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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순례11 / 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순례11 -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 시집 《순례》(1973)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살아 있는 존재는 늘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 그 흔들림이야말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몸짓임을 말하고 있다. 화자는 직접 드러나지 않고, 자연의 모습에 비유하여 삶을 성찰하고 있으며,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가듯 사람도 시련을 겪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드.. 2020. 7. 11.
꽃의 페러디 / 오규원 꽃의 페러디* - 오규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금잔화, 작약, 포인세티아, 개밥 풀, 인동, 황국 등등의 보통 명사나 수 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 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 시집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1981) 수록 ◎시어 풀이 *패러디(parody) : 특정 작품의 .. 2020. 7. 10.
물증 / 오규원 물증 - 오규원 아프리카 탕가니카 호(湖)에 산다는 폐어(肺魚)*는 학명이 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 그들은 폐를 몸에 지니고도 3억만 년 동안 양서류*로 진화하지 않고 살고 있다 네 발 대신 가느다란 지느러미를 질질 끌며 물이 있으면 아가미로 숨 쉬고 물이 마르면 폐로 숨을 쉬며 고생대(古生代) 말기부터 오늘까지 살아 어느 날 우리나라의 수족관에 그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 뻘* 속에서 4년쯤 너끈히 살아 견딘다는 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여 뻘 속에서 수십 년 견디는 우리는 그렇다면 30억만 년쯤 진화하지 않겠구나 깨끗하게 썩지도 못하겠구나 - 시집 《사랑의 감옥》(2001) 수록 ◎시어 풀이 *폐어(肺魚) : 허파로 공기 호흡을 하는 물고기. 몸길이가 1~2m 정도. 물속에서는 아가미로 숨을 쉬지만, 비가.. 2020. 7. 9.
그 이튿날 / 오규원 그 이튿날 - 오규원 바람이 불고 간 그 이튿날 뜰에 나간 나는 감나무의 그림자가 한 꺼풀 벗겨진 걸 발견했다. 돌아서는 순간 뜰이 약간 기울어진 걸 발견했다. 뜰 위에는 부러진 아침 어깨뼈의 일부. 부러진 하느님 어깨뼈의 일부. 대문을 열고 출근하는 나의 발에 골목에 찢어져 뒹굴던 산의 외투가 한 자락 걸렸다. 아침을 픽픽 웃는 엊저녁 광대뼈의 표정이 보였다. - 시집 《분명한 사건》(197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바람이 분 다음 날의 풍경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시인의 상상력과 감수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바람이 불고 간 그 이튿날의 모습을 시각화하여 바람의 파괴적 행위와 그것을 바라보는 불안한 내면 의식을 예민한 감각과 깊은 통찰력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 그려 낸 풍경.. 2020. 7. 9.
북방(北方) / 안도현 북방(北方) - 안도현 물 좋은 명태의 대가리며 몸통을 칼로 쫑쫑 다져 엄지손톱 크기로 나박나박* 썬 무와 매운 양념에 버무려* 먹는 찬이 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명태선*이라 한다. 국어사전에는 물론 없다 이 별스럽고 오래된 반찬은 눈발의 이동 경로를 따라 북방에서 남으로 내려왔을 것 같다. 큰 산에 눈 많이 내리거나 처마 끝에 고드름 짱짱해야* 내륙의 부엌에서는 도마질 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이것을 나는 노인처럼 편애*하였다. 들창*에 눈발 치는 날 달착지근한* 무를 씹으면 입에서 눈 밟는 소리가 나서 좋았고, 덜 다져진 명태 뼈가 가끔 이에 끼여도 괜찮았다 나도 얼굴을 본 적 없는 할아버지가 맛있게 자셨다는 이것을 담글 때면 어머니는 솜 치마 입은 북쪽 산간지방의 여자가 되었으리라. 그런 날은 .. 2020. 7. 8.
석류(石榴) / 안도현 석류(石榴) - 안도현 마당가에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나서 나도 지구 위에다 나무 한 그루를 심었노라, 나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몰랐지요 그때부터 내 몸은 근지럽기* 시작했는데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석류나무도 제 몸을 마구 긁는 것이었어요 새잎을 피워 올리면서도 참지 못하고 몸을 긁는 통에 결국 주홍빛 진물*까지 흐르더군요 그래요, 석류꽃이 피어났던 거죠 나는 새털구름의 마룻장을 뜯어다가 여름내 마당에 평상을 깔고 눈알이 붉게 물들도록 실컷 꽃을 바라보았지요 나는 정말 좋아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가을이 찾아왔어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입을 딱, 벌리고 말이에요 가을도, 도대체 참을 수 없다는 거였어요 - 시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15) 수록 ◎시어 풀이 .. 2020. 7. 7.
모닥불 / 안도현 모닥불 - 안도현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어두운 청과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철야 농성한 여공들 가슴 속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난한 양말에 구멍 난 아이 앞에서 비탈진 역사의 텃밭 가에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에서 모여 있는 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얼음장이 강물 위에 눕는 섣달에 낮도 밤도 아닌 푸른 새벽에 동트기 십 분 전에 쌀밥에 더운 국 말아 먹기 전에 압록강 건너기 전에 배부른 그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쓸데없는 책들이 다 쌓인 다음에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언 땅바닥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훅훅 입김을 하늘에 불어 넣는 죽음도 그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키는 그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한 .. 2020. 7. 6.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수록 ◎시어 풀이 *쭈빗쭈빗 : 몹시 송구스럽게 망설이며 자꾸 머뭇머뭇하는 모양. *진눈깨비 : 비가 섞여 내리는 눈.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한 마디로 따뜻하다. 그리고 훈훈한 느낌을 준다. 이 시에서 화자인 ‘우리’는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삶의 어려움에 부닥친 이웃들을 따뜻하게 포용하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이 시는 우리가 ‘눈발’이 된다는 가정.. 2020. 7. 5.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시집 《그리운 여우》(199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화자는 겨울 강가를 바라보는 이로, 화자는 겨울 강물의 모습을 통해 약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음과 함께 희생적인 사랑의 가치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자연물인 ‘강’과 ‘눈’에 인격을 부여하는 의인법을 사용하여, ‘강’과 .. 2020. 7. 5.
간격(間隔) / 안도현 간격(間隔) - 안도현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2004) 수록 ◎시어 풀이 *간격 : 공간적으로 벌어진 사이. *울울창창 : 큰 나무들이 아주 빽빽하고 푸르게 우거져 있는 모양.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불에 타 버린 나무를 보면서 나무와 나무가 숲을 이루는 것은 나무와 나.. 2020. 7. 4.
<애기똥풀>과 <무식한 놈> / 안도현 과 / 안도현 안도현은 한국 서정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다. 안도현의 과 은 교과서에 수록될 만큼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 두 작품을 함께 묶어 살펴보는 이유는 이 두 작품이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유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주변의 사소한 자연물을 소재로 하여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자신의 태도를 점검하고 시인이 걸어가야 할 바른 자세를 일깨워 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A. 애기똥풀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 2020. 7. 3.
연탄 한 장 / 안도현 연탄 한 장 - 안도현 ​ 또 다른 말도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 생각하면 삶이란 산산히 으깨는* 일 ​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네, 나는 ​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2004) .. 2020. 7. 2.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일상적 소재인 연탄재를 통해 이타적 삶의 소중함과 가치를 깨닫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뜨거운 사랑을 베풀지 못한 삶에 대해 반성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비판적이며 교훈적인 작품이다. 제목인 ‘너에게 묻는다’는 무언가 잘못을 추궁하며 따지는 말투가 분명하다. 이 시에서 청자인 ‘너’는 시인 자신뿐 아니라 특정한 인물이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 모두를 말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우리 모두에게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그 내용이 궁금해진다. 총 3행에 두 문장에 불과한 짧은 시행은 첫 문장이 명령형으로, 둘째 문장은 의문형 어미.. 2020. 7. 2.
붉은 얼굴로 국수를 말다 / 신용묵 붉은 얼굴로 국수를 말다 - 신용목 물이 신고 가는 물의 신발과 물 위에 찍힌 물의 발자국, 물에 업힌 물과 물에 안긴 물 물의 바닥인 붉은 포장과 물의 바깥인 포장 아래서 국수를 만다 허기가 허연 김의 몸을 입고 피어오르는 사발 속에는 빗물의 흰머리인 국숫발, 젓가락마다 어떤 노동이 매달리는가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저편을 기다리는 궁동*의 버스 종점 비가 내린다, 목숨의 감옥에서 그리움이 긁어내리는 허공의 손톱자국! 비가 고인다, 궁동의 버스 종점 이국의 노동자들이 붉은 얼굴로 지구 이편을 말아먹는, 추억이 허연 면의 가닥으로 감겨 오르는 사발 속에는 마음의 흰머리인 빗발들, 젓가락마다 누구의 이름이 건져지는가 국수를 만다* 얼굴에 떠오르는 얼굴의 잔상*과 얼굴에 남은 얼굴의 그림자, 얼.. 2020. 7. 1.
대숲에 서서 / 신석정 대숲에 서서 - 신석정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벌레 소리 젖어 흐르고 벌레 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은 좋더라. 성글어 좋더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 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 기척 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거나 - 시집 《촛불》(1934) 수록 ◎시어 풀이 *한사코 : 기어코. 고집하여 몹시 심하게. *성근 : 성긴, 물건의 사이가 뜬. ‘성글다’의 관형어. *흥근히 : ‘흥건히’의 잘못, 물 따위가 푹 잠기거나 고일 정도로 많게. ▲이해와 감상 1931년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하는 등 서정시와 전원시를 주로 쓴 신석정 시인이 대나무 숲을 바라보며 대나무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의 시적 .. 2020. 6. 30.
꽃덤불 / 신석정 꽃덤불 - 신석정 태양을 의논(議論)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噴水)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 《신문학》(1946) 수록 ◎시어 풀이 *오롯한 : 모자.. 2020. 6. 30.
산문시(散文詩) 1 / 신동엽 산문시(散文詩) 1 -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 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 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2020. 6. 29.
봄의 소식 / 신동엽 봄의 소식 - 신동엽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하다커니 눈이 휘둥그래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이 난 악한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했다커니 봄은 장사지내 버렸다커니 그렇지만 눈이 휘동그래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 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 와서 몸단장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 《창작과 비평》(1970) 수록 ◎시어 풀이 *쑥덕거리다 : .. 2020. 6. 29.
봄은 / 신동엽 봄은 - 신동엽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서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 《한국일보》(1968) 게재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염원을 함축적인 언어로 노래한 시로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 ‘봄’은 통일을 의미하며, 화자는 남과 북이 군사적 대립을 끝내고 우리 민족의 분단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여 자주적 ·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룰 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2020. 6. 29.
추운 산 / 신대철 추운 산 - 신대철 춥다. 눈사람이 되려면 얼마나 걸어야 할까? 잡념과 머리카락이 희어지도록 걷고 밤의 끝에서 또 얼마를 걸어야 될까? 너무 넓은 밤, 사람들은 밤보다 더 넓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이름을 붙여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이름으로 말하고 이름으로 듣는 사람들 이름을 두세 개씩 갖고 이름에 매여 사는 사람들 깊은 산(山)에 가고 싶다. 사람들은 산(山)을 다 어디에 두고 다닐까? 혹은 산(山)을 깎아 대체 무엇을 메웠을까? 생각을 돌리자, 눈발이 날린다. 눈꽃, 은방울꽃, 안개꽃, 메밀꽃, 배꽃, 찔레꽃, 박꽃 나는 하루를 하루종일 돌았어도 분침 하나 약자의 침묵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들어가자, 추위 속으로. 때까치, 바람새, 까투리, 오소리, 너구리, 도토리, 다람쥐, .. 2020. 6. 28.
편지2 - 이중섭 화가께 / 신달자 편지2 - 이중섭 화가께 - 신달자 가슴에는 천도복숭아 엉덩이에는 사과가 익어 가는 내 아이는 지금 향내로 가득합니다. 곧 연둣빛 싹도 살며시 돋고 계집아이 수줍음도 돋아나겠지만 내 아이는 더 자라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뛰어노는 당신의 아이들 속에 벌거벗은 채로 봄을 가지고 화평을 가지고 영원을 가지고 놀게 하고 싶습니다. 찢어진 은지 속에서도 아름다운 세상 만들며 순연한 부드러움 맑은 영혼 영혼으로 …… - 시집 《새를 보면서》(1988) 수록 ◎시어 풀이 *화평 : 화목하고 평온함. *순연한 : 다른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아니하고 제대로 온전한.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시인이 이중섭 화가의 그린 ‘두 어린이와 복숭아’라는 그림을 보면서 얻은 영감을 편지 형식으로 쓴 작품으로, 어린아이의 동심과 같은 맑.. 2020. 6. 27.
노을 / 신달자 노을 - 신달자 지나치게 내성적이다 그저 얼굴이나 벌겋게 달아오를 뿐 깊은 뜻 내색*을 하는 일이 없다 새벽부터 하고픈 말 끝내 말머리도 꺼내지 못하고 어둠에 밀려 밀려 속절없이* 사라지고 그러나 아주 영 사라지지는 않고 다음날 또 다음날도 해만 지면 타는 속을 빛깔로나 풀어놓는 너는 나와 같은 혈액형인가 보다 언제라도 서로 수혈*할 수 있다 - 시집 《모순의 방》(1985) 수록 ◎시어 풀이 *내색 : 마음에 느낀 것을 얼굴에 드러냄. *속절없이 : 어찌할 도리가 없이. *수혈(輸血) : 중환자나 출혈이 심한 사람에게 그 혈액형과 같은 건강한 사람의 피를 혈관에 주입함.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소심한 내면의 소유자가 노을과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노을의 속성과 자아 성찰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화자인 ‘나’.. 2020. 6. 27.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신경림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신경림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아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 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한낮인데도 사방은 저녁 어스름처럼 어둡고 길목에는 고추잠자리 한 마리 없다. 바람에서도 화약 냄새가 난다. 종소리에서도 가스 냄새가 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꽃과 노래와 춤으로 덮었던 내 땅 햇빛과 이슬로 찬란하던 내 나라가 언제부터 죽음의 고장으로 바뀌었는가. 번쩍이며 흐르던 강물이 시커멓게 썩어 스스로 부.. 2020. 6. 26.
동해바다–후포에서 / 신경림 동해바다–후포에서 - 신경림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 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 시집 《길》(1991) 수록 ◎시어 풀이 *후포 : 지명, 울진 아래에 있는 포구 *맷방석 : 매통이나 맷돌 밑에 까는 짚으로 만든 둥근 방석. *동산 : 마을 부근에 있는 작은 산이나 언덕. ▲이해와 감상 시의 부제인 ‘후포’는 경상북도 울진군에 있는 작은 항구의 .. 2020. 6. 25.
장자를 빌려-원통에서 / 신경림 장자를 빌려-원통에서 - 신경림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 나갈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 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 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 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 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 2020. 6. 25.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2020. 6. 24.
구두 / 송찬호 구두 - 송찬호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 2020. 6. 22.
여승 / 송수권 여승(女僧) -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 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 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2020. 6. 21.
대숲 바람소리 / 송수권 대숲 바람소리 - 송수권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 징소리 꽹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 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 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 2020. 6. 21.
세한도(歲寒圖) / 송수권 세한도(歲寒圖) - 송수권 먹 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 하는 까치 한 쌍 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 먹 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고목나무 가지 끝 위에 까치집 하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 한 폭의 그림이 질화로같이 따숩다. - 시집 《꿈꾸는 섬》 (1982) 수록 ◎시어 풀이 *세한도 : 추사의 그림, ‘세한’은 설 전후의 추위라는 뜻으로,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를 이르는 말. *질화로 : 질흙으로 구워 만든 화로. *따숩다 : ‘따습다’의 전라도 방언. 날씨 또는 마음 등이 따뜻하다. ▲이해와 감상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통해 굳은 절개와 의지를 강조한 작품으로 여러 시인에 의해 시로 형상화되었.. 2020.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