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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68

남이섬에서의 알몸 불고기 파티 남이섬에서의 알몸 불고기 파티 긴 장맛비에 낭만의 꿈은 사라지고··· 글 · 남상학 1972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방학 중이라 해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방과 후 학교처럼 보충수업이 있을 때였다. 찌는 듯한 더위, 냉방 시설도 없는 교실에서 50여 명의 학생들과 수업을 한다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이 때 기발한 발상을 하기로 정평이 난, 같은 교과의 김희보 선생이 나에게 제의를 해왔다. 보충수업이 끝나는 날, 남이섬으로 단 둘이 낭만 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모든 준비는 자신이 다 하겠다는 것이다. 마침 보름날이고 하니 달 밝은 밤, 남이섬의 푸른 잔디밭에 앉아 숯불에 불고기를 구우며 파티를 하자는 제법 낭만적(?)인 계획이었다. 나는 여름 더위에 지친 피로도 풀 겸 멋진 하룻밤의 낭만을 연상하며 흔.. 2011. 7. 13.
미주 LA지역, 시카고 지역,‘숭의동문회’ 순방 미주지역 ‘숭의동문회’ 순방 미주 LA지역, 시카고 지역 방문기 글 ·남상학 ▲ LA 숭의동문모임 총회를 마치고 기념 촬영 2003년 재미 숭의동문회의 초청을 받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재미 남가주숭의동창회와 시카고숭의동창회는 그 동안 미주지역동문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의미로 퇴임에 즈음하여 남가주(LA) 숭의동문회 총회에 맞춰 우리 부부를 초청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해 숭의 개교 100주년 행사에 미주지역 동창들이 대거 참가하는 것이 계획되어 있어서 아내 대신 후임 유재영 교장과 동행했다. 해외 동문과의 원활한 협력을 위해서는 후임 교장과 미리 상견례를 하는 것이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비행기 창문의 차단막을 올리니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LA공항은 미국 서해안 최대의 .. 2011. 7. 13.
이신덕 장학회 설립과 숭의 동문회 회지 '빛보라' 간행 이신덕 장학회 설립과 숭의 동문회 회지 '빛보라' 간행 글 · 남상학 숭의(崇義) 재건의 어머니요 송죽원(松竹園) 어린이의 인자한 할머니 그는 참으로 진정한 교육자요 주(主)의 신실한 종이었다. - 고 이신덕 교장 '비문' 2003년은 숭의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숭의는 구한말 개화기에 시대적 요청과 선교를 목적으로 사무엘 마펫( Samuel. A. Moffett : 한국명 마포삼열)에 의해 평양에서 세워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33)”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하여 ‘의(義)를 숭상하는 학교’라는 교명으로 출발했다. 전국 각지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신학문에 대한 향학열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제의 강점으.. 2011. 7. 13.
재직 중에 겪은 몇 가지 시련 재직 중에 겪은 몇 가지 시련 - 시련은 시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위한 연단의 기회였다. 글 · 남상학 * 윤순희 이사장으로부터 퇴임 축하패를 받는 장면 나는 33년 6개월 숭의에서 근무하는 동안 몇 차례 시련을 겪었다. 첫 번째는 1985년 3월 초 학교가 재정 사고를 일으켜 부도가 발생한 것이다. 내가 교감으로 재직할 때였다. 당시 법인 사무국장을 겸임하고 있던 송화(宋樺) 교장은 재정 위기가 발생할 것을 예감하고 사건이 터지기 전인 1984년 12월 22일부로 나를 명목상 교장 직무대리로 발령했다. 그리고 다음해 2월 28일, 교장은 나를 불러 새학년도 개학식과 입학식을 맡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이유를 물은즉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바로 그 날 나는 퇴근하면서 석.. 2011. 7. 13.
교육, 어렵지만 보석을 캐는 작업 교육, 어렵지만 보석을 캐는 작업 글 · 남상학 어딘가에서 반짝일 보석을 위하여 지불한 내 인생, 그 보석으로 하여 나는 늘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 학생대표로부터 꽃다발을 받는 장면 * 김정환의 『한국교육이야기 백 가지』라는 책에는 교직에는 네 가지 슬픔이 있다고 했다. 첫째, 전문적인 건 맞는데 전문직 대우를 받지 못한다. 둘째, 받는 돈은 겨우 집 살림을 꾸려갈 정도다. 셋째, 노력한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아 성취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넷째, 열심히 가르쳐 봐야 입신출세와는 애당초 거리가 멀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교직은 그리 선호할 직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교직을 내 적성에도 맞고, 그만큼 보람과 가치가 있는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주저하지 않고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했다... 2011. 7. 12.
숭의 36년, 교사의 길 숭의 36년, 교사의 길 글 · 남상학 몇 차례에 걸쳐 재단이 바뀌는 와중에서도 재단의 어른들은 나를 학교의 관리 경영 책임자로서 신임해 주셨다. 편협한 교단 위주의 사고가 만연된 우리의 현실에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음에도 하나님은 나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2002년 8월 나는 천직으로 여기던 교육의 길을 마감했다. 20대 후반 교사가 된지 35년 6개월만이다. 숭실고등학교에서 근무한 1년을 빼면 모두 숭의에서 지낸 시간들이었다. 교직을 선택하면서 나는 기독교 학교에서 교사의 꿈을 펼치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희망대로 미션스쿨인 숭실고등학교과 숭의여자 중고등학교에서 꿈을 펼칠 수 있게 하셨다. 교사로 첫발을 내디딘 숭실고등학교에서는 2학년 국어를 맡아 가르쳤고, 문예반 지도교사로 대천해수.. 2011. 7. 12.
‘내 탓이오’를 실천한 교육자, 전상운(全相運) 선생님 나를 키워주신 스승님 ‘내 탓이오’를 실천한 교육자, 전상운(全相運) 선생님 글 · 남상학 선생님은 일찍이 투철한 신앙을 가진 양심가로서 교육현장에서 ‘내 탓이오’ 정신을 실천한 선구적 교육자였다. 그가 보여준 행동은 가치관을 형성할 나이에 내게는 큰 사건과도 같았다. * 최근 어느 일간신문의 기사에서 따온 전상운 선생님 사진 * 고등학교 시절 나는 전상운 선생님으로부터 화학과 독일어를 배웠다. 1928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한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충주고등학교를 거쳐 제천고등학교에 부임하셨던 것이다. 그 당시 지방학교는 교사 수급에 문제가 많아서 선생님은 본래 과학(화학) 교사였지만, 독일어 교과까지 맡으셨던 것이었다. 우리 학교에 부임하신 선생님은 총각 선생님이셨고, 훤칠한 키에 시.. 2011. 7. 8.
강직과 청렴의 사표(師表), 장병환(張炳煥) 선생님 나를 키워주신 스승님 강직과 청렴의 사표(師表), 장병환(張炳煥) 선생님 글 · 남상학 특히 선생님께서는 청렴결백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몸소 실천해 오셔서 청렴과 강직한 분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인간은 만남의 연속이다. 혈연에 의하여 부모와 자식으로 만나고, 태어나서 형제와 만난다. 자라면서 친구와 만나고, 교육의 장에서 선생님을 만난다. 그리고 성장한 다음에는 평생을 같이 할 동반자를 만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만남’은 매우 중요하다. 그 만남 중에서 ‘의미 있는 만남’이 있다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공자와 안연의 만남, 예수와 베드로의 만남, 괴테와 실러의 만남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나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에 있어서도 인격과 인격의 깊은 만남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고 또 부러워한다... 2011. 7. 8.
“나 하나만이라도”의 박지견 선생님 나를 키워주신 스승님 “나 하나만이라도” 정신을 가르쳐주신 박지견(朴持堅) 선생님 글 · 남상학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수업 내용과는 상관없이 자주 “나 하나쯤이야”라는 말을 칠판에 쓰시고 역삭빠르게 살아가려는 삶의 태도를 질타하셨다. 그리고는 '나 하나만이라도' 라는 말을 그 옆에 큼직하게 써 놓으시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하셨다. * 노년의 박지견 선생님 * 누구에게나 학창시절의 추억 가운데는 잊지 못할 선생님 한 분쯤 계신다. 그분이 있어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받게 되고 추억은 더욱 빛난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박지견 선생님을 만났다. 황해도 신계 출생이시며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을 나오신 30대 중반 가까이 되셨던 선생님은 시인으로서 우리에게 국어문법을 가르치셨다. 선생님은 용모와 차.. 2011. 7. 8.
그 봄의 편지, 목련(木蓮) - 스승을 향한 제자의 편지 그 봄의 편지, 목련(木蓮) - 스승을 향한 제자의 편지 - 글 · 남상학 어느 해 봄, 나는 엽서 한 장을 받았다.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 호된 시련을 겪고 대학에 입학한 후에 보낸 것이었다. 엽서에는 단아한 글씨로 쓴 4행의 글이 전부였다.'교정 곳곳에/ 목련/ 개나리/ 진달래가 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제법 두툼한 편지의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었다. 따뜻한 바람 불어오고, 햇빛 빛나고, 목련은, 발끝으로 서서, 하늘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손을 흔들며 춤추는, 춤을 추는 무희(舞姬)와도 같습니다. 손짓을 할 때마다 흰 잎이 하나, 둘, 떨어져 쌓입니다. 가슴 미어지도록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선생님께 이 춤추는 목련의 참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보여드릴 수 있다면...... 나는 편지를 읽어 .. 2011. 7. 8.
해당화꽃, 너는 내게 불붙는 꽃이었다. 해당화꽃, 넌 내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다. 글 · 남상학 해당화 꽃에 대해 전해지는 전설이 하나 있다. 당나라 현종은 어느 날 심향정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평소에 지극히 사랑하는 양귀비를 불렀다. 이 때 양귀비는 지난밤에 마신 술이 깨지 않아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양귀비는 황제의 부름을 거역할 수 없어서 황급히 나가기는 했지만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옥같이 흰 얼굴은 불그레한 홍조가 곱게 피어 있고, 두 눈은 가느다랗게 떴고, 몇 가닥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에 나부끼는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예쁘기만 했다. 현종은 한 동안 양귀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양귀비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아직도 술에 취해 있느냐?” 그러자 양귀비는 “해당화의 잠이 아직 깨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양.. 2011. 7. 1.
경아의 지극한 정성 - 전남 해남에서 미국 산마리노까지 경아의 지극한 정성 - 전라남도 해남에서 미국 산마리노까지 글 · 남상학 ▲경아의 초청으로 방문한 헌팅턴 박물관 2005년, 내가 미국 서부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미국에 이민 가서 LA 근교 산마리노(San Marino City)에 살고 있는 경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국 도착 일정과 여행 계획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메일로 알려줬더니 다시 연락이 왔다. 일정을 하루나 이틀 정도 앞당길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고 주변 지역의 여행을 돕고 싶은데 문제는 자기의 한국 방문 일정과 공교롭게 겹친다는 것이었다. 경아는 내가 LA에 도착하는 날 아침, LA공항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내외는 당시 미국 동부.. 2011. 7. 1.
호된 죄값을 치른 제부도 여행 호된 죄값을 치른 제부도 여행 글 · 남상학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제부도로 처음 여행을 간 것은 1973년이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나는 가깝게 지내던 영어과 지승일 선생님으로부터 제부도 여행에 대한 제안을 받았다. 여름방학 보충수업이 끝나면 고3여학생 두 명과 함께 제부도로 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을 받고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성숙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들과의 사적인 여행은 누가 봐도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고, 또 괜한 일로 좋지 않은 소문이라도 퍼지면 무슨 말로 어떻게 변명을 할 것이며, 결혼한 지 몇 년 안 된 내 아내에게는 무어라 말할 것인가? 그랬더니 이들은 꼭 나를 동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학교 시절 내가 한번 담임을 한 적이 있었고,.. 2011. 6. 30.
스승의 날의 흑장미 스승의 날의 흑장미 글 ˙ 남상학 어느 해 스승의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찍 출근해 보니 흑장미 한 송이가 내 책상위에 놓여 있었다. 그 흑장미는 자태와 색깔과 향기에 있어서 다른 어느 것과 비교가 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매혹적이며 고혹적인 매력을 지녔다고나 할까? 아무튼 나는 그처럼 탐스럽고 색깔과 향기가 뛰어난 장미를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 동안 내가 보아온 장미는 흰색, 하얀색, 핑크색, 노란색 등 다양하지만, 이처럼 짙은 보라색깔의 장미는 본 적이 없다. 꽃잎이 붉은 장미보다는 검은 색을 띄기 때문에 적자색(赤紫色, Black Rose)을 띄는 흑장미는 품격과 향기면에서 대중적인 장미보다는 크게 돋보였다. 이런 귀한 꽃을 어디서 구했으며, 누가 이 꽃을 갖다 .. 2011. 6. 29.
행복했던 군(軍) 생활 행복했던 군(軍) 생활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장교보직처 포병기갑과 근무 - 글 · 남상학 * 육군본부 근무 시절의 포병기갑과 동료들과 함께 (앞줄 우측이 본인)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이것은 우리나라 대표군가 가사의 일부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노래를 모르는 이가 없다. 군가이면서도 누구나 힘들 때 부르면 힘이 나는 그런 노래다. 현역 생활을 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전역한 사람은 호호백발이 된 뒤에도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흥얼거린다. 국방의 의무는 교육, 근로, 납세의 의무와 함께 국민의 4대 의무에 속하므로 대한민국 남아들은 누구나 일정한 나이가 되면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키는 병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런데도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병역.. 2011. 6. 27.
<졸업기념 수필> 피날레의 지점에서 -사랑하는 젊은 R에게 피날레의 지점에서 - 사랑하는 젊은 R에게 - 글 · 남상학 R! 4년 전, 내가 1학년이 되던 해 봄철이었습니다.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되지 않지만 그 프랑스 영화에는 ‘추억을 파는 노점(露店)’이 있어서 젊었을 때의 추억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을 보고 참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흘러간 것들에 집착을 하지 않으면서 현재라는 상황만을 응시하며 현실의 장벽과 싸워가던 주인공, 그에게는 젊음의 용기와 투쟁과 모험만이 내일의 비전을 향해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고뇌의 역정(歷程)을 거친 뒤 노년에 이르러서는 센 강변에 자리 잡은 ‘추억을 파는 노점’에서 젊음의 추억을 고가(高價)로 매입하면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습니다. 「Youth is beautiful it's not eternal; N.. 2011. 6. 27.
<평론> 한국적 허무주의(虛無主義)의 고찰 한국적 허무주의(虛無主義)의 고찰 - 조병화의 를 중심으로 - 글 · 남상학 1. 서구에 있어서 니힐리즘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무 것도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알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을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고르기아스(기원전 483-376)의 이 말은 현대에 이르러 니힐을 느끼는 인간으로 하여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살려고 하는 의지를 부정하고 인생은 허무하다. 생의 가치를 갖지 않았다"고 주장케 했다. 그들이 오랫동안 생활 이념과 가치 기준으로 삼아온 그리스도교 모럴은 '신의 추방(追放)'으로 상실되어 버렸고, 이성을 신주처럼 모시던 근대인은 과학 문명의 위협과 인간능력의 유한성 앞에 .. 2011. 6. 27.
<평론> 현대적 징후(徵候)와 전환의식(轉換意識) 현대적 징후(徵候)와 전환 의식(轉換意識) - 사상의 전환기에 서서 - 글 · 남상학 "여기엔 물이 없고 바위뿐 바위만 있고 물 없는 모래밭 길" -T.S 엘리어트 ‘황무지’에서 혼란과 무질서의 황야! 여기 황량한 지역에 비참한 경영을 지속하는 현대인은 ‘무상(無償)의 방황’이 아니면 ‘공허한 도로(徒勞)’란 제목의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조명 아래서 절대적 가치도 없는, 현대 문명이 던져준 뉴앙스의 주제들. 그리하여 저 트래지디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우리는 데카다니즘을, 니힐리즘을, 패시미즘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까뮈)는 근대적 지성의 무리들은 천부의 선택과 결단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저 만공(滿空)에 휘날리는 깃발처럼 벽을 대결하는 의.. 2011. 6. 27.
대학시절 논문 당선, 조병화(趙炳華)의 시집 『밤의 이야기』를 분석한 평론으로 대학시절, 신진 논문 당선 조병화(趙炳華)의 시집 『밤의 이야기』를 분석한 평론이 당선되다 글 · 남상학 내가 대학을 다니던 60년대는 실존주의 사상이 전 세계를 풍미하던 때였다. 그래서 대학생이라면 실존주의 작품 하나쯤은 겨드랑이에 끼고 다녀야만 행세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실 실존주의가 어떤 것이며,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온 것이며, 인간의 생활을 특정짓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이 그저 맹목적인 현상이었다. 실존주의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허무하고 부조리한 세계 속에 실존하고 있으며, 자기가 스스로를 정립하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보는 철학 또는 문학상의 입장이나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이 등장하게 된 데는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 2011. 6. 27.
꽃 피우지 못한 승마의 꿈 꽃 피우지 못한 승마의 꿈 글 · 남상학 나는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에 문교부(지금의 교육과학기술부)가 운영하는 특수체육과정 의 하나인 승마훈련에 참가했다. 젊은이들의 체력을 증진시키고 능력과 취미를 습득시킨다는 취지에서 시행한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이 훈련에 지원한 것은 고등학생 시절 ‘석양의 무법자’ ‘황야의 7인’ ‘OK목장의 결투’ 같은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영화의 주인공들은 허리춤에 총자루를 차고 말을 타고 바람 먼지를 가르며 황야를 질주했고, 나는 그런 장면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도 저렇게 말을 타고 달려보았으면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승마훈련장은 다행히 집에서 가까운 뚝섬경마장이었다. 오전반, 오후반 모두 50명의 지원자들은 승마복을 차려입은 교관들에 의하여 매일.. 2011. 6. 27.
복사꽃 추억 복사꽃 추억 글 · 남상학 "화창한 봄날 오후, 마지막 강의가 폐강된 날 나는 그녀와 함께 세검정 행 버스를 탔다. 누가 먼저 제안할 것도 없이 무르익은 봄기운을 만끽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녀의 부음(訃音)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인연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녀는 내 추억 속에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학원문학상을 수상하여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키가 크고 목이 길어 노천명의 의 한 구절을 연상시켰다.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던 그녀는 기독학생회에 출석하면서 나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화창한 봄날 오후, 마지막 강의가 폐강된 날 나는 그녀와 함께 세검정 행 버스를 탔다. 누가 먼저 제안할 것도 없이 무르익은 봄기운을 만끽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덜컹거리는 만원 버스 안.. 2011. 6. 27.
질풍노도(疾風怒濤)의 계절,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정변 ● 나의 대학시절 질풍노도(疾風怒濤)의 계절 -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정변의 소용돌이 글 · 남상학 "내 대학시절은 질풍노도의 계절이었다. 나는 1960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대학생활의 시작은 큰 포부와 기대로 부풀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대학이란 요람 속에서 안이하게 꿈을 펼 수 없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내 대학시절은 질풍노도의 계절이었다. 나는 1960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대학생활의 시작은 큰 포부와 기대로 부풀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대학이란 요람 속에서 안이하게 꿈을 펼 수 없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꾀하면서 온갖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일삼았다.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사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센 항의 시위를 .. 2011. 6. 27.
나의 제천중·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 나의 중·고교 시절 나의 제천중·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글 · 남 상 학 *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가운데), 왼쪽은 박태남, 오른쪽은 이길섭 * 중학교 입학은 기적처럼 찾아왔다. 피난지 영흥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영월중학교에 입학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열과 누님 덕분이었다. 육지로 나온 뒤 누님이 영월 봉래초등학교 교사로 잠시 근무하고 있을 때, 나는 중학교에 가고 싶어 초등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1953년 영월 봉래초등학교 6학년 2학기에 재입학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기까지 1년 좀 넘게 공백기가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를 다시 다니고 졸업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초등학교에서 한 학기를 다니고 이듬해 졸.. 2011. 6. 27.
아들의 편지,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들과 자부의 편지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글 · 남상학 정년은퇴를 앞둔 어느 날, 둘째아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지를 고르고 우표를 붙이는 번거로움을 피해, 젊은 사람답게 내 홈페이지 방명록에 살며시 올려놓은 편지였다. 비록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인터넷 공간에 올려놓은 일종의 공개편지였지만, 다른 어떤 사람이 올려놓은 그 어떤 글보다 반가웠다. 대기업에 취직하여 밤늦게까지 일하다 야심한 시간에 퇴근하는 아들인데 제법 길게 써내려간 글에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진한 감사가 배어 있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로 시작된 편지에는 “아버지의 정년퇴임을 맞이하며 그동안 마음속 깊이 하고 싶었던 말, 그렇지만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해드린다”며, 자신을 위해 애썼던 일, 가족간의 아름다.. 2011. 6. 27.
다섯 손자 ·손녀 이야기 다섯 손자 · 손녀 이야기 글 · 남 상 학 "언제까지 이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때는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이 점점 험악해지고 삶은 그만큼 험난할 것이 분명한데, 우리 아이들이 세상의 지식에 급급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 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침잠을 깨어 창밖을 보니 펑펑 눈이 쏟아진다. 순간 대치동 대현초등학교 1학년인 손녀 지연이와 같은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 다니는 가연이의 등교 길이 걱정된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차의 왕래가 빈번한 대로를 건너 언덕길로 15분쯤 걸어 올라가야 하므로 길이 미끄러울 것이 분명하다. 아이들의 등굣길이 불안하여 나는 아이들이 입학하는 날부터 매일 아침 승용차로 등교.. 2011. 6. 27.
기도로 얻은 선물, 남기찬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선물, 남기찬 글 · 남 상 학 “아버지, 그 이름은 태어날 우리 아들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것으로 믿고, 저의 부부가 이름을 지어놓고 그 이름으로 감사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2008년 11월 30일(주일) 저녁 18시, 삼성동 소재 호텔 뷔페에서 손자 기찬이의 돌잔치가 열렸다. 친가, 외가 친척들과 아빠․엄마의 친구들이 모였다. 태어난 날에 맞춰 돌잔치를 하려면 12월 10일에 맞춰야 하는데, 송년회 등 각종 연말모임이 몰려 장소를 구하기가 어렵고, 주중에는 모두 일에 매달리는 형편이어서 부득이 날짜를 앞당긴 것이다. 우리는 기찬이가 태어나서 1년 동안 찍은 사진으로 장식된 복도를 지나 별실로 들어갔다. 어찌 보면 아이의 돌을 축하하는 모임이 요란스러운 것처럼 보일 수 있으.. 2011. 6. 27.
자녀교육을 어떻게 했냐구요? - 밥상머리 교육과 가족여행 자녀교육을 어떻게 했냐구요? - 밥상머리 교육과 가족여행 - 글 · 남 상 학 "우리도 부모 자식이 한 상에 앉아 식사를 나누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된다면 자녀교육은 저절로 이루어 질 것이라 믿는다. " 어느 해인가 교회에서 개최한 젊은 엄마들의 가정교육 세미나에서 ‘가정에서 자녀교육을 어떻게 시켰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이고, 또 두 아들을 잘 키운 것으로 생각하여 별다른 자녀교육의 비법(秘法)을 알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학교 교사일 뿐, 두 자녀의 가정교육에는 별로 신경을 쓴 일이 없어서 그냥 ‘하나님이 키워주셨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무성의한 것처럼 들렸는지 구체적으로 답변해 달라고 재차.. 2011. 6. 27.
아내의 빨래 아내의 빨래 글 · 남 상 학 "아내는 우리 가족 모두가 바른 심성과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일깨워주는 일에 누구보다도 예민했다." 어느 날 아내가 대학 동창 모임에 나갔다 돌아와서 “창피해서 혼났다”며 투덜거렸다. 한 친구가 자기를 가리켜 “너는 빨래를 잘 한다며?” “네가 얼마나 빨래를 열심히 하면 네 남편이 ‘아내의 빨래’라는 글을 썼겠느냐”고 놀리더라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내 시집에서 라는 글을 읽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친구가 말은 바로 했네.’ 라고 말하고 피식 웃은 적이 있었다. 내 아내는 천성이 부지런했다. 자기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뒤로 미루거나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다.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완벽에 가깝도록 노력하는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무학여고를 졸업할 때까.. 2011. 6. 27.
아내를 위한 소묘(素描) 아내를 위한 소묘(素描) 글 · 남 상 학 "유난히 추운 이 겨울, 단 하루만이라도 아내의 손을 설거지통에서 빼내어 거품이 퐁퐁 올라오는 기포탕에 담가주어야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다." 결혼한 지 40년이 지났으니 세월은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60년대 끝자락에서 난 아내를 맞이했다. 객관적인 면에서 보면 도저히 내 아내가 될 수 없는 사람을 아내로 맞이했다. 큰 느티나무 그늘 같은 아내의 가정은 그 그늘에 많은 친척들을 불러 모을 만큼 넉넉했다. 그런 가정에서 곱게 성장한 처녀가 부모 없고 의지가지없는 나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요 축복이었다. 장인어른 되시는 이석재(李奭載) 어른은 성경린 씨 등과 함께 1926년 4월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3기생으로 입학하여 1931년에 졸.. 2011. 6. 27.
내 혈통의 뿌리, 의령남씨 충경공 자손 설애공파 내 혈통의 뿌리 - 의령남씨 충경공 자손 설애공파 - 글 · 남 상 학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와 뿌리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나는 중학교 시절 사회 선생님의 영향으로 비로소 ‘존재와 뿌리’에 대한 자각을 갖게 되었는데 내 주변에는 이러한 나의 관심사에 대하여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분이 계시지 않았다. 보통 뿌리교육은 뜻있는 집안 어른이 맡아서 하기 마련인데,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뿌리 교육을 받을 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늦게 기회가 찾아왔다. 학생 시절 집안 선산이 있는 아산 온양에 가면, 그곳에 사시는 여섯째할아버지께서 집안의 가계(家系)에 대하여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손수 만드신 “세계(世系)”를 교재로 혈통에 대하여 교육을 받을 수.. 2011. 6.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