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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연필로 쓰기 / 정진규

by 혜강(惠江) 2020. 9. 4.

 

 

 

연필로 쓰기

 

- 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 시집 《연필로 쓰기》(1984) 수록

 

◎시어 풀이 

 

*예비(豫備) : 미리 마련하거나 갖추어 놓음.

*반편(半偏) : ① 한 개를 절반으로 나눈 한 편짝. ② ‘반편이’의 준말. 지능이 보통 사람보다 낮은 사람. 반병신.

 

▲이해와 감상

 

  정진규 시인의 시 <연필로 쓰기>는 동명의 시집인 제6 시집 《연필로 쓰기》(1984)에 실려 있는 시로, 언제나 지울 수 있는 연필의 속성을 이용하여 관용과 용서의 사랑을 실천하는 향기로운 영혼의 삶에 대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연과 행의 구분이 없는 산문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시상 전개의 중간중간에 ‘연필로 쓰기’를 반복적으로 삽입하여 운율감을 형성하고 있으며, ‘~ 때문입니다’, ‘~ 아닙니다’ 등의 어휘들을 반복함으로써 일정한 리듬감을 형성하고 있다.

  시상의 전개에서 가장 중심적인 진술은 시적 자아가 자신의 시를 ‘연필로 쓰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왜 연필로 쓰고 싶은지에 대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 속에 시적 자아가 추구하는 가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시적 자아는 먼저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넘친다고 진술하면서 ‘연필로만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연필이 왜 ‘향그런 영혼의 냄새’를 산출한 것인지는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혀진다.

  이어서 시적 자아는 연필로 시를 쓰고 싶은 이유를 나열하는데, ‘한 번 쓰고 나면’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가 두렵기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연필로 시를 쓰고 싶은 이유는 ‘워버릴 수 있는 생애’ 살고 싶기 때문이며,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서러운 예비’로서의 삶을 꾸려나가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실수와 잘못으로 점철된 삶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고 싶기 때문에 연필로 시를 쓰고 싶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이 고쳐 쓸 수 있고, 용서받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하는 까닭은 자신이 매우 부족한 사람임을 자각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인식은 자신이 ‘온전치 못한 반편’이라고 규정하는 대목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시적 자아는 ‘잘못 간 서로의 길을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고백하면서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나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 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라고 하여 ‘진실의 길’마저 지운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자신의 잘못된 과거의 삶은 누구나 지워버리고 싶을 것이다. 항상 그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수치심과 후회의 감정이 그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떳떳하게 걸어왔다고 생각되는 길, 진실을 밟아왔다고 생각되는 과거의 그 길을 지워버리려고 한다면 누구나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신의 노력과 성취가 지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적 자아는 궁극적으로 연필로 시를 쓰고자 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까닭’이며,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어떠한 명예나 업적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이나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려울 것이다. 목표 의식이 강하고 성취 욕구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엄격한 태도를 취하며 괴롭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적 자아는 자신과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을 때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향그런 영혼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이 시는 언제나 지을 수 있는 연필로 시를 쓰겠다는 다짐을 표출한 뒤 그 이유를 해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시적 자아에 의하면 연필로 시를 쓰는 것은 부족한 자신이 언제나 저지를 수 있는 잘못된 삶을 지워버리고 싶고, 용서받고 싶기 때문이다. 시적 자아는 진실의 길마저 지워져도 괜찮다고 주장하면서 결코 명예와 업적 같은 세속적 욕망에 집착하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그러한 삶의 용서와 관용을 실천할 수 없으며, 사랑을 통한 영혼의 향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정진규의 이 시를 들어, "잘못 쓴 글씨를 지우듯 우리의 생애도 지우고 고쳐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못 간 길을 서로 지워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떳떳했던 길마저 지워진대도 섭섭해하지 말고, 그것도 얼마든지 지워질 수 있는 것이라 여기며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허물 많은 삶에 대한 용서와 사랑, 향그런 영혼의 냄새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결국, 시인이 연필로 시를 쓰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삶, 그러한 실천을 통해 향기로운 영혼에 도달하고자 하는 이유 때문이다.

 

▲작자 정진규(鄭鎭圭, 1939~2017)

 

  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나팔 서정>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했다. 정진규의 초기 시는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충동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며, 불가시적인 존재의 이면에 있는 실체를 발견하려는 노력과 내면적인 의식에 대한 탐구가 관념적인 언어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제3 시집인 《들판은 비인 집이로다》를 기점으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으로 관심을 확대하고, 시의 형식 또한 산문적 형태를 띠면서 일상적 삶의 진솔한 체험을 표현하게 된다. 이후 동양의 유현한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게 되고, 그러한 관심은 몸에 대한 성찰로 귀결된다.

  시집으로 《마른 수수깡의 평화》(1966), 《유한의 빗장》(1971),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1977), 《매달려 있음의 세상》(1979), 《비어 있음의 충만을 위하여》(1983), 《연필로 쓰기》(1984), 《뼈에 대하여》(1986), 《몸詩》(1994),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2008)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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