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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 진은영

by 혜강(惠江) 2020. 9. 24.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 진은영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일곱 개의 단어를 사전적 의미가 아닌 시인이 독창적으로 해석한 새로운 의미로 표현하여, 암울한 현실에 대한 세상에 대한 시인의 생각과 시인으로 사는 삶을 참신하게 전달하고 있다. 서정시이지만 사색적, 철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시인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바꾸어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고, 세상과 삶에 대한 철학적 관점을 통해 독자를 사색에 잠기게 한다. 또 비유와 확장을 통하여 대상의 모습을 참신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의 독백, 혁명, 시’ 등의 일곱 개의 단어에 사전적 의미가 아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1연에서, ‘봄’은 ‘놀라서 뒷걸음치다/ 맨발로 푸른 뱀을 밟다’라고 형상화하고 있다. 보통 봄은 생기발랄하고 희망으로 넘쳐야 하는데, 놀라 뒷걸음치다 맨발로 푸른 뱀을 밟다니, 어찌 아찔하고 불안하다. 젊은 세대들이 앞보다는 뒤를 걱정해야 하는 ‘슬픔’의 분위가 몰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2연에서는 ‘슬픔’에 대하여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비가 내린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나무토막이 물에 불은 것도 모자라서 그 위에 비가 내리다니, 엎친 데 덮친 격인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슬픔이다. 무거운 절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그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3연에서 화자는 ‘자본주의’를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로 묘사한다. 화자가 자본주의를 ‘형형색색의 어둠’으로 표현 이유는 화려한 겉모습에 숨겨진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러한 암울한 현실에서 희망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일 수밖에 없으니, 화자는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라며 의문을 제기한다.

  4연에서, 화자는 ‘문학’을 가리켜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울음’이라고 묘사한다. 여기서 문학은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든’ 것처럼 보이는 암울한 절망에 처한 인간(젊은이들)에게 잠시라도 안식과 위로, 힘과 희망을 주는 ‘개구리울음’과 같은 대상인 것이다.

  이어 5연에서 화자는 시인의 처지에서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이라고 독백하면서,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친다. 이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 같은 것에 희망을 두면서도 ‘부러진 피리로 벽을 치는’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 울림을 만들어 내려는 시인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과 함께 미세한 울림을 하나로 집결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6연에서 ‘혁명’을 거론한다.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이라면서, 혁명의 길은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실토한다. 혁명은 그리 쉽게 보이지 않고, 또 그리 쉽게 현실이 되지 않는다. 현실은 아직도 어둡다.

  그렇다면, 이 어두운 현실에서 혁명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니는 마지막 무기는 무엇일까? 7연에서는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라며, 우리에게 도착하는 아름다운 편지 같은 ‘시’를 형상화하고 있다.

  시는 누구에게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 속하지도 않는다. 시는 어느 순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읽힌다. 그러나 ‘너’는 그 속에 없다. 시 속에서 ‘너’를 찾아선 안 된다. ‘너’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인은 이 시에서 일곱 개의 단어에 대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의미를 제시하여,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꾸며 놓고 나름대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며, 독자들에게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작자 진은영(1970~ )

 

  시인. 충남 대전 출생. 2000년 《문학과 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주로 낯선 화법에 실린 선명하고 감각적인 이미지와 독창적인 은유의 세계를 표현한 시를 썼다.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 《우리는 매일매일》(2008), 《훔쳐 가는 노래》(2012) 등이 있다.

 

 

►작성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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