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떡갈나무 숲
- 이준관
떡갈나무 숲을 걷는다. 떡갈나무잎은 떨어져
너구리나 오소리의 따뜻한 털이 되었다 아니면,
쐐기집*이거나, 지난 여름 풀 아래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벌레들의 알의 집이 되었다.
이 숲에 그득했던 풍뎅이들의 혼례,
그 눈부신 날개짓소리 들릴 듯한데,
텃새만 남아
산 아래 콩밭에 뿌려둔 노래를 쪼아
아름다운 목청 밑에 갈무리한다*.
나는 떡갈나무잎에서 노루 발자국을 찾아본다.
그러나 벌써 노루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오는
골짜기를 찾아 떠나갔다.
나무 등걸*에 앉아 하늘을 본다. 하늘이 깊이 숨을 들이켜
나를 들이마신다. 나는 가볍게, 오늘 밤엔
이 떡갈나무 숲을 온통 차지해 버리는 별이 될 것 같다.
떡갈나무 숲에 남아 있는 열매 하나.
어느 산짐승이 혀로 핥아보다가, 뒤에 오는
제 새끼를 위해 남겨 놓았을까? 그 순한 산 짐승의
젖꼭지처럼 까맣다.
나는 떡갈나무에게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떡갈나무는 슬픔으로 부은 내 발등에
잎을 떨군다. 내 마지막 손이야. 뺨에 대 봐,
조금 따뜻해질 거야, 잎을 떨군다.
- 시집 《가을 떡갈나무 숲》(1991) 수록
►시어 풀이
*쐐기집 : 쐐기나방의 애벌레가 사는 집.
*갈무리하다 : 일을 처리하여 마무리하다.
*등걸 : 줄기를 잘라낸 나무의 밑동. 나뭇등걸.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낙엽이 떨어진 가을의 ‘떡갈나무 숲’의 미세한 생명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자연과 인간이 서로 갈등 없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이 시는 '떡갈나무 숲'을 의인화하여 가을의 '떡갈나무 숲'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적 대상인 '떡갈나무 숲'은 화자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화자가 바라보는 '떡갈나무 숲'은 어떤 부정적인 요소도 끼어들 틈이 없는 순수함을 지닌 존재로,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이들에게 사랑과 위안, 평안을 준다. 이는 화자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공감각적 심상을 사용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화자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치유되는 과정을 형상화하였다. 제목에 제시된 것처럼 화자가 시적 대상인 '떡갈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는 현재의 시점은 가을이다. 가을에 잎을 떨구는 '떡갈나무'를 바라보면서 화자는 무성한 잎으로 뒤덮여 있었던 여름날 '떡갈나무'의 모습까지 상상하게 된다. 여름에서 가을로 시간이 경과했지만, 곤충과 동물, 그리고 인간까지 포용하는 '떡갈나무'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1연에서 화자는 떡갈나무 숲을 거닐며 생명체를 품어 안는 떡갈나무 숲을 묘사하고 있다. 떡갈나무 숲은 ‘너구리나 오소리의 따뜻한 털’이 되거나 쐐기집이나 여름에는 벌레들의 알집이 되는 등 숲에 사는 생명체의 안식처가 되어 준다.
2연과 3연은 떡갈나무 숲의 가을 풍경을 보여 준다. ‘이 숲에 그득했던 풍뎅이의 혼례/ 그 눈부신 날갯짓 소리 들릴 듯한데/ 텃새만 남아/ 산 아래 콩밭에 뿌려둔 노래를 쪼아/ 아름다운 목청 밑에 갈무리한다’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여름 한 철 가득 모여 짝짓기하던 풍뎅이들은 간 곳이 없고, 텃새만 남아 콩밭 주변을 날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을풍경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눈부신 날갯짓 소리’는 공감감적 표현이며, ‘콩밭에 뿌려 둔 노래를 쪼아’는 콩밭에 뿌려 둔 곡식이 아름다운 노래가 되고 있음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3연에서 화자는 자유롭게 뛰노는 노루의 삶의 공간이기도 하였으나 그 노루마저 깊은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오는 골짜기로 떠나 버렸다. ‘파릇한 산울림’ 역시 공감각적 표현이다. 2, 3연은 가을이 되어 자취는 감추었지만, 여전히 떡갈나무 숲은 갖가지 동식물의 삶의 공간으로 그들의 좋은 안식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4연에서 화자는 자연과 교감하며 일체감을 느낀다. 나무 등걸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화자는 ‘하늘이 깊이 숨을 들이켜/ 나를 들이켜 마신다’라고 하여 청명한 가을 하는 속에 빠져들면서 하늘과 완전히 일체감을 이루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며, 그날 밤 ‘별이 될 것 같다’라며 '떡갈나무 숲'과 하나가 된 '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즉 자연과 교감(交感)하며 일체감을 느낀다. 이어 5연에서도 ‘떡갈나무 숲’이 자연과 자연이 교감하는 모습을 ‘떡갈나무 숲에 남아 있는 열매 하나/ 어느 산짐승이 혀로 핥아 보다가, 뒤에 오는/ 재 새끼를 위해 남겨 놓았을까?’라고 말하면서, ‘그 순한 산짐승의 젖꼭지처럼 까맣다’라고 하여 '떡갈나무 숲'의 포용력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6연에서 화자 역시 숲에 깊이 동화되어 숲이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도 모두 감싸 안아 주는 것 같은 위안을 얻는다. ‘나는 떡갈나무에게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떡갈나무는 슬픔으로 부은 내 발등에/ 잎을 떨군다. 내 마지막 손이야. 뺨에 대봐/ 조금 따뜻해질 거야, 잎을 떨군다.’라고 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떡갈나무 숲'이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삶을 포용하는 존재, 즉 안식과 위안과 평안을 주는 낙원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역시 고립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다.
▲작자 이준관(李準冠, 1949 ~ )
시인ㆍ아동 문학가. 전북 정읍 출생.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시 <초록색 크레용 하나>가 당선되고, 1974년 《심상》에 시 <풀벌레 울음송>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아름다운 자연과 어린이의 생활을 바탕으로 한 동시를 많이 발표했다. 시집으로 《황야》(1983), 《가을 떡갈나무 숲》(1991), 《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 《부엌의 불빛》(2005), 《천국의 계단》 등이 있다. 동시집으로 《크레파스화》, 《씀바귀꽃》, 《우리나라 아이들이 좋아서》,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쑥쑥》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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