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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하숙(下宿) / 장정일

by 혜강(惠江) 2020. 8. 27.

 

 

 

하숙(下宿)

 

 

- 장정일

 

 

녀석의 하숙방 벽에는 리바이스* 청바지 정장이 걸려 있고

책상 위에는 쓰다만 사립대 영문과 리포트가 있고 영한사전이 있고

재떨이엔 필터만 남은 켄트* 꽁초가 있고 씹다 버린 셀렘*이 있고

서랍 안에는 묶은 플레이보이*가 숨겨져 있고

방 모서리에는 파이오니아* 앰프가 모셔져 있고

레코드 꽂이에는 레오나드 코헨*, 존 레논*, 에릭 클랩튼*이 꽂혀 있고

방바닥엔 음악 감상실에서 얻은 최신 빌보드 차트*가 팽개쳐 있고

쓰레기통엔 코카콜라와 조니 워커* 빈 병이 쑤셔 박혀 있고

그 하숙방에, 녀석은 혼곤히* 취해 대자로 누워 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짝도 않고

 

 

-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수록

 

 

◎시어 풀이

 

*리바이스:미국의 청바지 상표

*켄트·셀렘:미국의 담배 상표명
*플레이보이:미국의 대표적인 도색 잡지
*파이오니아:외국 전자 회사의 상표

*레오나드 코헨(1934~2016) 캐나다의 싱어송라이터, 시인, 소설가, 영화배우.

*존 레논(1940~1980) :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밴드인 비틀즈의 창립 멤버.

*에릭 클랩튼(1945~ ) : 영국의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빌보드 차트 : 미국 음악 잡지에서 매주 싱글과 앨범 성적을 합산해서 발표하는 차트

*조니 워커:외국 양주 상표

*혼곤히 : 정신이 흐릿하고 고달프게.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화자가 하숙방에서 시적 대상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묘사함으로써, 서구 물질문명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세태를 간접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여러 가지 사물들을 나열하고 열거하여 독자로 하여금 주제 의식을 유추하게 만들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물질문명에 푹 빠진 오늘날의 세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 이는 시적 화자가 시적 대상인 ‘녀석’에 대해 관찰자의 시선으로 거리를 두어 묘사함으로써 가치 평가를 독자에게 돌리는 방법을 통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간접적 비판은 직접적 비판보다 의미 전달 면에서 명확성은 떨어지지만,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거부감이 적다고 말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독자에게로의 가치 평가 전도는 독자마저 시적 화자의 인식 세계로 끌어들이는 효과적인 장치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하숙>은 총 10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자는 ‘녀석’이라고 불리는 어떤 인물의 하숙방을 눈으로 훑듯이 소개하고 있다. 1행부터 8행까지는 하숙방에 있는 사물들의 모습이 나열되었고, 9행과 10행은 하숙방의 ‘녀석’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1행부터 8행까지 화자는 ‘녀석’의 의복, 사전과 담배, 음악, 주류와 기호품들을 늘어놓는다. 이것들은 화자가 처한 사회, 문화적 배경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나열된 사물을 살펴보면 서구 문물과 관련된 것들인데, 그것들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물이라는 점 외에는 어떤 질서정연함은 사라진 것들로 보인다.

 

  계속해서 9행과 10행의 ‘녀석’은, 이 하숙방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데, 이는 앞서 나열된 서구 문물에 경도(傾倒)된 모습으로서, 주체성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녀석’은 이것들을 서구적 유행을 좇으며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충족시키며 살아갈 뿐이다. 따라서 제목의 ‘하숙’은 주체성을 잃은 ‘녀석’의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숙>은 아무런 여과 장치도 없이 서구의 물질문명을 생각 없이 받아들여 일상적인 삶 속에서 서구적 물질문명에 경도되어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충족시키며 살아가는 경박한 풍조와 세태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젊은이들의 서양 문화에 대해 심취하는 태도와 문화적 종속성을 비판하고 고발하고 있다. 이 시는 1980년대에 쓰인 작품이지만 2020년이 된 지금에 오히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작자 장정일(蔣正一, 1962 ~ )

 

 

  시인·소설가. 대구시 달성 출생. 1984년 무크 《언어 세계》에 <강정 간다>로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작품 경향으로, 재기발랄한 도시적 감수성과 방법적 해체 기법을 통해 사회의 병적인 자본주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길 안에서의 택시 잡기》(1988) 등이 있으며, 소설로는 《아담이 눈뜰 때》(1990),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2)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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