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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 장석남

by 혜강(惠江) 2020. 8. 24.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독서의 환희'>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 –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200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수묵화에서의 ‘번짐’처럼 모든 사물과 관념이 서로 어울려 조화로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세계를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이 형상화하여, ‘번짐’을 통해 경계와 차이가 사라진 세계, 즉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묵화에서의 ‘번짐’의 의미는 형태와 색채, 농담(濃淡)과 여백(餘白)에 뚜렷한 구별을 하지 않고 대상을 표현하는 수묵 담채의 기법이다. 화자는 ‘번짐’이 나타난 수묵호 속 정원처럼 여러 존재와 관념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세계를 지향하고자 한다.

 

  이 시에서 화자인 ‘나’는 자신의 구체적 상황을 제시하기보다는 정형적 인식에서 벗어난 사유를 통해 다양한 이미지를 연결하여 화자가 지향하는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번짐’, ‘~되고’와 ‘~된다’라는 시어를 반복하여 의미를 강조하면서 시상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으며, 단정적인 어조로 화자 자신의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1~6행에서는 계절의 변화와 ‘너’와 ‘나’의 번짐을 묘사하고 있다. 계절인 ‘봄(목련꽃)’은 ‘여름’으로, ‘너’는 ‘나’로, ‘나’는 다시 ‘너’로 번지고, 7~10행에서는 ‘꽃’이 ‘열매’로, ‘여름’은 ‘가을’로 성장과 결실의 번짐을 보여준다. 그리고 11~16행에서는 모든 사물들의 번짐으로 확대됨을 보여준다. 즉 ‘음악’은 ‘그림’으로, ‘삶’은 ‘죽음’으로, ‘저녁’은 ‘밤’으로 번진다. 여기서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 서로 단절된 별개의 것이 아니고 이어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밝힌다’라는 것은 죽음은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닌, 삶을 밝힐 수 있는 긍정적인 대상으로 계속 반복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하나 번져서/ 봄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고 한다. 이것은 ‘번짐’이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인간의 삶을 의미하는 ‘오두막 한 채’가 봄의 도래와 계절의 변화인 ‘봄나비’로 번져, 결국 인간과 자연의 번짐, 사랑의 번짐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 전개 방식은 경계가 생기거나 구별되지 않고, 서로 이어져 조화로운 상태를 ‘번짐’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러한 ‘번짐’을 통해서 자연의 연속성과 순환성, 존재와 관념들의 상호성을 바탕으로 차이와 경계와 대립을 극복하고 결실, 성장, 소생, 사랑의 조화로운 세계가 되기를 바라는 화자의 소망을 투영한 것이다.

 

 

▲작자 장석남(張錫南, 1965 ~ )

 

 

  시인. 인천 옹진(덕적도) 출생. 1987년 《경향일보》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시단에 등장했다. 아름답고 섬세한 감성으로 마음의 풍경을 묘사하는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절제된 시어로 내면의 깊은 서정을 보여 주는 그의 시는 특히 이미지의 탁월한 구사를 보여준다. 시집으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1991),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1995), 《젖은 눈》(1998),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2001),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2005), 《뺨에 서쪽을 빛내다》(2010),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2012)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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