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신경림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아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 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한낮인데도 사방은 저녁 어스름처럼 어둡고
길목에는 고추잠자리 한 마리 없다.
바람에서도 화약 냄새가 난다.
종소리에서도 가스 냄새가 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꽃과 노래와 춤으로 덮었던 내 땅
햇빛과 이슬로 찬란하던 내 나라가
언제부터 죽음의 고장으로 바뀌었는가.
번쩍이며 흐르던 강물이 시커멓게 썩어
스스로 부끄러워 몸을 비틀고
입술을 대면 꿈틀대며 일어서던 흙이
몸 가득 안은 죽음과 병을 숨기느라
웅크리고 도사리고 쩔쩔매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죽음의 안개가 이 나라의
산과 들을 덮게 되었는가.
쓰레기와 오물로 이 땅이 가득 차게 되었는가.
우리는 너무 허둥대지 않았는가.
잘살아보겠다고 너무 서두르지 않았는가.
이웃과 형제를 속이고 짓밟고라도
잘살아보겠다고 너무 발버둥치지 않았는가.
그래서 먼 나라 남이 버린 것까지 들여다가
목숨을 빼앗는 것이라 해서 이미 버릴 데가 없어
쩔쩔매던 것까지 몰래 들여다가
이웃의 돈을 울궈내려 하지는 않았는가.
나라는 장사꾼과 한통속이 되어
이 나라를 쓰레기장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이 나라를 온갖 찌꺼지
모으는 곳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이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뿌옇게 지구를 감고 있는
연기와 먼지는 드디어
온통 이 세상을 겨울도 봄도 여름도 없는
삶도 죽음도 아닌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연옥*도 지옥도 아닌 버려진 땅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돈에 눈이 멀어 허둥댄 것이 우리만이 아니란 것을.
그러나 그것도 이미 좋았던 시절의 얘기다.
지금 지구는 언제 폭발해 저 자신을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으로 가득 차 있다.
핵은 우리들 모두의 머리 위에서,
우리들의 발밑에서, 우리들의 등 뒤에서,
죽음의 입김을 서서히 내뿜으면서
그 음험한* 눈으로 우리를 노리고 있다.
보라, 삼천리 그 가운데서도 남쪽 반
이 좁은 땅덩어리 속에서만도 많은 핵 발전소가
돈이 덜 든다는 구실 아래
곳곳에 도사려 우리를 집어삼킬
채비를 서두르고 있지 않은가.
또 저 북녘 굶주린 땅에서도
전쟁을 막는다는 핑계로 쌓인 핵들이
단숨에 백두에서 한라까지 죽음의 재로 덮을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은가.
어리석은 불장난에 쓰여지고 있지 않는가.
이제 이 땅은 썩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 출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수록
◎시어 풀이
*산(酸) : 물에 용해되면 수소 이온을 내어 산성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
*연옥(煉獄) : 죽은 사람의 영혼이 바로 천국에 들지 못할 때, 불에 의한 고통으로 죄를 씻어 낸다고 하는 곳(천국과 지옥의 사이).
*음험한 : 겉으로는 부드럽고 솔직한 체하지만 속은 내숭스럽고 음흉한.
*벼랑 : 낭떠러지의 험하고 가파른 언덕.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환경 파괴와 오염에 이어 핵에 의해 그 존재까지 위협당하는 지구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화자는 환경이 오염된 현실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제시하여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아울러 지구의 위협이 되는 또 다른 대상인 핵으로 인한 위험성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는’ 지구 멸망의 심각성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위기에 처한 지구를 의인화하여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 시는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 주제를 강조하고, 과거와 현재를 대조하여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으며, ‘~ 는가’라는 종결어미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운율을 형성하면서 문제가 매우 심각한 부정적 상황임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면서 ‘핵’의 위험성에 대해 독자에게 경고하고 있다.
화자는 1연에서 환경 오염으로 생기를 잃고 황폐해진 자연을 보여준다. 화자는 먼저 환경 오염으로 생기를 잃은 자연의 모습을 열거한 뒤, 기형 물고기, 위험해진 먹을 거리, 매연으로 인한 폐해, 생명체가 사라진 환경, 대기 오염 등을 심각성을 드러낸다.
이어 2연에서는 환경 오염으로 ‘꽃과 노래와 춤으로 덮였던 내 땅/ 햇빛과 이슬로 찬란하던 내 나라가 ‘죽음의 고장’으로 바뀐 현실을 대조하며 개탄하고 있다.
또, 3연에서는 ‘강물’과 ‘흙’을 의인화하여 강물은 썩고, 흙은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여 ‘죽음과 병’이 들었음을 지적한 뒤, 4연에서는 환경 오염을 일으킨 원인(행태)에 대하여 반성하고 성찰한다. 무리한 경제 성장 치중,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물질 만능주의와 성장 우선 정책, 산업 쓰레기 수입, 산업 쓰레기 양산과 정경 유착 등 환경 오염에 일조한 것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5~6연은 이러한 환경 오염의 폐해가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 얼음 벌판’에서는 산성 눈이 내리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가’에서는 돌연변이 물고기가 잡히고, ‘미시시피 강가 마을’에는 기형아가 태어나고, 천국이 따로 없다는 ‘남태평양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등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어서, ‘온통 이 세상을 겨울도 봄도 겨울도 없는/ 삶도 죽음도 아닌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연옥도 지옥도 아닌 버려진 땅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돈에 눈이 멀어 허둥댄 것이 우리만이 아니란 것을’ 이라고 표현하여, 지구 전체가 산업화의 결과로 생태계가 파괴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7~8연에 와서 화자는, 심각한 환경 오염의 상황을 ‘좋았던 시절의 얘기’로 치부하면서, 인류에게 닥친 새로운 위기인 ‘핵’을 언급하면서, 지금 지구는 ‘언제 폭발해 저 자신을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으로 가득차’ 있음을 지적한다. 한반도만 하더라도 남쪽은 경제성을 따져 핵발전소를 통해 핵을 운용하고 있으며, 북쪽은 전쟁을 막는다는 핑계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등 ‘핵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경고한다. 이어 화자는 ‘이제 이 땅은 썩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고 지구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을 경고하며, 핵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환경 오염이 서서히 우리의 목숨을 조여 오는 것이라면, ‘핵’은 한순간에 우리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닌 것이다. 화자는 지금 인류의 생존이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말함으로써, ‘핵’으로 인한 지구의 멸망을 경고하고 있다.
제목을 고려할 때, 이 시는 환경 오염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지구 멸망의 위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의 의미는 땅이 썩어가고 있는 것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실이며, 그보다 더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즉, 환경 오염보다 더 위협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핵 개발이다.
▲작자 신경림(申庚林, 1936 ~ )
시인. 충북 충주 출생. 1955년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낮달>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1973년에 펴낸 첫 시집 〈농무(農舞)〉는 우리 민중의 한, 울분, 고뇌 등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린 농촌 현실을 기초로 하여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는 시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으로 《농무》(1973), 《새재》(1979), 《달넘세》(1985), 《남한강》(1987), 《우리들의 북》(1988), 《길》(1990),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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