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노트에서
-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1995)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과거에 겪었던 감정의 혼란을 이겨낸 현재에서, '옛 노트'를 보면서 꿈 많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화자는 젊은 시절 품었던 꿈과 이상을 회상하고 막연한 그리움으로 옹색하게 산 것을 반성하고 있다.
함축적인 시어를 사용하여 주제 의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과거의 시간을 회상하며 시상을 전개하고,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여 차이점을 서술하고 있다.
'옛 노트'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시상이 전개되는데, 1~7행에서는 순수한 꿈과 이상으로 가득했던 젊은 시절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화자는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라는 설의적 표현으로, 과거 젊은 시절에는 많은 ‘빛’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빛’은 젊은 시절 품었던 많은 꿈을 지칭한다. 그리고 화자는 그 빛 속에서 ‘풀밭’과 ‘투명한 개울’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순수한 꿈과 이상을 피워 올리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8~12행에서 화자는 젊은 날 지녔던 그 ‘많은 빛’을 좇으며 긴 시간을 견디어 결실의 시간에 다다랐다.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라는 것은 ‘긴 시간’을 견디어 낸 결과이며, 젊은 시절의 막연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간신히 극복하고 이제 막 작은 결실이나마 얻을 수 있게 된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간신히'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감정의 정리가 완벽하게 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화자는 13~17행에서 와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라고 표현하여, 막연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젊은 시절에 대한 회한과 반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화자가 그리움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아직도 조금은 솟아오르는 감정의 조각을 숨죽이며 억누르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젊은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열병(熱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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