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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상록수'의 산실 필경사와 심훈기념관

by 혜강(惠江) 2020. 9. 16.

당진 여행

 

'상록수'의 산실 필경사와 심훈기념관

 

 

글·사진 남상학

 

 

 


 

 

  우리나라 농촌소설의 거장 심훈(沈熏,1901~1936)의 문학적 산실인 필경사(筆耕舍)와 심훈기념관을 찾아가는 길은 가을 햇살을 받아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을 끼고 달리는 길이어서 풍요가 넘치고 평화스러웠다. 서해안고속도로 하행선을 타고 서해대교를 지나자마자 우측 나들목으로 빠진 차는 당진군 송학면으로 접어든다. 필경사 주변의 가옥들은 모두 개량 주택으로 바뀌고 논밭은 알곡이 익어가는 정경이 풍요로 넘친다.

 

 한참을 달려 한진포구 입구에서 '필경사'라는 표지판을 따라 왼쪽으로 들어가면 상록초교와 종탑이 높은 상록수교회가 보이고, 좁은 길을 따라 좀 더 진행하면 길 왼쪽으로 필경사가 나온다. 왼쪽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초가집이 심훈이 직접 설계하고 집필한 필경사이며,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상록수문화관이다. 그리고 우측으로 지은 새 건물이 심훈기념관이다.

 

 

 

 

 

   넓은 앞마당에는 넓게 확장되었다. 왼쪽으로 상록수를 상징하는 두꺼운 철제 모형이 세워져 있다. 가까이 다가서니 상록수 모형을 받치고 선 무쇠 기둥에 “그날, 쇠가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오라”는 글씨가 보인다. 조국의 광복을 염원한 그의 마음을 새겨 넣은 것이리라. 그리고 조금 거리를 두고 필경사를 바라보는 각도로 철제 의자를 설치했다. 이것은 아마도 빨부리에 담배를 피워 물고 사색하면서 작품을 구상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먼저 필경사를 보기로 했다.

 

 

 

 

 

심훈 문학의 산실, 필경사

 

 

  필경사는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길 97(부곡리 251-12)에 있다. 1997년 12월 충청남도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소설가이자 영화인 심훈의 문학 산실이었던 집으로 대지 661㎡에 건평 62㎡(18.7평)인 아담한 팔작지붕의 목조집이다. 당진시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심훈은 1932년, 시집 《그날이 오면》이 일제의 검열로 출간되지 못하자 낙담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아버지의 농토가 있는 당진 송악면 부곡리로 낙향하여 1934년 독립하여 살고자 이 집을 직접 설계하여 짓고 ‘필경사(筆耕舍)’라는 이름을 붙였다. ‘필경사(筆耕舍)’라는 옥호는 “붓으로 밭을 일군다”라는 뜻으로, 그의 <필경(筆耕)>이란 시의 제목에서 딴 것이다.

 

  필경사는 낮은 자연석 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측면 중앙 기둥을 중심으로 앞뒤로 나누어 공간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의 비교적 큰 규모로 지어졌다. 집은 수령이 꽤 지난 측백나무를 양쪽으로 앞세우고 뒤로는 울창한 대나무 숲에 싸여있다. 동남향으로 자리 잡은 이 집은 앞으로 넓은 들이 펼쳐지고 북동쪽으로 서해가 바라다보인다.

 

  한때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 옹이 다시 사들여 관리하다가 당진시에 희사하였다. 심훈은 이 집에서 1935년 우리나라 농촌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상록수>를 집필했다. 그 외에도 <영원의 미소>, <직녀성> 등도 여기에서 집필되었다. 현재 방에는 그가 사용했을 법한 낡은 책상과 석유 등잔, 낡은 서적과 방석들이 놓여 있고, 벽에는 고서화가 걸려 있다. 그의 체취가 묻어나는 느낌이다.

 

 

 

 

 

 

  필경사 옆에는 심훈의 묘가 있다. 이 묘는 경기 안성시에 있던 것을 2007년 말 이곳 필경사로 이장한 것이다. 독립을 염원하며 작품을 구상하던 자신의 집 바로 옆 햇빛 따사로운 양지에 자리를 잡았다.

 

 

 

 

 

상록수문화관

 

 

 필경사와 묘지를 둘러보고 상록수문화관 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조각 작품 하나가 반긴다. 나무 한 그루와 함께 얼굴이 조각된 조형물은 심훈 선생의 부조탑이다.

 

 

 

 

  그리고 상록수문화관 앞에는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 전문을 새긴 시비(詩碑)가 서 있다. 이 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1930년 3월 1일에 조국 광복을 갈망하며 쓴 작품이다. ‘그날(광복의 날)’이 오기만 하면 목숨은 초개같이 내버려도 좋다는 것이 이 작품의 동기가 되어 있다. 일제 36년간의 저항시(抵抗詩) 가운데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영국의 비평가인 C. M 바우러(Bowra)는 그의 『시와 정치』에서 이 시를 세계 저항시의 본보기로 들었다. “일본의 한국 통치는 가혹했으나, 민족의 시는 죽이지 못했다.” 지적했다.

 

  이 시는 본래 2연 16행인데 둘째 연을 첫째 연에 붙여 놔서 한 연의 시처럼 되었고, 2연 첫 행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를 ‘오오’ 두 글자를 빼고 ‘그날이 와서 그날이 와서’로 새겨 놓아 시적 의미를 반감시켜 무척 아쉽다. 단순한 실수라고 그냥 넘기기보다는 새로 제작하는 것이 어떨까?

 

  상록수문화관은 심훈기념관을 개관하기 전까지 전시관으로서 심훈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 역할을 심훈기념관에 넘겨주고 지금은 주로 관리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다.

 

 

 

 

 

심훈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심훈기념관

 

 

 

 

  필경사에서 10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심훈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기존의 작품 전시관으로 사용하던 상록수문화관이 전시 공간이 부족하여 그 옆에 건물을 새로 짓고 2014년 9월에 개관, '심훈기념관'이라 명명했다. 건축면적 703㎡ 규모로 전시실과 문예 창작실, 수장고 등을 갖췄다.

 

  전시실에는 심훈의 3남 심재호 외 그 밖의 후손과 여러 관계자가 기증, 위탁한 유물들이 '민족의식의 태동', '저항의 불꽃', '희망의 빛', '그날이 오면…'이라는 주제로 기승전결 형식으로 전시되어 있다. 시계 방향 반대로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상록수 & 계몽 운동의 씨앗'의 상징들로 구성되어 있다.

 

  '심훈의 시 쓰기 체험'과 '심훈의 시 낭송 체험'장도 마련되어 있다. 당진시 문화 관광 해설사가 상시 배치되어 심훈 선생의 저항 정신과 계몽 정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설을 하고 있다.

 

  ‘민족의식의 태동’ 코너에는 심훈 선생의 탄생과 성장(1901-1918), ‘저항의 불꽃’ 코너에는 3·1운동의 참여와 수감, 좌절과 극복기(1919-1923), ‘희망의 불꽃’ 코너에는 대중매체를 통한 문화·영화 활동과 희망의 빛(1924-1932), ’그날이 오면‘ 코너에는 작품세계의 결정체 항일 저항문학의 최고 금자탑을, 그리고 ‘상록수 & 계몽운동’ 코너에서는 1932년(당시 32세) 부모가 살고 계신 이곳 당진에 정착하여 필경사를 짓고 농촌 계몽소설인 <상록수>를 집필하며, 농촌의 자활을 통해 이 땅에서 희망을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의 문학 인생은 먼저 약력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불과 36년의 세월을 살다간 그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본명 대섭(大燮). 1901.9.12 서울에서 출생. 경성제일고보 재학할 때 3·1운동에 참가하여 4개월간 복역, 출옥 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위안장 대학(元江大學)에서 수학하였다. 1923년부터 동아일보·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계에 투신, 이듬해에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하였다. 1930년에는 <동방의 애인>, 1931년에는 <불사조(不死鳥)>를 각각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1933년에는 <영원의 미소>, 1934년에는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다. 1935년에는 농촌계몽소설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소설에 당선되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는 《상록수》 간행을 위해 상경하여 원고를 교열하다 장티푸스에 걸려 1936년 9월 16일 짧은 생애로 타계했다.」

 

 

 

 

 

 그는 1936년 9월 16일 타계하기 전, 1936년 8월 10일,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남승룡 선수가 좋은 성적으로 입상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즉흥시를 썼는데 이것이 심훈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그의 약력을 통해서 우리는 짧고도 굵은 그의 의미 있는 삶을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 3·1운동의 참가와 복역

 

 

  그 첫째는 경성제일고보 재학할 때 3·1운동에 참가하여 4개월간 복역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감옥에서 나라 걱정과 어머니를 그리는 애절한 내용의 편지를 옥중에서 비밀리에 부친 적이 있다. 그 편지가 <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이다. 그는 '어머니께 드리는 글월'에서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중략) 저는 어머님보다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라고 적었다. ‘어머님보다 더 크신 어머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 심훈은 짧은 생을 민족을 위해 살아온 투사였다. 그의 고뇌는 역사의 <어둔 밤>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밤, 깊은 밤바람이 뒤설레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 비인 방안에는
  등잔불의 기름 조는 소리뿐 ……

  쥐가 천정을 모조리 써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에서 자맥질한다.

  아아, 기나긴 겨울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소리……
  별 없는 하늘 밑에 들어 줄 사람 없구나!

   - 심훈의 <밤> 전문

 

 

  그의 작품 <밤>을 읽어보면 그가 역사의 어둠 속에서 얼마나 가슴을 조이며 절망했는지를 알 수 있다.

 

 

 

 

 

(2) 저항시 <그날이 오면>

 

 

  그리고 두 번째 주목할 것은 1930년 3월 1일에 조국 광복을 갈망하며 쓴 <그날이 오면>을 비롯한 저항시의 창작이다. 이 작품은 일제 36년간의 저항시(抵抗詩) 중에서 손꼽히는 작품이다.

 

  심훈은 1932년 시 <그날이 오면>을 비롯해 자신의 작품을 묶어 《그날이 오면》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발간하기 위해 총독부에 발행 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자신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내용이나 시구를 빨간 줄로 지워버리거나 ‘삭제’ 도장을 찍어 발표를 금한 뒤에 시집의 출판을 허가하지 않았다.

 

  암울했던 일제 강압기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1936년에 타계한 심훈은 자신의 시집 발간을 보지 못했다. 이 시집은 심훈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뒤인 1945년, 광복을 맞고서야 발간됐다. 전시관에는 심훈의 시집 《그날이 오면》의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3) 계몽소설 <상록수>의 집필

 

 

  그리고 세 번째로, 그의 진가는 아무래도 1935년 한국 농촌계몽소설 <상록수>의 집필과 농촌운동이라 할 수 있다. 심훈은 자신이 지은 필경사에서 당시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치던 실제 조카 `심재영'의 활동 모습을 보며 소설 <상록수>를 집필했다. 많은 양의 원고였지만 소설과 현실이 동떨어지지 않았기에 50일이라는 단시간에 소설을 써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소설 <상록수>는 최용신(소설 속 채영신)이라는 실존 인물의 일대기를 소재로 쓴 것인데, 최용신 선생이 농촌 계몽 활동을 하던 곳은 안산 상록수역 근처였다. 당시의 교회와 묘소가 상록수역 근처에 있다. 상록수역이 있는 곳의 행정구역상 지명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이라 한 것은 소설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소설 속의 청석골은 이곳의 샘골이며, 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최용신(崔容信:1909~1935)이 1930년대 항일과 농촌 계몽에 헌신한 무대가 있는 마을이다. 그 줄거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등농업학교 학생인 박동혁과 여자신학교 학생 채영신은 모 신문사가 주최한 학생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우수 대원으로 뽑혀 보고회 겸 위로회 석상에서 만나 동지가 된다. 두 사람은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을 지키러' 내려가기로 약속하고 동혁은 고향인 한곡리로, 영신은 기독교청년연합회 특파원 자격으로 경기도 청석골로 각각 내려가 농촌 사업의 기초 작업에 들어간다.


두 사람은 각자의 형편과 사업의 진행 과정을 편지로 알리며 서로 의논한다. 두 사람의 동지 의식은 사랑으로 발전하지만 3년쯤 지나 후진에게 일을 맡길 수 있을 때 혼인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역경에 휘말리게 된다. 영신은 과로와 영양실조로 점차 몸이 쇠약해지다가 학원 낙성 식장에서 하객으로 초대된 동혁이 보는 앞에서 맹장염을 일으켜 쓰러지고 만다.


동혁은 동혁대로 악덕 지주 강기천의 농간에 휘말리다가 투옥된다.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영신은 서울연합회의 주선으로 요코하마로 정양 겸 유학을 떠나나 곧 돌아온다. 다시 일에 몰두한 그녀는 각기병에 맹장염 재발로 숨을 거둔다. 출소한 동혁은 영신의 죽음을 알고서 비탄에 잠기나 곧 두 사람 몫을 해낼 것을 굳게 맹세한다.」

 

 

 

 
  세속적 성공을 포기한 농촌운동가의 희생적 봉사와 추악한 이기주의자들 비인간성의 대비를 통해서 민족주의와 종교적 휴머니즘 및 저항 의식을 고취한 작품이다. 이광수의 <흙>과 더불어 일제 당시의 농촌 사업과 민족주의를 고무한 공로로 한국 농촌소설의 쌍벽으로 평가된다.

 

  이 소설은 당시의 시대적 풍조였던 ‘브나로드(vnarod)’ 운동을 남녀 주인공의 숭고한 애정을 통해 묘사한 작품이다. 본래 ‘브나로드’는 제정 러시아 말기,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 아래 제창한 구호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이 구호 아래 1874년 러시아 청년 학생들이 농촌에 들어가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뒤부터 ‘브나로드’는 계몽 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에 있어서 브나로드 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동아일보사가 전개한 농촌 계몽 운동과 맥을 같이한다. 민중계몽을 통한 민족 자강으로 독립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한 이 운동은 언론계, 조선어학회, 청년 학생이 함께 참여했다.


  한국의 브나로드운동은 한글과 산술을 가르치는 고등보통학교 4·5학년 학생으로 조직된 학생계몽대와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으로 조직된 학생 강연대, 여행일기, 고향 통신, 생활 수기 등을 신문사에 보내는 학생기자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또한, 조선어학회의 후원으로 3회에 걸쳐 전국 주요 도시에서 조선어강습회를 열었는데, 각 지방에서 야학을 개설한 학생들은 한글 이외에 위생·음악·연극도 지도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몽 운동과 문화 운동을 겸하는 민중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심훈은 사실주의에 근거한 농민문학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이다. 이 작품은 일제 치하에서 농촌 계몽 운동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며,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다. 그리고 1981년에는 일본에서도 이 책이 번역·간행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4) 영화인으로서의 심훈

 

 

  그는 시인이며, 소설가인 동시에 영화인이었다. 심훈은 이미 1925년에 영화 <장한몽>에서 주인공 이수일로 분하였으며,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1927년에는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 등의 평론으로 프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그만큼 심훈은 한국 영화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기념관에는 단성사에서 상영된 영화 <먼동이 틀 때>의 촬영 대장 원본 등 귀한 자료가 쌓여 있다.

 

 

 

 

 

  전시관을 관람한 뒤, 옥상으로 발길을 옮기면 옥상에는 ‘그날이 오면’의 시비와 함께 심훈 선생의 조형물이 서 있다. 여기서는 확 트인 바다와 함께 멀리 서해대교의 웅장한 모습이 보이고, 물살을 가르는 작은 고깃배들이 한진포구로 드나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필경사 지역은 한진포구가 가까이 자리 잡고 있어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이다. 한진포구는 조선 초에 개항해 1950년대까지 성시를 이뤘던 유서 깊은 포구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이 박동혁을 찾아왔던 곳도 한진포구였다. 옛 영화가 사라진 지금은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 변했지만, 싱싱한 자연산 회를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속속 들어서고, 현대식 건물들이 바다에 발을 담그듯이 서 있어 바다 정취를 맛보는데 그만이다.


  특히 서해대교 위로 떠 오르는 일출과 사방이 어두워져 조명을 밝히면 다리와 어울린 주탑은 장관을 이룬다. 주탑에는 따로 조명을 켜지 않지만, 도로의 가로등은 은은하게 주탑을 밝힌다. 한진포구에서 바라본 서해대교는 참 예쁘다.

 

 

 

 

 

●이용 안내

 

주소 : 충남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길 105 (송악읍 부곡리 253)

전화 : 041-360-6883

시간 : 09: 00 ~ 18:00(동절기는 17:00)

휴무 : 월요일, 설 당일, 추석 당일

요금 : 없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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