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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자작시(自作詩)307

(시) 살아 있는 날은 / 남상학 시(詩) 살아 있는 날은 -남상학 살아 있는 날은 긴 방황을 끝내고 유순한 영혼으로 돌아와 당신의 문 앞에 서겠습니다 하늘 높이 두 손을 받쳐들고 정결한 몸짓으로 여는 나의 하루 아침 햇살 퍼지는 당신의 창가에서 나팔꽃처럼 피겠습니다 그리고 한낮에는 하늘 높이 솟는 새가 되어 그리움에 초조한 눈길 거두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 혼(魂)에 불을 놓아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이윽고 날이 저물면 먼저 떠난 이들의 이름 부르며 지는 해의 아름다움처럼 당신 손안에 아주 깊이 잠들고 싶습니다. 2020. 1. 28.
(시) 아침에 쓰는 시 / 남상학 아침에 쓰는 시 - 남상학 아침 이슬로 닦은 맑고 깨끗한 언어로 한 편의 글을 쓰겠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말로 물 같은 그리움을 담아 향내 나는 노래를 짓겠습니다. 늘 황홀한 은총을 햇빛처럼 실감하듯 기도의 창을 열고 소망의 편지를 띄우겠습니다. 물방울 같은 염원 하늘에 튀기며 부서지는 햇살의 꽃가루 모아 나팔꽃 한 송이 곱게 피우겠습니다. 그리고 내 작고 신선한 뜨락에 말없이 엎드린 산처럼 명상(冥想)의 그늘을 짙게 드리우겠습니다. 2020. 1. 27.
(시) 일로향실(一爐香室)에서 / 남상학 시(詩) 일로향실(一爐香室)*에서 - 남상학 강화군 화도면 상방리 마을 환경 운동가 이용학 선생이 경권다로(經卷茶爐)라 이름한 옛집 세월의 무게를 지닌 각종 잡동사니 끌어모아 고집스레 손때 입혀 앉힌 남다른 안목이 예사롭지 않아 대나무, 맥문동, 머루 덩굴까지 좁은 뜰에 아우른 멋이며 일로향실(一爐香室)을 별당으로 차려놓고 휴천정(休天亭), 관수정(觀水亭)을 끼고 앉아 청산유수 벗 삼는 유유자적이 사뭇 부럽다. 풍류 읊조리는 옛 시인은 아니어도 일로향실에 젊잖게 앉아 은은한 다향에 취해 눈 감고 있으려니 문득 눈을 부릅뜬 옛 선비가 담뱃대 들고 호통치며 가볍게 촐랑대는 나를 사정없이 꾸짖는다. *강화 화도면에 고가(古家)를 고풍스럽게 꾸며놓고 붙인 이름. ‘일로향실(一爐香室)’은 본래 초의선사의 거주지 .. 2020. 1. 27.
(시) 태즈매이니아의 기억 / 남상학 (사진 : 맨 우측이 앤드류) 시(詩) 태즈매이니아의 기억 - 앤드류에게* - 남상학 지구 남반부 태즈메이니아의 하늘 드넓은 들판에 늘어선 파인 트리처럼 싱그럽던 친구여 진지한 너의 눈망울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지! 데본 포트에서 호바트까지 버스로 네 시간 내셔널파크로부터 뷰티 포인를 거쳐 산과 강 어우러진 아름다운 론세스톤 마을 로스 베어에서의 그 진한 포도 향에 흠뻑 취한 탓이었을까 그 저녁, 고즈넉한 호바트 항구 빅토리아 독에 어스름 내릴 때 시끌벅적한 뮤러스 어퍼 데크에서 ‘이런 푸짐한 시푸드는 처음’이라 능청 떨며 처음 만난 코리안 젊은이들과 한마음으로 어울렸었지. 빠비용 죄수들의 유형지 포트 아서를 돌아보고 와서 비 내리는 살라망카 시장 거리와 넬슨 전망대, 배터리 포인트를 누빌.. 2020. 1. 27.
(시) 눈꽃을 기다리며 / 남상학 시(詩) 눈꽃을 기다리며 남상학 "오전에 짙은 안개 끼는 곳이 많겠다. 대기가 매우 건조하니, 화재 예방에 유의하기 바람 해상에 짙은 안개 끼는 곳 많겠으니 선박 주의 요망 아침 기온 영하 2도∼영상 11도 낮 기온 13도∼22도" 짙은 안개 속에 잠겨 온종일 자동차 추돌 사태 여객기 회항 소식이 저녁 텔레비전 뉴스 시간을 장식했다. 안개 속에 웬 화재까지 오늘이 입동과 대설 사이 절기인데 눈 소식 없는 소설(小雪) 가파른 세상살이 내 가슴엔 언제쯤 환한 눈꽃이 필까? 2020. 1. 27.
(시) 바위에 대한 단상 / 남상학 시(詩) 바위에 대한 단상 남상학 두고 봐라, 언젠가는 제 몸 산산이 깨어질 날 있으리라. 천둥 번개 몰아쳐도 제 자리 꿈쩍하지 않고 폭풍우 세차게 몰아쳐도 입 다문 철저한 침묵이지만 천년 묵은 천둥 번개로 목놓아 통곡하는 날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잃을 것도 없이 언젠가는 제 몸 무참히 깨어져 가릴 것 없는 알몸 되리 두고 봐라, 고집스런 바위여! 2020. 1. 27.
(시) 장성에서 보내온 단감 / 남상학 시(詩) 장성에서 보내온 단감 남상학 저녁 식탁 위에 장성 사돈댁에서 보내온 튼실한 단감 빛깔도 그렇지만 입 안 가득 스미는 단맛이 진한 수액(樹液)처럼 한 편의 시(詩)로 살아오네. 먼 거리 택배 차에 실려 고속버스로 질주하여 따뜻한 정 일깨우는 과육(果肉)에 배인 사랑의 무게 문안 한번 제대로 못 여쭙는 내 혈관 깊숙이 따스한 온정으로 살아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네. 2020. 1. 27.
(시) 이런 사랑 하나 있다면 / 남상학 시(詩) 이런 사랑 하나 있다면 남상학 늦은 저녁 끝없이 달리던 제어장치를 풀고 두 산이 마주 의지하여 기대어 앉은 해어름 세상 고단한 무거운 짐 낮은 무릎에 죄다 내려놓고 허전한 가슴에 작은 모닥불 되어 따스한 사랑을 활활 지필 수 있다면 두 산이 마침내 애틋하게 물든 가슴에 꽃사태로 무너지고 그리움으로 자라난 긴 꽃술 흔들며 가슴이 화들짝 얼얼하여 열어놓은 가슴으로 빛 맑은 바람 스스럼없이 마주 설 수 있는 이런 사랑 하나 있다면 2020. 1. 27.
(시) 어느 세모(歲暮) / 남상학 시(詩) 어느 세모(歲暮) - 서울 타워에서 남상학 남산 서울 타워 회전 식당에 앉으니 현기증이 절로 난다. 탁한 시야가 부서지는 햇빛에 망가져 혼비백산 63빌딩 뒤로 저무는 일몰이 어수선한 한 해의 커튼을 내린다. 긴 여행의 피곤한 몸 이끌고 이 현기증 나는 공간에서 자꾸 가라앉지 않도록 나를 일으켜 세울 그 누군가를 소리 높여 부르고 싶다 처음 사랑을 고백하는 그 떨림으로 간절함으로. 2020. 1. 27.
(시) 그녀의 편지 / 남상학 그녀의 편지 - 남상학 새벽 산책길을 단숨에 달려와서 가슴에 덥석 안기기도 하고 하얀 눈물 꽃 피우면서 머리가 빠져 성긴 내 이마 위에 눈발을 날리기도 하고 느닷없이 찾아와서 무방비로 열어둔 내 가슴에 투정의 화살을 쏘아대기도 하고 변덕 심한 날에는 꽃 한 송이 입에 물고 깔, 깔, 깔 소리내어 웃다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어젯밤 겨울비 죽죽 내리고 기온이 급강하한 오늘 영하(零下)의 아침 그녀는 또 어떤 편지를 보내올까? 2020. 1. 27.
(시) 겁쟁이 -명동에서 / 남상학 시(詩) 겁쟁이 -명동에서 - 남상학 문명의 밀림 지대 서울 명동 가까이 살면서도 그 숲속에 한 번도 깊숙이 들어가 보지 못했다. 하늘을 덮고 있는 밀림의 숲, 그 푸른 숲속의 꿈 꾸는 새가 되어 창공으로 높이 높이 날아오르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숲 그늘, 그 깊은 안식의 잠 속에 길게 누워 본 적도 없다. 또 밤마다 밀림의 숲속에서 참나무 숯불처럼 활활 타오르거나, 보랏빛 사랑 애절한 그 누구의 이름을 가슴 아리게 불러본 적도 없고, 더구나 젊음을 노래하는 밤하늘의 축포가 되어 축제의 밤을 밝히며 찬란하게 타오른 적도 없다. 밀림의 숲, 그 옆으로 난 호젓한 오솔길 나뭇가지를 스치며 그냥 휙 지나가 버리는 겁쟁이 바람으로 나는 오늘도 명동길을 걸었다. 2020. 1. 26.
(시) 사랑의 일기예보 / 남상학 시(詩) 사랑의 일기예보 - 남상학 까마귀 떼 까맣게 몰려와 하늘 덮고 지상에 무차별로 실탄을 퍼붓고 있다 어둠 휩싸인 들판은 집중호우로 지척이 천 리인지 호우주의보가 순간 호우경보로 바뀌더니 천둥소리, 번개의 섬광(閃光)이 번쩍 전신주 하나가 길옆으로 길게 누웠다 하천이 범람하여 무너지고 시뻘건 흙탕물이 솟구쳐 넘어간 아침 산에서 뻐꾹 뻐꾸욱 뻐꾹새 우는 소리 사정없이 구멍 난 가슴에 언제쯤 아침햇살로 피어날까? 내 사랑은 2020. 1. 26.
(시) 양재천의 아침 / 남상학 양재천의 아침 - 남상학 지난밤 잠자리 아름다운 꿈들이 모여 풀잎 영롱한 이슬에 빛 고운 하늘이 걸린다. 크고 작은 아픔 안고 자신의 무게를 지고 걷는 발길을 풀잎마다 매달린 이슬로 말끔히 씻어내는 시간 줄줄이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푸른 숲 위로 까치들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수줍게 피어난 나팔꽃이 손을 흔든다. 화사한 꽃방울마다 고운 빛깔로 눈부신 햇살 아래 상큼한 미소를 건네는 아침 양재천 아침 산책길은 언제나 눈부시다. 2020. 1. 25.
(시) 그런 것 어디 없을까? / 남상학 시(詩) 그런 것 어디 없을까? 남상학 오색에서 오르는 주전골 골짜기에 늘어선 하늘벽 사이 세상 오만 꾸짖는 당당한 기세로 사정없이 장대비 쏟던 날 폭포를 향해 오르는 늦은 산길에서 불어난 개울물이 대지를 훑어내듯 용솟음치며 먼지와 때 훌훌 씻어내는 그런 것 어디 없을까? 낯선 땅 아소산(阿蘇山) 정상의 자욱한 안개를 일순에 걷어내고 아소에서 벳푸로 달리는 열차에서 키 재며 하늘로 솟은 청청한 삼나무 숲 위로 떠 오른 쌍무지개를 바라보듯 벅찬 가슴 꿈으로 일렁이는 그런 것 어디 없을까? 2020. 1. 25.
(시) 감포 밤바다 / 남상학 감포 밤바다 - 남상학 겨울 밤바다는 거대한 무대였다. 멀리 어둠의 수평선 끝에 낡은 조명 하나 덜 꺼진 채 텅 빈 무대를 지키고 있다. 하늘이 밝아지면서 수줍은 밤 고양이처럼 몰래 보름달이 떴다. 가슴이 서늘하리만치 창백한 빛 파도와 바람에 따라 표정이 바뀌는데도 바다와 달은 완전히 식어 있었다 순간 파도가 덮치듯 신열(身熱)이 올라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 그래, 이게 겨울 바다야. 2020. 1. 25.
(시) 소래포구 / 남상학 시(詩) 소래포구 - 남상학 새벽을 깨우며 먼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에 실려 사리 때 밀물처럼 다가오는 통통배의 기관음 소리 울리면 갯골 따라 요란한 갈매기 소리가 덤으로 올라오고 왁자지껄한 소리에 청정한 빛으로 눈을 뜨는 땅 포구의 아침 햇살이 금빛 번쩍이는 비늘을 세우면 시끌벅적 노역(勞役)을 건져 올리는 아낙의 함지박엔 순간 펄펄 뛰는 숭어와 각(角)을 세우고 덤벼드는 꽃게들이 저마다 향연을 베푼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삶을 흥정하는 근육질 사내의 건장한 가슴에 흥건히 비릿한 단내가 풍기는데 어느덧 포구의 식탁 위에 벌어지는 왕성한 식욕처럼 소래 포구는 언제나 힘찬 의욕이 솟구친다. 2020. 1. 25.
(시) 신두리 사구 / 남상학 시(詩) 신두리 사구 남상학 넘실거리는 물결이 끊임없이 달려와 바다의 잔등에 선명한 연흔(連痕)을 새기는 창조의 땅 하룻밤 사이에도 질탕질하는 바람이 제멋대로 역사를 흔적 없이 지우기도 하고 중무장한 세력으로 집중 공략하기도 하면서 광활한 땅에 제 스스로 풍진(風塵) 켜켜이 선명한 흔적을 남기는 무한 시간의 끝 오늘도 신두리 사구(砂丘)는 잠들지 않고 쉬임 없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다. *신두리 사구는 태안반도 위쪽에 있는 세계 최대의 해안 사구로 '한국의 사막'으로 불리기도 한다. 2020. 1. 25.
(시) 서어나무의 꿈 / 남상학 서어나무의 꿈 - 영흥도 십리포 남상학 척박한 땅에 뿌리 박고 매서운 칼바람을 가로막아 뒤틀린 생명이거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저 모진 근육질의 인내(忍耐)를 나는 이제 사랑해야 하리 지난날 내 아픈 유년의 기억을 바람막이로 둘러치고 옹이 진 마디마디에서 꿈틀대는 비명을 탁, 탁, 이제는 힘찬 용솟음으로 솟구쳐야 하리 억센 줄기 가지마다 무성한 잎이 그늘을 드리우고 아련한 물길이 찾아들어 하얀 모래벌판에 깔리는 웃음소리 저녁 햇살 눈 부실 때 서어나무 숲 그늘에 자장가를 부르는 어미처럼 앉자 은비늘 물길 가르며 돌아올 만선(滿船)의 배 한 척 기다려야 하리. 2020. 1. 25.
(시) 만리포 추억 / 남상학 시(詩) 만리포 추억 - 겨울 만리포에서 남상학 어느 이른 겨울 만리포 바닷가에 갔었지 이따금 애잔한 갈매기 울음소리 차가운 바람에 묻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단절음으로 끊기고 파도는 일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저물도록 부드러운 손길로 결 고운 가슴을 토닥거릴 때 뜨거운 태양 아래서 솟구치는 욕망으로 가쁘게 헐떡이던 그 모습 간데없고 입 안 가득 어리는 비릿한 내음 텅 빈 모래사장 위로 길게 버려진 추억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하얀 슬픔으로 빛나고 붉은 낙조가 그리움에 잠긴 바다를 하염없이 빗질하고 있는데 바닷새는 왜 그리 슬피 울어 쌓던지. 2020. 1. 24.
(시) 외도 동백꽃 / 남상학 시(詩) 외도 동백꽃 남상학 푸른 물에 발 담그고 누군가 하염없이 기다리는 외딴 섬 하나 가지마다 시원한 바람의 숨결과 파도의 변주곡으로 빚어진 진홍(眞紅) 빛 푸른 나무숲 사이 동박새 한 마리가 빠알간 입술에 욕망을 문지르다가 화들짝 놀라 달아나는데 어느새 내 얼굴이 동백꽃처럼 붉게 물들었는가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거제도 옆에 떠 있는 작은 섬. 해상낙원이라 일컬어지는 섬으로 동백꽃이 지천이다. 2020. 1. 24.
(시) 경포 일몰 / 남상학 경포의 일몰 -카리브에서* 남상학 그 가을 경포 일몰의 바다와 바다에 연한 카리브는 고즈넉했다. 통유리창을 가로질러 유유히 날아가던 패러 글라이더의 형체가 땅거미 내리는 어둠에 묻히고 외로움의 살점 뱉어내는 아련한 갈매기 울음 어둠이 짙어가던 카리브 창가 샹들리에 휘황한 불이 켜지면 한 모금씩 오순도순 나누는 이야기가 아이리시 커피의 온기만큼 그림내의 정담으로 무르익었다. 그날 멀리 밤바다 너머로 선명하게 살아나는 집어등(集魚燈) 불빛 아래 말미잘처럼 피어나던 우리들의 사랑 그 가을 경포는 어찌 그리 아름답던지. *'카리브'는 경포해변에 있는 현대호텔 카페 2020. 1. 24.
(시) 대천에서 띄우는 편지 / 남상학 대천에서 띄우는 편지 남상학 그대는 내게 가슴 한편으로 저며오는 전율을 아느냐고 귓속말로 물었지요? 그리움 가슴에 묻고 영원히 살아갈 줄 알았는데 세월의 물굽이 넘고 또 넘어 가슴 열어 그 사랑 보여줄 수 있다는 감격으로 수천수만 굽이 넘실거리는 몸짓으로 그대는 전신을 떨었지요. 마음은 항상 바다를 거닐고 파도 소리 그리워 소라껍데기 귀에 대고 있는 그대 그대 들뜬 몸은 지금도 출렁이는 파도와 뒹굴며 사랑을 한창 부화 중인가요? 2020. 1. 24.
(시) 갯벌·2 / 남상학 시(詩) 갯벌·2 - 남상학 그리움의 넓이로 갯벌이 벌렁 누웠다. 물길 아득히 달아난 벌판의 끝자락 수평선 그 너머 하늘까지 부끄럼 모르는 알몸으로 보란 듯이 그렇게 지평(地平)을 넓힌 가슴 하늘과 바다가 한 몸으로 뒤섞여 몸 푸는 물결의 속살을 훔쳐도 보고 오랜 세월 가슴 앓으며 몸속에 품어 온 빛나는 진주를 만져도 보고 빈 하늘에 아련한 꿈 하나 높이 걸어 놓고 낮달 같은 사랑을 조개 속 깊이 키우면서 질펀한 가슴으로 누워 싱그런 오월 하늘에 쉴 새 없이 물줄기를 뿜어 올린다. 목마른 갈증으로 그리움으로. 2020. 1. 24.
(시) 새벽바다 -무의도 / 남상학 시(詩) 새벽 바다 -무의도(舞衣島) 남상학 새벽 잠 떨치고 나지막한 산정에 오르니 걷히는 안개 속에서 바다는 부끄러운 듯 조심스럽게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가슴을 풀어헤친다. 그 품 사이로 엄마 품에서 곤히 잠자던 크고 작은 섬들이 멀리 가까이 하나씩 눈을 뜬다. 하얀 입술로 부드럽게 수면을 핥으며 온몸으로 시를 읊는 바다 위로 어디선가 간간이 혼(魂)을 불러내는 뱃고동 소리 아직도 사위지 않은 그리움의 몸짓 남아서 누군가 이 섬을 춤추는 무녀의 옷깃이라 이름했던가? 새벽 바다 앞에서 내 지병(持病) 도지게 하는 저 파도는 나를 또 어디로 떠밀고 있는 것일까? 2020. 1. 24.
(시) 성산포의 봄 / 남상학 성산포의 봄 - 남상학 성산포 앞바다에 서 본 사람은 알리라 봄이 무슨 옷을 입고 오시는지 먼발치에서 몸 푼 바다는 엄마 품에 안겨 투정하다가 한 무더기 바람을 끌고 와서 검은 바위에 머리를 들이대고 서서히 어둠을 풀어낸다. 초록띠 둘러친 봄 언덕 어린 처녀애들 옷섶에 숨어든 보남파초 무지갯빛 꿈으로 단장한 저 상긋한 향기를 보라 바람에 쏠리는 현란한 비단 물결은 여린 새순의 피리 소리 하늘과 바다, 온 천지 생기 어린 청혈(淸血)이 돌아 갈맷빛 옷을 입은 한 사내가 결 고운 강물로 번지는 아련한 꿈을 조심스런 손길로 아주 천천히 연주한다. 성산포 앞바다에 서 본 사람은 알리라 봄이 무슨 음악을 켜고 오시는지 2020. 1. 23.
(시) 속초 밤바다 / 남상학 속초 밤바다 - 남상학 눈을 부릅뜨고 밤새워 정염(情炎)을 불태우는 불꽃 설레이는 바닷속 숨결과 욕망을 뒤섞으며 사그라지지 않는 불꽃은 먼 옛적 들었던 동화책 토끼의 간처럼 붉다. 뜬눈으로 지새운 건장한 어부의 욕망은 지금쯤 토끼 화상(畵像)을 그리는 화공의 금수추파 거북연적* 오징어로 먹 갈리는 대목 수궁가 노랫가락에 취해 있을까? 어둠의 바다를 점령하고 명멸(明滅)하는 저 진홍빛 사랑 열병하듯 출렁이는 불꽃은 바다의 아픈 꿈이다. *‘금수추파(錦水秋波) 거북연적(硯滴)’은 수궁가에서 화공을 불러들여 토끼 화상을 그리는 대목에 등장하는 말로 “비단처럼 고운 아름다운 물결을 담은 거북 모양의 먹물 그릇”이란 뜻 2020. 1. 23.
(시) 겨울 청량산 / 남상학 겨울 청량산 남상학 골 깊고 산 높은 청량산에 오르니 귀가 맑게 트인다 정신을 깨우듯 고목의 뼈 사이로 덜컹거리며 빈 수레 지나가고 철통같이 스크럼을 짠 봉우리와 순은으로 빛나는 계곡엔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沈默) 마른 가지 사이 서성거리며 떨고 있는 유리 조각 같은 칼바람 소리에 나는 시린 영혼을 씻어낸다. 가장 소중한 것은 얼음 속에서 빛나는 것이라고 겨울 청량산이 오늘 내게 이른다. *청량산은 경북 봉화에 있는 산으로 청량사 뒤쪽으로 열두 암봉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2020. 1. 23.
(시) 희방사역에서 / 남상학 희방사역에서 - 남상학 가을 들녘을 가로 질러 덜컹거리는 기차가 목쉰 소리 내며 닿은 곳 진홍빛으로 익어가던 감나무가 오늘 초로의 노인을 손님처럼 맞는다 굽이진 모퉁이 산기슭 돌고 돌아 지나온 터널은 또 몇 개 숨찬 소리 내지르며 당도할 기차를 기다리며 끝이 보이지 않는 레일을 따라 추억을 말리는 가을 볕살 어디론가 떠난 낯익은 얼굴들이 감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열리고 기차가 달려올 방향으로 목을 길게 늘이는 동안 높은 가을 하늘에 감은 더욱더 붉게 익는다. 2020. 1. 23.
(시) 월정사 가는 길 / 남상학 시(詩) 월정사 가는 길 - 남상학 사열하듯 푸른 군복의 사나이들이 당당한 기세로 두 줄로 직립보행을 하고 한 떼의 요란한 매미 소리가 한낮의 반역을 일으켜 세우며 온종일 여름 소나기를 퍼붓는다 숨을 헐떡이며 가쁘게 걷는 발길에 청아한 독경 소리 밟힐 즈음 계곡 사이로 헤집고 오르는 바람의 성대(聲帶)가 살랑거리며 힘겨운 업보를 시원스레 풀어내듯 속진(俗塵)을 말끔히 털어낸다. 귀 씻지 않아도 폭포처럼 귓가에 물소리 출렁이면 전나무 숲속을 걸어가는 내 발길이 어느새 날개를 단다. 2020. 1. 23.
(시) 목탁새 / 남상학 시(詩) 목탁새 -수락산 계곡에서 남상학 초록 물감 짙게 풀어내는 여름 산 둔탁한 목탁소리가 석림사 천불상 주변의 자욱한 안개 걷으며 계곡을 따라 올라가고 간밤 장대비 거칠게 쏟아져 불어난 물줄기 찬바람 일으키며 사정없이 계곡의 바위를 두드릴 때 산뜻하게 머리 감은 굴참나무 숲에서 가는 비 맞으며 제 중심을 파내는 목탁새가 딱딱 딱따르르르르 … 숲의 아집(我執)을 한사코 밀어내고 소강상태였던 숲에 장대비 다시 내리는데 깃을 치며 천년 슬픔 삼키는 울음 딱딱 딱따르르르르 … 목탁소리, 물소리와 함께 사정없이 둔탁한 계곡을 깨운다. 2020.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