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수 있다면
- 장정일
그의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 시집 《길 안에서의 택시 잡기》(198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사랑’을 라디오를 끄고 켜는 행위에 비유하여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현대인의 사랑을 풍자하고 있다. 화자인 ‘나’는 사랑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일회적으로 소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시는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운율과 통사 구조 등 형식적인 면을 원시인 <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패러디 기법은 이미 독자에게 익숙한 시 형식이나 내용을 변형시키는 방법으로, 이런 방식을 통해 독자에게 기존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거나 창작 주체인 시인의 시 의식을 뚜렷하게 보여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또한 이 시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인 ‘사랑’을 ‘라디오’라는 구체적인 사물을 활용하여 나타내고 있다.
1연은 ‘내가 단추를 눌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한다. 김춘수의 시가 ‘꽃’을 소재로 등장시켰다면, 이 작품은 ‘라디오’를 소재로 등장시킨다. 라디오는 ‘단추’로 작동되는데, 라디오는 사랑이라는 정신적 개념을 사물화하여 표현한 대상이며, 단추는 사랑하기 위한 소통의 수단이다. 따라서 단추를 누르기 전에는 무의미한 존재인 ‘하나의 라디오’일 뿐이다.
그러나 2연에 와서, 단추를 누르면 의미 있는 존재인 ‘전파’가 된다. 다시 말해 단추를 누르지 않으면 라디오는 그냥 무용지물에 불과하지만, 단추를 눌러 주면 ‘전파’가 되어 ‘나’와 그를 이어 주는 사랑의 감정을 지니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3연에 와서 화자는 그렇게 자신이 라디오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 주기를 바란다. 그러면 자신도 그 누군가에게로 가서 그의 전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은 타인과의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현대인의 내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파’는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현대인의 고독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랑’을 가리킨다.
4연에 와서 화자는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라고 ‘우리’로 확대하여, 서로의 단추를 눌러 주면 서로가 서로에게 전파가 되고, 이러한 전파에 의해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전파는 ‘나’와 그 누군가를 이어 주는 존재이면서 사랑의 감정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화자는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고 한다.’ 이것은 의도된 뒤틀림이요, 시상의 반전이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켤 수 있는‘ 것이라면, 일회적이고 편의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가 이 시에서 패러디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사랑의 의미를 그저 편하고 가볍게만 받아들이고 사랑 자체를 일회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사랑의 세태, 즉 인스턴트 사랑에 대한 풍자요, 비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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