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한용운 생가
한용운 시인의 꿈과 독립사상을 키운 곳
글·사진 남상학
만해 한용운의 삶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곳은 인제의 백담사와 만해기념관과 남한산성, 그리고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 등이 있지만, 정작 그가 태어나 결혼할 때까지 유년시절과 소년시절 꿈을 키운 곳은 충청남도 홍성이다. 만해 한용운 생가는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있다.
토굴새우젓으로 소문난 홍성군 광천읍 외곽도로 사거리에서 우회전, 천수만 방면으로 향해 가다보면 결성면 소재지가 나온다. 결성우체국 앞에 이르러 우측으로 심하게 굽은 도로를 따라가면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에 닿는다. 양옆으로 과수원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한가로운 길에다가 안내판도 잘 되어 있어 생가를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만해문학체험관
밭 사이 좁은 길을 달려 양지밭 언덕 쪽 '한용운 선생 생가지’라 쓰인 안내판을 읽고 주차장에 차를 댔다. 주차장 옆에는 새로 건축한 현대식 2층 건물이 보이는데 이것이 만해문학체험관이다. 만해문학체험관 입구 우측에는 “卍海韓龍雲之像”이라고 쓴 만해 한용운의 흉상이 있다.
우리의 2세들에게 만해의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과 사상을 기리고 체험을 통해 국가와 민족 사랑 사상을 함양하기 위해 마련된 만해문학체험관은 2007년 10월 개관했다. 대지 2,803㎡ 면적에 연건평 1,090㎡ 2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 만해의 유품등을 전시한 전시실과 어린이체험실, 2층에는 세미나실과 창작실, 조리실 등을 갖춰 관람객들이 관람, 체험, 창작, 연구를 통해 만해의 사상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꾸며 놨다.
특히, 전시실에는 만해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60점의 유품전시실을 비롯해 불교사상관, 독립사상관, 문학사상관 등을 갖췄다. 문학 체험관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애와 문학 등에 대한 설명 및 자료가 다수 전시되어 있어, 관람객의 발길을 머무르게 한다. 주요 전시물로는 오도송,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유심 창간호, 님의침묵 초판본 등이 있다.
신동이었던 어린 시절부터 독립운동 활동을 하기까지와 그가 남긴 친필 작품들을 감상해볼 수 있다. 또 시청각 영상시설이 설치돼 관람객들은 이곳에서 만해의 일생을 접하고 선사의 숭고한 사상 등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또 어린이 체험실은 흔적체험용 탁본 5종과 영상시설 3종, 만해 관련 도서 300여권, 정보검색용 컴퓨터, 퀴즈코너 등을 설치, 어린이들에게 흥미롭고 유익한 체험의 장소가 되고 있다.
만해문학체험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꽤 넓은 마당이 펼쳐지는데 돌비 하나가 먼저 사람을 맞는다. 돌비에 기록한 글은 한용운 선생이 ‘삼일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 말미에 추서했다는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새긴 것이다.(최근에는 ‘공약삼장’도 본문을 작성한 최남선의 글이라는 설도 등장했다.) 삼일독립선언서는 본문과 공약삼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약삼장은 독립선언서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
―.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ㆍ人道ㆍ生存ㆍ尊榮을 위하는 民族的 要求이니 오직 自由的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一走하지 말라.
―.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여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삼일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 15인, 기독교측 16인, 불교측 2인 등 33인이 서명했는데, 불교계에서는 한용운과 백용성이 참여했을 뿐이었다. 그 중 한용운은 법정투쟁과 옥중에서 의연한 기상과 꿋꿋한 일당백의 투지를 보여 사식을 청하지 말고 변호사를 대지 말 것을 주장하고 몸소 실천하였던 인물이다.
그리고 마당 한쪽 또 다른 한용의 어록비에는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는 글귀가 새겨 있어,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오석에 새겨진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은 방문자들의 발걸음을 잠시 그 자리에 묶어둔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 全文
시인은 자신을 나룻배로, 부처 또는 민족을 당신으로 비유하고 있다. 물은 고해(苦海)이며 세상이다. 님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나는 나약하고 비천한 존재로 그려진다. 나는 기다림의 속성으로 태어난 존재이며, 당신이 강을 건너면 다시 돌아보지도 않고 길을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룻배와 행인의 관계는 주종관계이며, 지배자와 복종자 사이의 논리에 따른다. 그러나 그 복종 또는 기다림은 기쁨에서 우러난 것이며, 자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의 본질은 자비와 인내를 바탕으로 한 희생과 믿음임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나룻배라는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주제를 비유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으며, 특별한 기교 없이 평범하고 쉬운 우리 말로 정감의 절실한 깊이를 노래한 시이다.
한용운 생가
<나룻배와 행인>을 찬찬이 읽은 뒤에 생가 쪽으로 발길을 옮겨 본다. 생가 자리에는 초가가 두 채인데 입구 왼편에는 초가로 지어진 관리사무소, 오른편에는 생가가 자리 잡았다. 한용운 생가는 소박한 시골 공원처럼 포근하다. 시인이었으면서 독립운동가, 불교개혁가, 사상가로 평생을 살았던 만해도 자신의 생가가 거창하게 서 있는 걸 원하지 않았을 것도 같다. 생가를 짓고 관리하는 이들의 속뜻은 알 수 없지만 만해 한용운 생가뿐만 아니라 특이하게도 관리사무소까지 초가집이다.
싸릿대 울타리로 복원된 만해 선생의 생가는 초가지붕을 얹었으며 방2칸, 부엌 1칸으로 구성된 일자형 구조로 한용운이란 문패가 걸려있어, 생전의 만해 선생이 마치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듯한 감상에 빠져든다. 댓돌이며 툇마루가 한없이 정겹고 우물과 장독대를 돌아 집 뒤 야산 언덕배기를 올려보면 적송과 조릿대가 자란다. 슬쩍 방안을 기웃거리자니 만해의 영정과 앉은뱅이책상 하나가 쓸쓸히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부엌 옆은 장작을 쌓아두는 헛간이고 사랑방 옆은 절구통과 맷돌이 보관된 헛간이다. 마당을 둘러보면 작은 연못과 정자가 들어서 있다.
1879년 이곳 성곡리에서 태어난 한용운은 본명이 정옥(貞玉)이며, 불문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유천(裕天)이라고 하였다. 한용운 선생은 6세부터 성곡리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워 9세에 문리를 통달, 신동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14세가 되던 해에 부친의 명에 따라 결혼하였으나, 2년 만에 설악산의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그 후 18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이 집에서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시심(詩心)을 키웠을 것이다. 그의 시심이 차후에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을 탁월하게 예술적으로 결합하여 그만의 시세계를 형성하기에 충분했을 터이다. 여기서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님의 침묵>을 떠올려 본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님의 침묵> 全文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사상과 민중사상으로 요약되는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한용운 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의 문학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 된다.
1926년에 간행된 《님의 침묵》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성을 지닌 한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 곧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갈등〔反〕―생성〔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별은 그의 시 전체의 대전제로서 '만남'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인 것이다. 님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인 것이며 따라서,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바로 참된 낙원 회복의 시대, 광복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로 파악할 수 있다.
<님의 침묵>은 어찌 보면 여성적인 정조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 중기 정철(鄭澈)이 왕권으로부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성주의의 〈사미인곡〉을 쓴 것처럼, 한용운도 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에 대한 회복의 소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시에서 보이는 여성주의는 정감적인 호소력을 유발하기 위한 표면적 기법일 뿐 그 내면에는 저항과 극복정신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주의적인 부드러움과 애한의 정조는 실상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응전방식일 뿐 내면에 흐르는 선비정신으로서의 저항정신 및 극복정신과 조화되어 한국문학의 총체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만해시는 은유와 역설 등의 방법과 산문적인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로서의 형태를 완성시킴으로써 현대시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타고르 등 외래시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시에 그 정신과 방법상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 실상 그의 시는 신문학사 초기의 각종 문예사조의 범람 등 서구지향의 홍수 속에서 전통적인 시정신의 심화와 확대를 통해서 창조적 계승을 성취한 것이다.
그의 마을에서 기거하던 한용운은 설악산의 백담사로 들어가 불문에 입문하여 법명을 '용운'이라 하고 호를 '만해'(萬海, 卍海)라 하였다. 그러나 27세가 되던 을사년에 일제의 강압으로 국운이 기울어지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던 그는 1919년 3월 1일에는 민족대표의 33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고, 옥고를 치르면서 『독립의 서(書)』를 짓기도 하였다.
1925년에 재차 설악산으로 다시 들어가 《님의 침묵》을 내면서 저항 문학에 앞장섰는가 하면, 장편소설 《흑풍》, 《박명》 등을 발표하였다. 이와 함께 불교개혁운동에 일생을 바쳤으며 불교청년회·불교유신회·만당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1944년 5월 9일 69세의 일기로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했다. 시신은 망우리의 정상 부분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었다.
사당인 만해사
생가 뒤 언덕으로 계단을 오르면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는 만해사당이다. 구도자적인 자세로 독립을 위해 살다간 그의 남다른 생애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옷깃이 여미어진다.
시비공원
사당에서 생가로 내려와 생가의 오른쪽으로는 민족시비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홍성군은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인 만해 한용운 (1879~1944)의 사상과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만해체험관을 건립한 후, 생가 뒷산 2만2,963㎡에 '민족시비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언덕 위로 오르는 산책로를 따라 한용운 선생의 시와 함께 다른 유명 민족 시인들의 시비가 자연석으로 건립되어 있다. 산책길 주위로는 계절별 야생화로 멋지게 조경을 이뤘다. 이는 만해체험관과 함께 시를 체험하기 위한 현장학습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왼쪽 오솔길을 따라 먼저 한용운의 <복종>이 눈에 들어온다.
한용운의 <복종>을 옮겨보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지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달금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 <복종> 전문
이 시는 '당신을 사랑하는 정'을 '자유'와 '복종'이라는 상반되는 두 이미지로 포착하고 있다. 이 시에서의 '복종'은 타율적인 강요에 의한 굴종이나 속박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자발적, 능동적인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사랑을 위한 희생이며, 헌신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서의 복종은 막연한 자유보다 오히려 더 큰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이별이 더 크고 빛나는 만남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되듯이, 자발적인 복종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인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어떠한 것보다 '아름다운' 자유를 얻기 위한 실천이라는 깨달음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한용운은 불교에 몸담은 승려이면서도 기미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한민족의 해방을 위해 평생을 고스란히 바친 애국지사이자 민족 운동가였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 민족의 지도자들이 일제의 위협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상황 아래에서 '다른 사람', 즉 외국에게는 절대로 복종할 수 없지만, '당신', 즉 조국이라는 절대자에게 복종함으로써 향유할 수 있는 자유보다도 달콤한 기쁨과 자신의 애국심과 지조를 담았다.
그외 백석의 <모닥불>, 이육사의 <절정>,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김남주의 <자유>, 유치환의 <바위>, 김소월의 <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대일 땅이 있었드면>, 조태일의 <풀씨> 등을 앍으면서 언덕 위로 올라가면 언덕 위에 쉼터로 안성맞춤인 만해정이 있는데 여기서 잠시 시정(詩情)에 잠겨보는 것도 좋으리라. 잠시 쉬었다가 내려오는 길을 따라 발길을 옮기면 정지용의 <고향>, 구상의 <오늘>, 박두진의 <해>, 윤동주의 <간(肝)>, 변영로의 <논개>, 김광섭의 <나의 사랑하는 나라>, 심훈의 <그날이 오면>, 김달진의 <씬낸이꽃> 등이 보였다.
이곳 생가에서 좀 떨어진 곳, 홍성읍내에서 보령으로 내려가는 21번 국도변에는 만해의 동상은 있는데, 생가 방문 후 들러보길 권한다.
▲가는 길 : 홍성터미널 → 광천 21번국도 2km → 결성시내버스 10km → 성곡리 (한용운선생 생 가지) 3.5km
<끝>
'문학관련 > - 문학기행(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천 설봉 문학동산, 굴곡진 역사 속 얼룩진 영욕(榮辱)의 자국 (0) | 2021.07.08 |
---|---|
강릉 허난설헌 · 허균 생가지 기념공원 (0) | 2020.09.22 |
인제 문학기행, 만해 한용운의 혼이 살아 숨쉬는 백담사와 만해마을 (0) | 2020.09.19 |
'상록수'의 산실 필경사와 심훈기념관 (0) | 2020.09.16 |
최명희문학관,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 (0) | 2019.12.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