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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달팽이 / 정호승

by 혜강(惠江) 2020. 9. 8.

 

 

 

 

달팽이

 

 

- 정호승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을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 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미물처럼 보일 수 있는 달팽이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적 강인함과 타인을 사랑하고 포용하는 자세에 대해 그리고 있는 시이다. 즉, 육체적으로 연약한 달팽이의 모습에서 강인한 정신과 포용적인 자세를 읽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삶을 성찰하고 있다.

 

  화자인 ‘나(달팽이)’는 시련의 상황에 부닥쳐 있지만, 단단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밟은 소년까지 이해할 정도로 포용적인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달팽이의 목소리를 사용하여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는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대조·대구·역설적 표현 등을 사용하여 주제를 형상화하고, 비슷한 문장 구조를 반복하여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1연에는 달팽이와 인간의 유사성이 나타난다.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라고 한다. 이 두 행은 대조 · 대구 · 역설로 이루어진 것으로, 달팽이가 밟히면 죽는 연약한 존재지만 내면적으로 강한 것처럼 인간도 육체적으로 연약하나 정신적으로는 강인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반복과 대구로 이루어진 이 두 행은 인간이 삶에서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며 달팽이와 사람의 유사성을 말하고 있다.

 

  2연에는 달팽이에게 다가오는 시련이 나타나 있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있다.’라고 한다. 여기서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달팽이가 처한 시간적 배경으로 밤이 점점 물러나고, 밤에서 아침으로 시간이 흐른다. 습기가 많을 때나 밤에 나무나 풀 위에 기어 올라가 풀이나 나뭇잎을 갉아 먹는 달팽이로서는 생존을 위하여 수분을 얻기 위해 아침 이슬을 밟으며 가야 한다. 그런데 ‘누가 오고 있다’. 달팽이의 진로를 방해하는 존재가 아닐까 어찌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3연에서 그 존재가 드러난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스스로 단단한 마음을 지녔다고 생각한 달팽이에게는 이런 시련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달팽이는 ‘무심코’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소년의 행위가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며, ‘죄 없는 소년’이라고 한다. 이것은 소년이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소년을 ‘죄’가 있는 존재로 정죄하지는 않겠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달팽이의 이러한 인식은 ‘아마 아침 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에 잘 드러난다. 자신에게 엄청난 시련을 준 소년을 용서하고 포용하겠다는 달팽이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결국, 이 시는 자신이 처한 비극적 상황에서 상대를 탓하지 않고 포용하는 달팽이의 태도를 통해 인간 역시 외부 환경이나 타인이 초래한 비극을 맞이하더라도 이를 수용하면서 포용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작자 정호승(鄭浩承, 1950~)

 

 

  시인. 경남 하동 출생.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반시(反詩)》 동인으로 활동했다. 사회적 소외계층의 어려운 삶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해서 비극적인 세계 인식과 유한한 존재로서의 고독한 인간의 외로움과 슬픔을 정제된 언어로 노래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1979), 《서울의 예수》(1982), 《새벽편지》(1987), 《별들은 따뜻하다》(1990), 《흔들리지 않는 갈대》(1991),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위안》(2003), 《내가 사랑하는 사람》(2004), 《포옹》(2007), 《수선화에게》(2015),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2017)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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