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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by 혜강(惠江) 2020. 9. 22.

 

 

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 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둘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 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 던고

 

 

- 조지훈 시선집 《산우집(山雨集)》(1956)

 

 

◎시어 풀이

*어디메 : ‘어디’의 방언

*성긴 : 반복되는 횟수나 도수(度數)가 뜬, .물건의 사이가 뜬.

*후둘기다 : ‘두들기는’의 방언

 

 

▲이해와 감상

 

  조지훈의 시 <파초우>는 자연과 마주 대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삶을 지향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제목의 ‘파초우’는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이라는 의미이다. 청록파인 시인답게 자연의 모습을 시상으로 삼아 시를 전개하고 있다.

 

  전연 4연으로 된 자유시이지만, 7ㆍ5조의 민요 가락이 호흡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민요적이다. 1연과 4연은 수미 상관의 기법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화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3연에서는 '싫지 않은',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자연을 그리고 있다. 또한 ‘쉬리라 던고’에서 보듯, 고풍(古風)스러운 언어 구사를 통하여 시에 고전적인 감각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저녁 어스름’, ‘푸른 산’ 등의 시각적 이미지와 ‘후두기는’, ‘물소리’ 등의 청각 이미지를 사용하여 화자가 마주하고 있는 자연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내어 인간과 자연의 동화감(同和感)을 잘 드러내고 있다.

 

  1연의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 던고’에서는 정처 없이 떠도는 구름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여기저기 떠돌며 자연과 교감하는 존재로 시 속에 나타난 ‘구름’은 이러한 화자와 동일시되는 존재이다.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구름은 이 밤을 어디서 지샐까? 흘러가는 한 송이구름도 시인은 무심히 보지 않고 깊은 애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2연의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둘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에서는 파초잎에 비 내리는 저녁의 푸른 산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방 동창(東窓) 밖에 파초를 심는 것은 한국 선비들이 즐겼던 풍류였다. 중국 진(晋) 나라의 시인 도연명의 시구절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과 비교해서 말하는 이도 있으나, 이 시는 단순한 자연 관조가 아니라,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가 있다. 시인은 소나기 방울이 파초잎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저녁 어스름에 창문을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 졸졸대는 물소리를 듣는다. 푸른 산과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하기 때문이다.

 

  3연에서 시인은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라며, 산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물소리’, ‘산’은 모두 자연을 나타내는 것(대유법)으로 특히 ‘산’은 시인이 관찰하고 있는 대상이고 동시에 시인이 머물고 싶은 공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시인과 산의 대화는 흐르는 물소리로 나타난다. 소나기가 내린 다음 흐르는 많은 개울물 소리는 산의 마음이요, 말이다. 시인은 이 말을 알아듣고, 이 마음을 이해한다. 그래서 산이 더욱 좋아지고, 날마다 바라도 정은 더욱더 그립기만 하다. 자연과 일체가 되고 싶어 하는 자연 친화적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4연에서는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 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 쉬리라 던고’라며, 수미 상관의 기법으로 구름을 보고 느끼는 시인의 꿈을 드러낸다. 시인은 그러한 아름다운 꿈을 아침마다 스쳐 가는 구름, 그 구름은 이 밤, 어디서 머물고 있을까? 자신을 한 번 더 ‘구름’에 빗대어서 자연과 더불어 지내고 싶다는 소망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인생도 그 흐르는 한 송이구름 같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조지훈은 일제에 순응한 어용 문학단체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하라는 강요를 받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인보국회 회원들은 조지훈을 증오하며 활동을 방해했다. 조지훈은 문단 선후배들의 변절에서 서글픔과 착잡함을 느끼며 마음 쉬일 곳을 찾아 경주로 여행을 떠났다. 괴로워서 더욱 고단했던 여행길에서 시 <파초우>를 지었다. 그리고 경주에서 다정한 친구 박목월(朴木月)을 만나 술을 마시며 이 땅의 한(恨)을 이야기했고, 시 <완화삼(玩花衫)-목월에게>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의 암흑기에 뜻있는 청년이 역사적 현실의 부조리에 부딪혀 낙향(落鄕), 울적한 나날을 보낼 때의 심정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 시를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어디에서도 편안하게 쉴 수 없는 현실에 지친 화자는 자연 앞에서,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에 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은 그의 다른 작품인 <낙화>, <민들레꽃>, <풀잎 단장> 등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작자 조지훈(趙芝薰, 1920~1968)

 

  시인, 국문학자. 경상북도 영양 출생. 본명 동탁(東卓). 1939년 《문장》지를 통하여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 등으로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동양의 회고적 정신을 바탕으로 전통에의 향수, 민족의 한(恨)을 고전적 운율로 노래하였다. 청록파의 한 사람인 박두진은 그를 가리켜 “투명한 감성, 밝은 지성, 예리한 감각과 윤택한 정서를 통하여 한국의 현대 시사에 하나의 불멸의 업적을 남겨놓았다”라고 평가했다.

 

  박두진, 박목월과 공동 시집 《청록집》(1946)을 간행하였고, 시집으로 《풀잎 단장》(1952), 《역사 앞에서》(1959), 《여운》(1964) 등이 있다. 그밖에 수필집으로 《창에 기대어》(1958), 《시와 인생》(1959), 《돌의 미학》(1964), 《지조론》(1963), 평론집으로 《시의 원리》(1953), 《한국문화사 서설》(1964) 등이 있다.

 

 

►작성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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