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 – 7월
- 정일근
내 유년의 7월에는 냇가 잘 자란 미루나무 한 그루 솟아오르고 또 그 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내려와 어린 눈동자 속 터져나갈 듯 가득 차고 찬물들은 반짝이는 햇살 수면에 담아 쉼 없이 흘러갔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착한 노래들도 물고기들과 함께 큰 강으로 헤엄쳐 가버리면 과수원을 지나온 달콤한 바람은 미루나무 손들을 흔들어 차르르 차르르 내 겨드랑에도 간지러운 새잎이 돋고 물 아래까지 헤엄쳐가 누워 바라보는 하늘 위로 삐뚤삐뚤 헤엄쳐 달아나던 미루나무 한 그루. 달아나지 마 달아나지 마 미루나무야, 귀에 들어간 물을 뽑으려 햇살에 데워진 둥근 돌을 골라 귀를 가져다 대면 허기보다 먼저 온몸으로 퍼져오던 따뜻한 오수, 점점 무거워져 오는 눈꺼풀 위로 멀리 누나가 다니는 분교의 풍금 소리 쌓이고 미루나무 그늘 아래에서 7월은 더위를 잊은 채 깜박 잠이 들었다.
- 시집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자연 속에서 뛰어놀다 잠이 든 유년 시절의 7월을 마치 ‘흑백 사진’의 한 장면으로 회상하며 평화롭고 아름다운 추억을 표현하고 있는 서정적인 산문시이다. 화자인 ‘나’는 평화로운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며 행복감에 젖어 있다.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 이 시는 다양한 감각적 인 표현을 사용하여 정경과 분위기를 드러내고, ‘흘러흘러’, ‘차르르 차르르’, ‘삐뚤삐뚤’ 등의 반복되는 음성 상징어를 사용하여 운율감을 살려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 대상을 인격화하여 친근감을 드러내고 있다.
'흑백사진'이라는 제목은 시 전체의 시각적 감각과 더불어 어린 시절의 향수라는 감각이 주는 시대적인 특징을 강조한 것이다. 또 이 시의 첫 부분 ‘내 유년의 7월에는’이라는 시구는 이 시가 어린 시절의 회고담을 주로 다루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데, 화자는 이어서 ‘유년의 7월’을 마치 ‘흑백사진’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경과 분위기를 차례로 보여준다. 미루나무 한 그루 솟아오른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내려오고, 반짝이는 햇살을 수면에 담은 찬물들이 쉼 없이 흘러가고, 과수원을 지나온 달콤한 바람이 미루나무 손을 흔들고, 풍금 소리를 들으며 미루나무 그늘 아래 잠이 드는 정경들이 떠오른다. 화자는 이들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경들을 드러내면서 ‘7월은 더위를 잊은 채 깜빡 잠이 들었다’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첫행의 ‘7월’을 반복한 것으로, 자신이 잠든 것을 7월이 잠든 것으로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으로 자연과 하나가 된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와 더불어 유년기의 여름 풍경에서 평화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물속에서 헤엄을 치다 관찰한 미루나무의 정경을 ‘달아나지 마 달아나지 마 미루나무야’라고 묘사함으로써 마치 대화하는 듯한 감각을 살리고 있는데 어린아이다운 친근한 표현이 인상적이다. 또 '착한 노래들도 물고기들과 함께 큰 강으로 헤엄쳐 가버리면'이라는 시구에서는 노래를 의인화하여 청각을 시각적으로 전이시킨 표현이 돋보이며, '과수원을 지나온 달콤한 바람'은 촉각의 미각화, '점점 무거워져 오는 눈꺼풀 위로 멀리 누나가 다니는 분교의 풍금소리 쌓이고'에서는 청각의 시각화를 사용하는 등 전체적으로 공감각적인 심상이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화자가 유년 시절에 경험한 일을 다양한 감각적 심상과 비유적 표현으로 그려 낸 것으로, 행과 연의 구분이 없는 산문시이지만, 동요 <흰구름>(박목월 작시) 노랫말의 삽입, 음성 상징어의 활용 등을 통해 내재적인 운율미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유년 화자의 눈에 비친 여름날의 냇가 풍경, 그 속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천진난만함, 자연물(미루나무)에 동화되는 화자의 마음 상태, 물놀이에 지친 아이의 혼잣말 '달아나지 마 달아나지 마', 오수에 빠져드는 과정 등이 어우러지면서, 동심 어린 세계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작품이다.
▲정일근(1958 ~ )
시인. 경남 진해 출생. 1984년 《실천문학》에 <야학일기> 등 7편의 시를 발표하고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라는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힘》 동인. 아름다운 서정을 동요적으로 노래한 시를 즐겨 썼다.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1987),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1991),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1994), 《처용의 도시》 (1995), 《경주 남산》 (1998),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2001),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2003), 《오른손잡이의 슬픔》 (2005),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2006),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2009), 《방!》 (2013), 《소금 성자》 (2015)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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