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자작시(自作詩)307

(시) 아내를 위한 소묘(素描) / 남상학 (시) 아내를 위한 소묘(素描) 남상학 초가 지붕에 박꽃 피는 가난한 집 처마 끝에 둥지 튼 햇살로 두 아이의 눈을 틔우고 어둠이 묻어 있는 방안에 예지의 불을 밝힌다. 하고많은 날 바람 찬 세월의 고비고비 안으로 다스리는 아픔과 수고 잔잔한 주름살이 늘어가도 광주리에 가득 담은 상큼한 햇과일로 양지쪽 결 고운 항아리에 진한 포도주를 빚었구나 고운 빛깔과 향기로 함께 걷는 길 어느 때고 부르면 이내 달려와 방울 소리 앞세우고 내 곁에 서는 여자 '나는 언제나 당신을 위한 종이에요' 묻기도 전에 대답하는 여자 그대는 영원한 나의 리베* 무상으로 나누는 웃음소리에 우리의 정원엔 사시사철 목련이 핀다. (주) 리베(liebe) : 아내의 이름 석 자를 가리키는 음성 및 의미부호. lie(이)+be('종'을 가.. 2020. 1. 3.
(시) 두꺼비 손 / 남상학 (시) 두꺼비 손 남상학 좀처럼 나를 칭찬할 줄 모르는 아내가 나의 두꺼비 같은 손은 좋다고 한다 만나서는 반갑다고 기뻐하고 헤어질 때는 섭섭하다고 아쉬워하고 살면서 우리는 손을 흔들어 악수한다 깡마른 것보다는 두툼한 것이 낫고 차가운 것보다는 따스한 것이 낫고 손끝에 간신히 잡히는 것보다는 덥석 쥐는 것이 인색하지 않아서 좋단다 아침저녁 물빛 하늘만 쳐다보고 양손 마주 잡아 빚어 만드는 온기(溫氣) 손은 내가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이다 두꺼비 같은 손이 좋다고 하며 오늘도 아내는 나의 손을 잡는다. 2020. 1. 3.
(시) 아내의 빨래 / 남상학 (시) 아내의 빨래 남상학 아내의 빨래 솜씨는 늘 익숙하다. 아이들이 바깥에서 놀다 돌아오면 어둠을 묻혀 왔을까 조바심하는 눈치 어쩌다 밤늦게라도 내가 돌아오는 날에는 한숨을 숨겨왔을까 안절부절못하면서 우리 집 식구의 옷은 유난히도 더러움을 잘 타는 물빛이어서 그렇다고 혼자 중얼거리며 밤늦도록 빨래를 한다 세상에서 묻혀 온 어둠과 한숨은 재빠른 아내의 손끝에서 곧바로 시커먼 땟국으로 빠지고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름과 얼룩들은 밤새도록 뜨겁게 흐르는 눈물에 삶아낸다 작은 몸집에 어디서 그리 큰 힘이 나오는지 아내의 부지런한 손끝에서 하얗게 표백되는 우리들의 하루 아내의 빨래는 하루도 거르는 날 없이 어제나 오늘이나 조금도 서툴지 않다. 2020. 1. 3.
(시) 또 다른 크리스마스 / 남상학 (시) 또 다른 크리스마스 남상학 눈을 비비고 보아도 아기 예수는 그 어디에도 없다 첫 번 크리스마스의 빛나던 별은 거대한 굴뚝의 매연 뒤로 숨고 오토바이 행렬만이 줄지어 선 거리 호텔과 카페 앞 크리스마스트리에 밤낮없이 명멸하는 불빛 유행가 풍의 캐럴이 발길에 밟힌다 소돔과 고모라의 밤이 깊어가면서 모두가 휘청거리는 ‘메리 크리스마스’ 휘황찬란한 장식 뒤로 남몰래 흘리는 눈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차가운 종탑 위의 십자가는 오늘 밤 왜 이리 아프고 선명한가? 2020. 1. 3.
(시) 가을 빈자리 / 남상학 (시) 가을 빈자리 남상학 갈대숲이 머리 풀고 흐느낀다 바람 부는 황량한 들길 뭉게구름 피어오르던 여름 그 날의 향연은 끝나고 가을이 빈 수레를 끌고 온다 텅 빈 자리 모두가 낯설고 두렵다 이웃들은 모두 떠나고 또 친구들은 어디 갔는가 벌판에는 홀로 허수아비만이 지키고 있다 허공을 가르는 한 떼의 기러기 아득히 사라지는 세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뜨락에서 이마에 주름진 나이만큼 홀로 깊은 고독에 잠긴다 쓸쓸히 참새 떼 흩어져 날아간 아스라한 언덕 위 오늘따라 십자가 없는 교회당은 왜 이리 초라하고 쓸쓸한가 먼 나라로 떠난 종소리 쉴 곳 없어 떠도는 영혼을 찾아 다소곳이 기도의 손을 모은다 가을 텅 빈자리 채워야 할 양식을 위해 …. 2020. 1. 3.
(시) 늦가을 오후 / 남상학 (시) 늦가을 오후 남상학 양수리 강을 끼고 돌아 용문산 가는 길가의 은행나무는 마른 손을 비비며 서성거린다 이제 막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는 봉두난발 한 한 무더기 코스모스를 짓궂은 바람이 맨 가슴 밟고 지나간다 목화송이처럼 부풀어 오르던 꿈이 뭉게구름을 타고 흘러 넘는 산허리 어느새 짙은 가을색으로 물들었다 모두 황급히 돌아가는 계절 앞에서 시인 정지용의 향수를 흥얼거리며 나는 왜 이리 목이 메는지 그걸 알아차린 듯 기적소리 토해내며 힘겨운 중앙선 화물 열차가 빈 들판을 가로질러 몸을 숨긴다 이 휘청거리는 늦가을 오후 하얗게 머리 푼 갈대숲으로 우수수 몸을 숨기는 낙하의 몸짓 이제 한 무더기의 바람이 텅 빈 가슴을 휩쓸고 떠나면 나는 미완성의 아쉬움 안고 또 얼마나 기나긴 기도를 올려야 할까 세월의.. 2020. 1. 2.
(시) 모닥불을 피우며 / 남상학 (시) 모닥불을 피우며 남상학 타오르는 모닥불 곁에 별들이 속삭이며 내린다 제각기 빛을 거느리고 와서 왁자지껄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지상에 베푸는 천상의 축제 어둠을 불사르고 작은 소망의 불꽃 하나 이야기꽃으로 피워 올린다. 거리를 잴 수 없는 곳에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서는 발광체 우리의 마음이 하나로 열려 있을 때 비로소 하늘이 보이고 천상과 지상을 잇는 태초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둠 속에서만 울리는 장엄함 그 거룩한 신비의 현을 뜯으며 영혼은 더 맑게 눈을 뜨고 부서지는 빛살의 충만으로 나는 거룩한 나라 백성이 된다 타오르는 빛 둘레에서 이리도 밝은 세상 아, 오늘 밝음 속에 은혜의 불 밝히고 반딧불처럼 살아나는 의식을 위하여 별들과 짝하여 앉아 긴 밤새워 모닥불을 피운다. 2020. 1. 2.
(시) 파도야, 파도야 / 남상학 (시) 파도야, 파도야 - 청간정에서 남상학 저 파도는 누가 보낼까 바람이 자면 노래이다가 바람이 일면 흐느낌이 되는 저 파도는 누가 보낼까 밀고 당기며 끝없이 출렁이는 한바다의 폭풍에 부대끼던 목숨 노래는 가고 눈물만 남아 고꾸라지고 엎어지고 얻어터지고 오열하며 달려와 넙죽 엎드리는 절대의 복종, 절대의 신앙 검은 머리채 풀고 누워 물결 구비구비 싱싱한 물고기 떼 넓고 큰 가슴에 나를 품어 세상의 온갖 남루를 빨듯 내 영혼을 흔들어 헹구는 신비의 하얀 절정 누가 저 파도를 내게 보낼까 어디서 저 파도를 내게 보낼까 파도야, 파도야. 2020. 1. 2.
(시) 3·8 휴게소를 지나며 / 남상학 (시) 3·8 휴게소를 지나며 남상학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발걸음은 언제나 설렌다. 새잎이 돋아나는 것을 바라보는 낯선 풍경, 경이로운 눈길 산등성이 위로 뜨겁게 타오르는 햇살 바다와 맞닿은 곳에서 피어나는 새털구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나를 반기고 순간, 일제히 뜨는 바닷새가 친구 하자고 날개 치며 환영한다. 발길 머문 곳 따뜻한 차를 나누어 마시는 3.8 휴게소, 왁자지껄한 사투리의 억양 속 이름 모를 앳된 얼굴이 해당화 붉은 꽃으로 핀다. 그리움 가득 안고 이대로 북으로 달리면 어딘가 설악을 지나 꿈에서나 보는 일만 이천 봉 금강인가 아니면 신선이 노닌다는 그 어디인가? 만나는 마을마다 내가 꿈꾸는 자유마를 손짓하여 부르는 잡목 사이로 달리는 차창은 늘 새롭다. 2020. 1. 2.
(시) 봄이 오는 길목에서 / 남상학 (시)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남상학 봄기운이 찾아 들어 채 눈뜨지 못한 나무들이 봄바람 속에 속앓이한다. 시간은 한 치의 오차 없이 흐르고 달려 한동안 닫혔던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유난히 춥고 길었던 지난겨울 폭설과 눈보라 온몸으로 이겨 온 인고의 땅, 맨살로 버틴 의지 어느덧 화단 어귀에도 모진 생명이 하늘을 향하여 눈을 번쩍 떴다. 나무는 잔기침하며 일어서고 가지 사이 새들이 고운 목청을 뽑아 푸른 하늘로 끝없이 그리움을 날릴 때 오늘, 이 풋풋한 대지 위 봄이 오는 길목에서 골방 깊숙이 갇힌 영혼에 날개를 달고 하늘 향해 힘껏 솟아오르고 싶다. 2020. 1. 2.
(시) 봄의 서곡 / 남상학 (시) 봄의 서곡 남상학 산들이 기지개를 켠다 오랜 가위눌림에서 일어나 들 바람 앞세우고 걸어온다 백만대군의 함성처럼 초록의 파도가 밀려오는 들녘 시냇물 소리가 경쾌한 목소리로 남국의 설화를 속살거린다 고무줄 튀어 오르듯 참새떼가 대지 가득 넘쳐나누나 눈으로 귀로 집중되는 생명의 소리 이 속삭임, 설레임 시들었던 의식의 새싹이 돋아날 때 잠자던 감성이 살포시 눈을 뜬다 친구여, 어깨에 쌓인 어둠을 털고 길고 긴 계절의 터널에서 나서라 소망의 꿈이 대지에 지천으로 살아나는 자유와 평화의 땅에 울려 퍼지는 한 편의 교향악 신생하는 천지 이 감당할 수 없는 복음 닫힌 귀를 열고 피부 속으로 촉촉이 젖어오는 봄비를 맞는다. 2020. 1. 2.
(시) 꽃샘추위 / 남상학 (시) 꽃샘추위 남상학 불거진 늑골 사이로 바람이 칼날을 세우며 지나간다 잡목 사이 숨었던 복병들이 일제히 소리지르며 달려나가는 한랭한 전선 목이 부러진 겨울나무의 아픈 환부에 무수히 산탄이 박힌다 아무런 방비도 없는 오오, 겟세마네 그 날 오욕(汚辱)의 화살 맞으며 당신이 거기 그렇게 피 흘리는 나무로 서 계셨을까 살기 가득한 눈을 뜨고 다메섹 언덕으로 치닫는 함성 앙상한 가지 사이 어느 날 샛바람 불어오고 한 무리의 짐승이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바다 깊숙이 빠지는 날 눈 속에서 복수초 꽃잎 피어나듯 어둠 속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는 그 아픈 사랑 생목피(生木皮) 찢으며 눈은 뜨리라 찬 바람 부는 벼랑 끝에서도 겨울나무로 버티고 서서 조용히 봄을 가꾸는 일 얼마나 큰 보람인가. 2020. 1. 2.
(시) 기적은 오리라 / 남상학 (시) 기적은 오리라 남상학 동녘 햇살이 누리에 퍼지듯 기적은 홀연히 오리라 예언은 가고 때가 차서 첫눈 내리는 아침 앙상한 가지 끝에 하이얀 눈꽃이 피듯 그렇게 기적은 오리라 곱게 가꾼 신부의 꿈 순결을 심어 놓은 하늘 별자리에 축복의 나래를 펴고 아른거리는 임의 형상이 살아나고 어디선가 정적을 깨는 천상의 소리 무한히 뻗어나는 청각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순은을 반짝이며 쏟아지는 이 엄청난 눈사태 동굴 속에 숨었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와 하늘을 덮는다 이때 비로소 지상은 천 길 깊이로 함몰되고 새날을 환영하는 나팔소리, 북소리 울려 퍼지는 생음악 믿음 있는 자만이 마음의 귀로만 듣게 되는 정지된 시간 도적같이 그 날은 기적처럼 홀연히 오리라. 2020. 1. 2.
(시) 감격시대 / 남상학 (시) 감격시대 남상학 말로는 안 되네 은밀한 곳 어디선가 남모르게 발원하여 긴 침묵의 깊이에서 울려오는 그윽한 묵시의 소리 어느새 마음은 비워지고 눈 덮인 새벽 산하에 다시 태어나는 눈뜸의 기적을 경이로운 신생의 감격을 다 말할 수 없네 말로는 안 되네 오랜 날 하늘 보듬어 꿈으로 빚어 받은 방울방울 작은 가슴 속 흥건히 적시어 안으로 흐르고 넘쳐 일시에 나를 휩싸고 도는 이 엄청난 사태, 형언할 길 없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소용돌이를 나는 말로는 다할 수 없네 말로는 안 되네 눈물로 정성껏 씻어 가슴속에 고이 가꾸어 온 보석 그 찬란한 광채의 눈부심으로 차마 말문이 막히는 은총에의 감사를 어찌할까 나의 감사기도는 언제나 뜨겁게 흐르는 눈물의 강 다만 침묵으로 끝날 뿐이네. 2020. 1. 2.
(시) 참회·2 / 남상학 (시) 참회·2 남상학 오십의 문턱을 넘어서도 내 얼굴은 여전히 뻔뻔스럽다 거울 앞에 정면으로 서서 제법 공들이는 작업이지만 하룻밤을 지나면 매한가지다 사냥개에 쫓겨 달아나는 꿈자리 악몽의 흔적을 뜨거운 눈물로 지우고 어둠의 조각들을 열심히 닦아보지만 닦으면 닦을수록 선명해지는 얼룩들 어제도 오늘도 습관처럼 되풀이하는 부끄러움, 이 가증스러움을 어이하랴 이제 남아 있는 몇 방울의 눈물마저 마르면 화인(火印)처럼 지워지지 않는 자국은 또 어이하랴 허물어져 내리는 앙상한 육체와 지친 영혼 이끌고 피 흘리는 겟세마네 좁은 길 오르며 마지막 남은 참회의 한 방울로 사죄의 말문을 열어야 하리 ‘주여, 불쌍한 나를 도우소서.’ 2020. 1. 2.
(시) 숨바꼭질 / 남상학 (시) 숨바꼭질 남상학 저녁노을 그리운 하늘 위로 나부끼는 한 조각 구름 나를 부르는 짓궂은 손짓 따라 기웃거리며 찾고 있었네 조바심하는 가슴으로 정겨운 이름 애태워 불러보지만 배추흰나비 꽃술에 몸을 숨기듯 한 타래 바람 속에 숨었나 무작정 여기저기 쏘다니면 그 어느 골목에서 만나게 될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 거기 없어요? 손들고 빨리빨리 나와요!’ 소리쳐 보고, 눈감으면 밟히는 얼굴 배고픈 저녁연기나 안개 같아서 사랑이 눈뜰 때를 기다려 머리카락 감추고 시치미를 떼다가 빨리빨리 나와요. 소리칠 필요 없어요 어느 길목에 숨었다가 내 마음 알아차리고 내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들어 나를 향해 손짓하는 꽃이여, 별이여 비로소 애태우던 날이 가고 너와 내가 하나의 생명이 되어 아무도 모르게 지금 여기까지 사랑은.. 2020. 1. 2.
(시) 올빼미 / 남상학 (시) 올빼미 남상학 눈을 뜨고 있어도 밝은 태양 아래 내 탐욕스런 모습을 보지 못한다 어둠이 내릴 때 비로소 확대되는 시야 햇빛에 숨고, 달빛에 숨고, 별빛에 따라 숨고, 언제부터인가 내 눈은 어둠 속에서만 눈 뜨는 올빼미가 되었다. 2020. 1. 2.
(시) 살아가는 이유 / 남상학 (시) 살아가는 이유 남상학 내가 아직 눈 내리는 창가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대를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둔 밤 가난한 등불 하나 내다 걸고 심지를 돋우고 있는 것은 그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찬 바람 눈길 속으로 눈물 흘리는 밤은 깊어 곤한 잠을 깨우며 서글픈 노래 부르는 까닭은 칠흑 같은 어둠을 몰아내는 피 흘리는 겟세마네 그 새벽길의 뜨거운 기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바람 부는 겨울 벌판에서 그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직 서쪽 동산마루에 타다 남은 찬란한 노을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2020. 1. 2.
(시) 바닷가에서 / 남상학 (시) 바닷가에서 남상학 바닷가에 서면 작은 섬마을 내 고향이 그립다 소라껍데기 같은 귓가에 잔잔한 파도를 타고 오는 섬마을 학교의 풍금 소리 햇빛 따가운 모래밭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의 고함소리 들린다. 피부가 까맣게 그을린 낯익은 얼굴도 보인다 사리 만조가 되어 선창 한 구석에 엎드린 폐선이 물 위에 두둥실 뜨고, 지상에 속한 육신의 허망함이 빠른 물살에 쓸려나간다 저마다의 타향에서 황망히 살아가는 우리 그리운 고향으로 출항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아, 그 모두와 결별하고 이제는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 아닌가? 바닷가에 서서 말없이 물살이 흐르듯 세월의 한때가 또 허망하게 사라짐을 본다. 2020. 1. 2.
(시) 내가 바라보는 섬 / 남상학 (시) 내가 바라보는 섬 남상학 내가 바라보는 섬은 저만치서 속절없이 애태우던 내 어릴 적 소녀처럼 이내 눈 앞에서 가뭇없이 사라진다 개펄에 내린 닻줄 거두고 노 저어 깃발을 나부끼며 노래 부르며 춤추듯 출렁이는 바다를 달려가도 서로의 거리를 좀처럼 좁힐 수가 없다 입을 벌리고 떼 지어 오는 파도에 삼켜 때로는 어둠 속에 묻히고 심한 역풍에 떠밀려 암초에 부딪히며 날들 살아 있는 날은 가물거리는 한 점 섬에 시선을 묶어 두고 끈질긴 근육질의 팔로 노 저어 갈밖에 오늘도 내가 바라보는 섬은 손짓해 나를 부르며 숨바꼭질하듯 파도 뒤에 숨는다. 2020. 1. 1.
(시) 용화 해변 / 남상학 (시) 용화 해변 남상학 무엇이 나를 이끄는 것일까 아늑한 포구 칭얼거리는 어린 것을 달래는 그 엄마 품인가 가슴을 열면 둥근 해가 솟는 곳 곱게 빗어 내린 머릿결 같은 잔잔한 미소 그 상큼한 바람인가 꿈 많은 시절 나를 바다로 불러내던 이름 귀여운 소녀의 옥으로 다듬은 그 정겨운 소리 들린다 어젯밤 꿈속에서 달아나며 부둣가 뱃전에 숨어 애태우더니 웬일일까, 무심한 한나절 무덥고 답답한 머리맡에 낭랑한 전화의 발신음으로 나를 들뜨게 하는 것은 푸른 해변을 따라 이글거리는 사랑 붉은 해당화 꽃잎으로 피고 지는 푸른 가슴 추억의 용화리 파도가 손짓하여 부르는 언덕길 굽이굽이 설레며 오래오래 나를 걸어가게 하는가. 2020. 1. 1.
(시) 풀꽃 / 남상학 (시) 풀꽃 남상학 풀더미 속에 숨어 핀 예쁜 풀꽃 하나 가슴에 있어 앉고 서는 곳 어디서나 먼 발치 지켜보는 눈길이 있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손에 잡히지는 않아도 철없는 젊은 날 허둥거리는 나에게 내일을 기약하는 별빛이 되고 해 지는 저문 날 터벅터벅 혼자 걷는 밤길에도 흔들리지 않게 어둠 속에 두렵지 않게 앞길 밝히는 한 줌 넉넉한 하얀 달빛이 되네 2020. 1. 1.
(시) 거듭나기 / 남상학 (시) 거듭나기 남상학 내가 몸을 낮춰 엎드리면 당신은 내게로 와 손을 내민다 내가 은밀히 당신을 부르면 당신은 내 어둠의 골방에 찾아와 환한 불을 켠다 부르면 빛이 되는 존재의 끝, 당신의 환한 불꽃 속에서 오늘 밤 나는 새롭게 태어난다. 2020. 1. 1.
(시) 갈매기 / 남상학 (시) 갈매기 남상학 그대 육신은 얼마만큼 가벼워질 수 있는가 푸른 하늘 자락을 잡을 듯 솟구치는 비상연습 그리운 이의 형상 그 영원의 끝을 만지고 싶어 가파른 벼랑으로 무수히 뜨는 사랑의 날갯짓 바다 위에 무서운 바람 불고 천둥 번개 치는 날에는 그리운 이의 안부가 걱정스럽다 순간, 비보를 예견하듯 서둘러 뜨는 그의 날개는 멈출 수가 없다 날으는 허공, 긴장 아, 날으는 것의 한계 춤추는 세월의 반복 그리워할수록 수척해지는 몸 가슴 조이며 애태우는 그대 영혼은 얼마만큼 가벼운 날개를 달 것인가? 2020. 1. 1.
(시) 산행 / 남상학 (시) 산행 남상학 몇십 년을 걸어도 그대 향한 나의 산행은 끝이 없다. 주저앉은 산등은 태고(太古), 천 근 무게로 돌아앉아 소리쳐 불러도 대답이 없다. 가쁜 숨결을 몰아쉬며 오르는 길 고개를 넘으면 더 세찬 바람 소리 헐벗은 나뭇가지가 울고 서 있다 인적이 뜸한 골짜기엔 미궁의 암호만이 가득하고 더 큰 소리로 부르면 더 큰 소리로 돌아오는 메아리 하늘과 맞닿은 자리 언덕에 누워 바라보는 산정은 구름만이 잠시 머물 뿐 전설이 숨 쉬는 고성 같아 이따금 산허리를 끼고 날아가는 철새의 울음소리 들으며 망연한 모습으로 우러르면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그 환청(幻聽)에 놀란다. 2020. 1. 1.
(시) 땅끝마을에 서서 / 남상학 (시) 땅끝마을에 서서 남상학 이제는 마음을 놓아야지 얼마나 숨 가쁘게 달려왔는지 구두끈에 달린 먼지 털어내고 이제는 수평선 뒤로 숨어야지 삶이란 결국 돌아보면 잠시 잠깐 떡갈나무 잎에 스치는 바람 한 점 무게도 못 되는 것 가벼운 흔적으로 남았다가 이내 스러지는 한 줄기 포말 떠오르는 얼굴과 이름들 모든 것 일체를 물결에 띄워 보내고 구름을 탄 듯 가볍게 미련의 닻줄을 풀고 자유의 물살 가르며 떠나야지 멀리 하늘과 맞닿은 자리 그 끝으로 이어지는 몇 개 섬을 건너 누군가 부르는 손짓 따라 영혼의 고향으로 가고 싶어 편히 쉴 나라로 가고 싶어 부푼 기대와 갈망으로 경건히 두 손 모으고, 마음으로 내닫는 영원의 바다로 이제는 떠나야지. 2020. 1. 1.
(시) 오두산전망대에서 / 남상학 오두산전망대에서 - 남상학 길게 뻗은 철조망 너머 검푸르게 흐르는 녹슨 세월 우거진 갈대숲은 울고 있구나 강과 강은 흘러 하나로 이어지고 하염없는 시간을 청둥오리 떼 텅 빈 벌판을 날아갔다가 되돌아오고, 만조가 되면 돌아온다던 약속 믿고 다시 찾아와 마디마디 슬픔을 깨무는 칠순의 어머니 갈갈이 찢긴 산허리 돌아갈 수 없는 강가에서 기어이 그 날은 오리라 목 메인 채 해 지는 저녁노을 꿈속에서도 부둥켜안고 불러보는 너의 이름 오두산 강기슭에 길게 뻗은 철조망 너머 우거진 갈대숲은 울고 있구나. 2020. 1. 1.
(시) 환희 / 남상학 (시) 환희 남상학 천지가 진달래 꽃불로 타는 사월의 아침이었네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 나와 천둥 번개 치듯 꽝, 콰앙 사정없이 부서져 흩어지는 그 눈부신 광채였네 더 이상의 침묵을 거부하고 쏟아지는 빛 속에서 안으로 충동질하는 가슴 진한 생명의 진액이 흐르는 살아 있음이 눈물겨운 벅찬 감격이었네 날개에 깃털을 달아 하늘로 띄우는 푸른 노래 진달래꽃 질펀한 산자락에 앉아 열린 하늘을 향하여 부끄럼 없이 우러르는 최상의 빛나는 노래였네 2020. 1. 1.
(시) 탕자탄(蕩子嘆) / 남상학 (시) 탕자탄(蕩子嘆) 남상학 내 길은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었네 가쁜 숨을 헐떡이며 살아온 한낮의 대낮은 뙤약볕 벌판 험하고 신산한 유형의 길이었네 충만한 허기, 목 타는 갈증으로 백기 들고 돌아오는 황량한 저녁 잿빛 일몰의 하늘은 피를 토하는 강물이었네 광기가 넘실거리는 거리 타관의 불빛 아래 목숨을 탕진하고 축 처진 어깨로 돌아오는 비틀거리며 걷는 길 돌밭 가시밭에 온몸 찢기고 천둥 번개에 넘어지고 쓰러지고 안개 낀 새벽은 게슴츠레 눈 뜨는 산 돌아앉은 그 산은 불러도 대답 없는 침묵이었네. 광기가 넘실거리는 거리 타관의 불빛 아래 목숨을 탕진하고 축 처진 어깨, 상처 난 몸에 영혼의 누더기 하나 걸치고 돌아오는 칠흑의 밤 어둠 속에 갈 곳 몰라 허공을 향해 손을 저어도 잡히는 것 하나 없는 절망이었네 2020. 1. 1.
(시) 촛불 앞에 앉아 (시) 촛불 앞에 앉아 남상학 창가에 비가 내린다 빗방울은 방울끼리 저마다 눈을 씻고 죄를 뉘우치는 참담함으로 설레임으로 비에 젖는 밤. 불면 꺼질 듯 어지럽게 피워 올리는 가녀린 촛불은 어둠 속에 춤추다 시나브로 사위고 졸음처럼 긴 눈썹에 서러움이 묻어온다. 우주의 끝 어느 모서리에 빛나던 별이 질척거리는 어둠 속으로 제 몸을 감추고 대지가 삽시간에 침몰할 때 뼛속으로 축축이 젖어 드는 슬픔 싸늘한 벽을 맴돌다 돌아오는 나의 노래 따스한 온기 그리워 마지막 영혼의 불꽃을 밝히고 흔들리는 촛불 앞에 앉아 무릎 꿇는 애곡(哀哭)의 밤이 가면 어느 날 내 알몸이 다 타버려서 아픔도 슬픔도 사라질까 언젠가 당신이 찾아와 앉을 그 자리에 깔깔한 입맛처럼 새벽이 밝아올 때 붉은 살점 같은 장미 몇 송이 들고 눈 .. 2020.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