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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by 혜강(惠江) 2020. 9. 4.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1979) 수록

 

 

◎시어 풀이

 

*동사자 : 얼어 죽은 사람.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슬픔에 대한 통찰을 통하여 소외된 이웃에게 무관심한 ‘너(현세대)’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필요함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인 ‘나’는 소외된 이웃들을 외면하고 이기적으로 살아 왔던 삶에 대해 반성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이 시는 ‘슬픔’과 ‘기쁨’의 대립적 이미지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우리의 삶의 단면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삶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이 시에서 ‘슬픔’은 일상적인 의미가 아닌,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릴 줄 알며, 심지어는 이기적인 ‘기쁨’이 진정한 슬픔의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 함께하려는 긍정적인 존재이다. 이와 반대로 ‘기쁨’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슬픔’과 대조된다.

 

  추상적인 개념을 의인화하여 표현하는 이 시는 ‘슬픔’이 ‘기쁨’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역설적 표현을 통해 슬픔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겠다’의 종결어미를 반복하여 운율감을 형성하고 단호한 어조로 화자의 의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내용상 세 부분으로 볼 수 있는데, 1~6행에서 ‘나’는 이기적인 ‘너’에게 슬픔을 보여주고자 한다. 청자로 설정되어 있는 ‘기쁨’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존재로 추위에 떨고 있는 할머니의 귤값을 깎으며 기뻐한다. 이러한 ‘기쁨’에게 화자는 ‘슬픔’을 주겠다고 한다. ‘사랑보다 귀중한 슬픔을 주겠다’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사랑보다 더 가치 있는 슬픔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는 것은 슬픔도 기쁨만큼이나 소중하다는 인식을 보여주겠다는 의미이다.

 

  7~13행에서는 무관심한 ‘너’에게 기다림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외면하며, 얼어 죽은 사람을 위해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는 이기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기쁨’에게 화자는 ‘슬픔’에 이어 ‘기다림’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무관심한 사랑’과 ‘동정과 연민이 없는 마음’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기까지 걸리는 기다림으로서, ‘사랑’이나 ‘기쁨’이 ‘슬픔’에 도달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볼 수 있다.

 

  14~19행에서는 진정한 사랑을 위해 ‘너’와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는 슬픔의 힘을 노래하고 있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는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시련이나 고통을 멈추겠다는 것이며,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을 봄눈을ㄹ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는 것은 소외된 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하여 너와 함께 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슬픔의 힘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라며,  ‘기다림’과 ‘슬픔’의 가치를 깨달을 때까지 걸어가겠다는 각오로 시상을 마무리한다.

 

  이 시에서 ‘슬픔’은 ‘사랑’보다 소중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사랑’과 ‘기쁨’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평등한 웃음을 준 적이 없지만, ‘슬픔’은 추워 떨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을 위로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기적인 사람들의 ‘사랑’보다, 타인의 고난과 시련에 관심을 갖는 ‘슬픔’이 오히려 더 큰 힘을 갖고 있다. 화자는 이러한 ‘슬픔’을 ‘너’에게 주고 싶은 것이다. 이때 청자인 ‘너’는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으로 살면서 소외된 이웃들에게 무관심한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다.

 

  결국, 이 시에서 화자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자신만의 안일을 위해 남의 아픔에는 무관심하거나 그들의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태도가 아니라 모두 더불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지향하는 것이다.

 

 

▲작자 정호승(鄭浩承, 1950 ~ )

 

 

  시인. 경남 하동 출생.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정치적 ·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슬프고도 따뜻한 시어들로 그려 냈다. 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1979), 《서울의 예수》(1982), 《새벽편지》(1987), 《별들은 따뜻하다》(1990), 《흔들리지 않는 갈대》(1991),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내가 사랑하는 사람》(2004), 《포옹》(2007), 《수선화에게》(2015),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2017)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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