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빌려-원통에서
- 신경림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 나갈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 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 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 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 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시집 《길》(1991) 수록
*노령노래 : 살길을 찾아 러시아로 가는 유랑인의 심정을 담은 함경도 민요.
이 작품은 산 정상에서 세상을 바라본 관점과 산 아래에서 세상을 직접 경험하여 얻은 관점을 대조시키면서 삶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모색하고 있는 시이다. 제목의 ‘장자를 빌려’라는 중국 고대 도가(道家)의 사상을 적은 《장자(莊子)》의 <추수편>에 ‘대지관어원근(大知觀於遠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큰 지혜는 멀리서도 볼 줄 알고, 가까이서도 볼 줄 아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거시적 관점에서도 대상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미시적 관점에서도 대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이 말을 빌려 산 정상과 산 아래에서 바라본 세상살이가 다르다는 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반성하고 있다.
사물을 의인화하여 표현하는 이 시는 공간의 이동에 따라 시상이 전환하는데, 설악산 대청봉 정상에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과 산 아래에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을 대조하여 표현하면서, 대상을 나열하여 시상을 구체적으로 전개한다. 그리고 화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관점에 대한 성찰을 통해 독자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시하기 위하여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직접 드러나지는 않으나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세상과 인간 삶의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은 자만심에 사로잡힌다. ‘발아래 엎드린 작고 큰 산’, ‘언덕 골짜기에 달라붙은 마을들’, ‘무릎께까지 다가오고 싶어 안달하는 바다’ 등 세상과 세상살이를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산 아래로 내려와 보니 세상과 세상살이는 사뭇 다른 것을 깨닫는다. 시장바닥에서 늙은 아주머니들과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뒷골목의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마늘 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 부부의 사랑싸움 소리에 잠을 설치는 등 복잡하고 고단한 삶을 직접 겪으면서,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라고, 자신이 가졌던 생각이 경솔했음을 깨닫는다.
이어 화자는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며 물음의 형식을 반복하여 독자에게 판단을 맡겨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느 한쪽에 치우친 관점은 좋지 않으며, 두 관점이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아야 삶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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