브 선장은 영화의 주인공으로 한쪽 다리를 ‘모비 딕’에게 잃은 후 복수심을 불태우며 모비 딕을 쫓는, 욕망과 집념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유일한 생존자로 작품 속의 관찰자이기도 하다.
2연은 영화가 끝난 후 공백으로 남게 된 스크린을 보여준다. ‘남은 것은 다만/ 불이 켜져 그것만은 커다랗게 드러난/ 아무것도 비춰주지 않는 스크린/ 희멀건 공백’에서 ‘그것’은 공백의 스크린을 가리키는 것이며, ‘희멀건 공백’은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화자의 허무 의식을 표출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쫓는 욕망도 결국에는 이처럼 부질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3연에서는 ‘모비 딕 제 놈도/ 한 마리 새우로/ 그 속에 후루룩 빨려가고 말았다’라고 하면서, 쫓는 에이허브 선장뿐만 아니라 에이허브 선장에게는 욕망과 집착의 대상인 ‘모비 딕’마저도 보잘것없는 ‘새우’처럼 부질없이 사라진 것을 인식한다.
마지막 4연에서는 허무함으로 귀결되는 욕망의 본질에 대한 화자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욕망의 실체이며 본질인 ‘진짜 모비 딕’은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만사를 다 허옇게 지워버리는’ 공백으로 완성된다는, 즉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 아래, ‘끔찍한 제 정체’인 욕망의 ‘부질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모든 욕망과 집념의 본질은 허무한 것이란 화자의 인식을 표현한 것이다.
이 시는 이형기 시인의 후반기 작품으로, 초기의 부드러움과 우아함의 여성적 정서를 탈피하여 이형기의 허무주의적 성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시 말하면, 장렬한 소멸의 이미지를 구상화하면서 부정과 파멸의 미학을 추구하는 남성적 시학의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형기(李炯基, 1933~2005)
시인, 경남 진주 출생. 1950년 17세의 나이로 《문예》 지에 <비 오는 날>, <코스모스>, <강가에서> 등을 선보이며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자연발생적인 낭만적 순수 서정의 모습으로 출발하여, 오랜 투병 생활 중에 발표한 《절벽》(1998)에서는 날카로운 언어적 직관을 내보이며 실존의 탐구와 허무 의식을 바탕으로 ‘부질없음’과 ‘비어 있음’이라는 명제에 관심을 두고 시작 활동을 하였다. 시집 《해 넘어가기 전의 기도》(1955), 《적막강산》(1963), 《돌베개의 시》(1971), 《꿈꾸는 한발(旱魃)》(1976), 《풍선 심장》(1981), 《보물섬의 지도》(1985), 《심야의 일기예보》(1990), 《절벽》(1998) 등이 있다. 그밖에 평론집으로 《감성의 논리》(1976), 《한국문학의 반성》(1980), 《시와 언어》(1987), 시론집 《시란 무엇인가?》(1993) 등이 있다.
►작성 : 남상학 시인
'문학관련 > - 읽고 싶은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궁금한 일 - 박수근의 그림에서 / 장석남 (0) | 2020.08.22 |
---|---|
현해탄 / 임화 (0) | 2020.08.21 |
살아있는 날은 / 이해인 (0) | 2020.08.19 |
낙타 / 이한직 (0) | 2020.08.18 |
가을 떡갈나무 숲 / 이준관 (0) | 2020.08.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