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石榴)
- 정지용
장미꽃처럼 곱게 피어 가는 화로에 숫불,
입춘 때 밤은 마른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겨울 지난 석류 열매를 쪼개어
홍보석(紅寶石)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여릿여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 해 시월 상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작은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졸음 조는 옥토끼가 한 쌍.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 고기의 손가락, 손가락,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실, 은실
아아 석류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신라 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 《정지용시집》(1935) 수록
◎시어 풀이
*새론 : 사이로는.
*여릿여릿한 : 부드럽고 약한.
*시월 상달 : ‘시월’의 예스러운 말(햇곡식을 신에게 드리기에 가장 좋은 달이라는 뜻).
*알알이 : 알마다. 한 알 한 알마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겨울밤 화롯가에서 지난가을에 익었던 석류 열매를 쪼개어 알맹이를 맛보면서 떠오른 대상에 대한 애틋한 정감을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석류알을 먹으며 떠오른 대상에 대해 애틋함을 드러내며 대상과 행복한 사랑을 오래가기를 소망하고 있다.
7연으로 된 이 시는 각 연을 2행씩 배열하여 시각적으로 통일감을 주고, 시각·청각·미각 등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선명한 인상을 주고, 석류를 사랑과 결부하여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참신성을 드러내고 있다.
1연은 이 시의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제시되어 있다. 화자는 ‘입춘 때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화로에 숯불이 피어 있는 방안에 앉아 있다. ‘화로에 숯불’이라는 시각적 이미지에 ‘마른 풀 사르는 냄새’라는 후각적 이미지를 더하여 방 안의 분위기를 드러내고 추억을 환기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2연에서 화자는 화롯가에 앉아 한겨울 지난 석류 열매를 쪼개에 ‘홍보석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을 본다. ‘석류 열매’는 옛날 일을 떠올리게 해주는 매개체로서 석류알을 맛보는 행위는 지난 시월에 사랑을 한 대상을 떠올리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화자는 석류알을 먹으면서 ‘지난해 시월 상달’부터 시작된 옛 생각에 빠져 있다.
3연에서 화자는 선명하게 떠오르는 추억 ‘투명한 옛 생각’에 잠긴다. 여기서 화자는 석류알을 사랑과 결부시켜 석류알의 이미지를 ‘시름의 무지개’로 사랑하는 대상과의 사랑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며, 석류알의 맛을 ‘금붕어처럼 어린 여릿여릿한 느낌’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희미하게 떠오르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정감을 미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새론’은 ‘새로운’의 줄임말로 볼 수도 있으나 떠오르는 추억의 ‘사이로는’으로 보는 것이 시상의 전개에 더 어울릴 듯.
4~5연에 오면, 옛 추억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즉, 석류는 지난 해 시월 상달에 둘 사이에 사랑이 시작될 때 익기 시작한 것이며, 석류알을 ‘작은 아씨’와 ‘가녀린 동무’에 비유하여 화자와 조그만 이야기를 만든 애틋함을 주는 대상임을 드러내고 있는데, 여기서 ‘작은 아씨’와 ‘가녀린 동무’는 석류알이면서 동시에 어떤 인물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석류알은 ‘작은 아씨’의 가슴속에 남 몰래 깃들인 ‘옥토끼 한 쌍’이라며, 화자는 옛 추억을 떠올린다.
6연에서 화자는 옛 추억을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석류알을 꺼낸다.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 고기의 손가락, 손가락’은 석류알을 꺼내는 화자의 손가락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실, 은실’은 석류알의 속껍질이면서 외로움에 가볍게 흔들리는 화자의 손가락을 은실로 비유한 것이다. 시각적 이미지가 돋보인다.
마지막 7연에 와서 화자는 ‘아아 석류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신라 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꾼다. 여기서 ‘아아’는 화자의 감정이 고조된 것이며, ‘신라 천년의 푸른 하늘’은 석류를 맛보는 과정에서 떠올린 옛 사랑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공간으로 화자는 신라 천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행복한 사랑을 소망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입춘날 밤에 석류를 먹으면서 어려움을 겪으며 지낸 작은 아씨와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작자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시인. 충북 옥천 출생. 아명(兒名)은 지룡(池龍).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휘문고보 재학 시절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발간.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 재학시에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하고, 그해에 ≪신민≫, ≪어린이≫, ≪문예시대≫ 등에 <다알리아(Dahlia)>, <홍춘(紅椿)>, <산에서 온 새> 등의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30년에는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등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 발간. 1933년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9인회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김기림. 박영희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시집으로는 34세 때인 1935년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출간한 뒤. ≪백록담≫(1941), ≪지용시선≫(1946)을 발간했다. 산문집으로 ≪문학독본≫(1948)과 ≪산문(散文)≫(1949)이 있다. 사후 1988년 ≪정지용 전집≫이 시와 산문으로 나뉘어 2권으로 발간되었다. 그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향토적 정서를 형상화한 순수 서정시의 가능성을 개척하였다. 특히 그는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다듬은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여 다른 시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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