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石榴)
- 안도현
마당가에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나서
나도 지구 위에다 나무 한 그루를 심었노라,
나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몰랐지요
그때부터 내 몸은 근지럽기* 시작했는데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석류나무도 제 몸을 마구 긁는 것이었어요
새잎을 피워 올리면서도 참지 못하고 몸을 긁는 통에
결국 주홍빛 진물*까지 흐르더군요
그래요, 석류꽃이 피어났던 거죠
나는 새털구름의 마룻장을 뜯어다가 여름내 마당에 평상을 깔고
눈알이 붉게 물들도록 실컷 꽃을 바라보았지요
나는 정말 좋아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가을이 찾아왔어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입을 딱, 벌리고 말이에요
가을도, 도대체 참을 수 없다는 거였어요
- 시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15) 수록
◎시어 풀이
*근지럽다 : 무엇이 살에 닿아 가볍게 스칠 때처럼 가려운 느낌이 있다.
*진물 : 부스럼이나 상처 따위에서 흐르는 물.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석류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인간의 성장 과정에 빗대어 노래한 작품으로,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겪은 후에 성숙한 자아로 완성된 것에 대하여 만족해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석류나무와 화자를 동일시하여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시각적 이미지와 촉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석류나무의 성장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나한테 보라는 듯이’와 '좋아서'라는 표현의 반복을 통해 화자가 체험한 ‘놀람’과 ‘기쁨’의 정서를 전달하고 있다.
화자는 마당 가에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 나도 ‘지구 위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노라’며, 좋아서 입을 다물 줄을 모른다. 여기서 ‘지구 위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노라’라는 표현은 철학자 스피노자의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노라”라는 명언을 페러디한 것이다. 화자는 한 그루 석류나무를 심어 놓고 당장은 석류 열매를 볼 수는 없지만, 먼 훗날 열매가 맺히리라는 희망으로 마음 속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 몸은 근지럽기 시작했는데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석류나무도 제 몸을 마구 긁는 것이었어요’라고 하여, 화자는 석류나무와 ‘나’를 동일시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성장통(成長痛)이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서 석류나무가 꽃을 피우기 위해 제 몸을 긁고 주홍빛 진물까지 흘리는 고통은 인간이 시련의 과정이나 정신적 갈등의 과정을 겪으며 성숙해 가는 과정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화자는 ‘여름내 마당에 평상을 깔고/ 눈알이 붉게 물들도록 실컷 꽃을 바라보’며, ‘정말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러다가 화자는 가을이 되어 석류 열매가 ‘나한테 보라는 듯이 입을 딱, 벌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을 발견하고, ‘가을도, 도대체 참을 수 없다는 거였어요’라고, ‘자연과 ’나‘가 하나가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한 그루의 석류나무를 심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통해 시련과 고통을 겪고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자아의 내면의 성숙을 비유적으로 그려 화자와 자연이 함께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기쁨을 석류 열매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작자 안도현(安度眩, 1961~ )
시인.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낙동강>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보편성을 지닌 쉬운 시어로 본원성을 환기하는 맑은 서정을 담아내며 개인적 체험을 주조로 하면서도 사적 차원을 넘어서 민족과 사회의 현실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그려내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시집으로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모닥불》(1989), 《그리운 여우》(1998), 《바닷가 우체국》(1999),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2004),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15) 등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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