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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밥이 쓰다 / 정끝별

by 혜강(惠江) 2020. 8. 30.

 

 

 

 

밥이 쓰다

 

 

- 정끝별

 

 

   파나마 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 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 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 메인 밥을 쓴다

 

     - 시집 《삼천갑자복사빛》(2005) 수록

 

 

◎시어 풀이

 

*별루무 짓 : ‘별놈의 짓’의 방언(경남, 전남). 여러 가지 이상한 짓.

*떼꿍한 : ‘떼꾼한’의 방언. 지쳐서 쑥 들어가고 매우 생기가 없는.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쓰다’라는 언어유희를 통해 일상적 삶에서 느끼는 고통과 외로움을 드러내면서도, 세상을 너무 힘들게 살지 말자는 자기 다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자기 다짐은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에 잘 잘 드러나는데, 이는 ‘세상을 너무 힘들게 살지 말자’는 자신의 삶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면서 타인에 대한 조언을 드러내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처와 고통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쓰다’라는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를 활용하여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1~6행에서는 ‘독감’과 ‘변해가는 애인’, 그리고 ‘빚 걱정’에 ‘밥이 쓰다’라고 한다. 여기서 ‘밥이 쓰다’라는 것은 밥맛 자체가 없어 소태나 쓸개의 맛과 같거나 마음이 언짢거나 괴롭거나 걱정이 되어 밥이 쓰다는 것이다.

 

  7~8행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의 ‘쓰다’라는 뜻이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쓰다’라는 혀로 느끼는 맛 외에도 동음이의어로서 그 의미가 다양하다. ‘어떤 일이나 목적을 위하여 들이거나 소모하다’라는 뜻과 ‘머릿속의 생각을 종이 혹은 이와 유사한 대상 따위에 글로 나타낸다’라는 뜻, 그리고 ‘모자 따위를 머리에 얹어 덮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거나 내다’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쓰다’라는 뜻을 실제로 사용하여 드러내 보인다.

 

  9~14행에서는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외로움이 밥이 쓰다고 한다. 즉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간 선배, 결혼도 잊고 글만 쓰다가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는 모두 화자에게는 안타까운 존재들이다. 이들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달가울 리 없다. 그리고 혼밥을 먹거나,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고 생각하고 ‘꼭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며 외로움을 드러낸다.

 

  그리고 15~17행에서는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라고 한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는 세상을 너무 힘들게 살지 말자는 자기 다짐이며, ‘떼꿍한 눈’은 ‘힘들게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며, ’목메인 밥을 쓴다‘는 것은 한 그릇 밥이 되어 줄 글을 쓰겠다는 것이다. 이 다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다짐인 동시에 나아가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며 지친 이의 마음에 숟가락을 쥐여 준다.

 

 

▲작자 정끝별(1964~ )

 

  시인, 국문학자. 전남 나주 출생. 1988년 《문학사상》에 <칼레의 바다>로 등단했다. 1989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평론 <서늘한 패로 디스크의 절망과 모색>이 당선되었다. 생명의 본성을 깊이 통찰하는 시를 많이 썼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1996), 《흰책》(2000), 《행복》(2001), 《삼천갑자복사빛》(2006), 《와락》(2008),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2019) 등이 있다. 평론집으로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륙의 노래》, 《하늘 연못》이 있다.

 

 

 

►작성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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