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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어머니의 그륵 / 정일근

by 혜강(惠江) 2020. 9. 1.

 

 

 

어머니의 그륵

 

 

- 정일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 《현대시학》(200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그륵’이라는 말을 통해 사랑과 정성이 담긴 시를 쓰지 못하는 화자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의 정서와 반성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그륵’을 통해 얻은 깨달음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서 어머니와 달리 삶이 담기지 않은 시를 쓰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데, 이는 진정한 삶이 담긴 시를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기반성이라 할 수 있다.

 

  일상생활의 소재를 바탕으로 성찰적 삶의 자세를 드러내고 ‘그륵’과 ‘그릇’의 대비적 시어를 사용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대구적 표현을 사용하여 대상이 지닌 의미를 강조하고, 독백적 어조로 화자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있다.

 

  이 시는 연구분이 없는 시이지만, 내용상으로 볼 때 네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1~3행에서 어머니는 표준어인 ‘그릇’을 ‘그륵’이라고 부른다. ‘그륵’은 경상도 사투리로서 어머니의 삶 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4~8행에서 화자는 ‘그륵’이라는 말에는 편안함과 따뜻함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9~16행에서 어머니는 사랑과 정성을 통해 ‘그륵’을 만들었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그릇’이라는 말을 찾아 사용했음을 드러낸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라고 대구법을 사용하여 서로 다른 점을 드러낸다. 즉 ‘그릇’이 학습을 통해 배운 것이라면 ‘그륵’은 인생(삶)을 통해 터득한 것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름을 드러낸다. 그래서 ‘내가 담은 한 그릇의 물고/ 어머니가 담은 한 그릇의 물은 다르다.’는 것이다. 즉 ‘그릇에 담은 물’은 사랑과 정성이 없는 물이지만 ‘그륵에 담긴 물’에는 사랑과 정성이 있는 물이라는 것이 다르다. 여기서 화자는 어머니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함을 진적부터 아셨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마지막 17~20행에서는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 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시인이라면 생명력이 있는 언어로 시를 써야 하는데, 사랑과 정성이 없는 언어로 시를 쓰는 자신에 대한 성찰로서, ‘부끄러워진다’라고 시어를 통하여 자신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출하여 시인으로서의 자기 반성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표준어 '그릇'과 사투리 '그륵'의 비교를 통해 삶의 경건성과 시인의 자세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륵'과 '그릇'은 단순히 표준어와 사투리의 차이가 아니라, 각각 삶과 사랑이 담긴 언어와 그렇지 않은 죽은 언어를 뜻한다. 어머니의 언어인 '그륵'과 같이 삶이 녹아 있고, 따뜻한 사랑이 담긴 언어로 시를 쓰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이 표현된 작품이다.

 

  시인 정일근은 시 속에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쓸 자격이 있어 보인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그는 시인들에게 ‘사투리 시어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시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륵’이라는 경상도 사투리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아들들을 포근하게 감싸는 것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삶의 깊이보다 더 깊은 ‘어머니의 그륵’의 깊이를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그륵’이라는 경상도 사투리를 어머니의 개인어로 재인식하여 모정(母情)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정서를 넉넉하게 담아내는 시재(詩才)가 놀랍다.

 

▲정일근(鄭一根, 1958년~ )

 

  시인. 경남 진해 출생. 1984년 《실천문학》에 <야학일기> 등 7편의 시를 발표하고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라는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힘》 동인. 아름다운 서정을 동요적으로 노래한 시를 즐겨 썼다.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1987),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1991),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1994), 《처용의 도시》 (1995), 《경주 남산》 (1998),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2001),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2003), 《오른손잡이의 슬픔》 (2005),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2006),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2009), 《방!》 (2013), 《소금 성자》 (2015)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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