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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복사꽃 추억

by 혜강(惠江) 2011. 6. 27.

 

복사꽃 추억

                     

 

글 · 남상학

 

 

 

  "화창한 봄날 오후, 마지막 강의가 폐강된 날

나는 그녀와 함께 세검정 행 버스를 탔다.

누가 먼저 제안할 것도 없이 무르익은 봄기운을 만끽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녀의 부음(訃音)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인연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녀는 내 추억 속에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학원문학상을 수상하여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키가 크고 목이 길어 노천명의 <사슴>의 한 구절을 연상시켰다.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던 그녀는 기독학생회에 출석하면서 나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화창한 봄날 오후, 마지막 강의가 폐강된 날 나는 그녀와 함께 세검정 행 버스를 탔다. 누가 먼저 제안할 것도 없이 무르익은 봄기운을 만끽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덜컹거리는 만원 버스 안에서 그녀는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우린 몇이나 낳을까?” 그녀는 버스 창문에 붙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를 바라보며 거침없이 한 마디 던지고는 곁눈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던진 그녀의 말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나는 순발력을 발휘하여 ‘나는 둘만 낳을 테니, 너는 열둘만 낳으라’고 했다. 위기 상황(?)을 가까스로 모면하는 기분이었다. 어색한 기분이 되어 침묵이 흐르는 동안 버스는 어느 새 자하문을 넘고 있었다.

   그 시절 자하문 밖은 복숭아밭이 많아서 봄철에는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무릉도원을 방불케 했다. 우리는 그날 청록파 시인 박목월(朴木月)의 <산도화(山桃花)>를 읊조리며 복사꽃 그늘 아래에서 산책을 했다. 그녀는 흥겨웠던지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으로 시작되는 홍난파의 <고향의 봄>을 낭랑하게 불렀다. 이어 당시 한참 유행하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감미롭게 불렀다. 만발한 꽃의 매력에 도취된 탓일까 아니면 복숭아 꽃말대로 ‘사랑의 포로’가 되어서였을까. 그녀는 글 잘 쓰기도 했지만 음악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의 소프라노 음성은 맑은 옥구슬이 구르는 것 같았다. 나는 세월이 지만 뒤 그 때 그녀와의 추억을 더듬어 <복사꽃 추억>이란 글을 썼다.

   만원버스를 타고
   지하문 밖 고개를 넘으면
   아지랑이 춤추는 언덕 물 오른 나무들이
   새빨갛게 불타고 있었네
   흐드러지게 핀 복사꽃
   꽃가지 뒤에 숨어 얼굴을 붉히던 그대
   버스 창문의 글귀를 바라보며
   '우린 몇이나 낳을까' 말해 놓고
   당황하던 얼굴처럼
   출렁이며 넘실거리던 햇살 속으로
   러브 미 텐더 러브 미 트루~
   감미로운 선율은 어느새
   잘 익은 복숭아 단물이 되어
   뜨거운 가슴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네
   겉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은밀한 내면을 기웃거리면서
   꽃물처럼 물들이던 자잘한 사랑 이야기
   티 없이 맑은 눈은 하늘의 푸른 샘물을
   종일토록 퍼 올리고 있었네
   복사꽃 화사하게
   만건곤한 봄날 세검정에서.

   그녀는 당돌하면서도 지극히 감성적인 낭만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몸이 허약하다며 휴학을 했고, 만남이 뜸해진 우리의 교제도 지지부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 해 여름 나는 그녀로부터 두툼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대학노트의 앞뒤 두 장을 가득 채운 편지는 나를 또 당황하게 만들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로 시작된 그녀의 편지는 한 마디로 ‘절교 선언(絶交宣言)’이었다. “광대는 갈채를 보내주는 관객이 있어서 힘든 연습의 고통을 감수하지만, 관객이 없는 광대는 무대에 서있을 이유가 없다”는 말로 떠나는 변(辯)을 대신했다. 나는 일방적인 그녀의 태도에 불쾌하기 그지없었고, 잠깐 동안의 교제는 그렇게 끝이 났고, 그녀와의 관계는 봄날의 꿈처럼 <복사꽃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해가 몇번 바뀌고 졸업을 앞둔 가을이었다. 시간과 함께 그녀의 존재가 내 머리에서 거의 사라질 무렵 나는 오랜만에 그녀로부터 꼭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굳이 거절한 이유도 없어서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녀는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가지고 온 노트 몇 권을 내밀었다. 두툼한 일기장이었다. 나는 한 장을 다 읽지 못하고 덮고 말았다. 내용은 여류시인 모윤숙(毛允淑)의 <렌의 애가>를 방불케 하는 애절한 사모곡(思慕曲)이었다. “왜 이런 글을 지금 와서 내게 읽어보라고 했을까?” 잠시 혼란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아직까지 사모의 대상으로 남아있었다는 말인가?” 그녀는 잠시 후에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듣고 싶어 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나의 분명한 태도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No'라고 말해야 할 처지에 어찌 즉석에서 그리 쉽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잠시 고심하다가 열흘 후 다시 만나자고 했다. 적어도 고민의 흔적은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적이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열흘 뒤,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1시간 정도 기다리다가 간단히 글을 적어 메모대에 꽂아놓고 나왔다. 다음날 그 장소에 가보았지만 메모한 종이는 여전히 제자리에 꽂혀 있었다. 나는 궁금하여 그녀가 한 때 근무했다는 회사를 수소문하여 전화를 걸었다. 남자 직원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그녀는 퇴직했고, 오늘이 결혼한 지 닷새가 되는 날”이라고 했다. 그 말은 듣는 순간 나는 해머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이 궁금했다. 결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자존심이 강한 그녀가 보여준 행동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인생의 가장 중대한 고비를 앞두고 마음에 둔 사람과 교제가 가능한 지 최종적인 의사를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현실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통과의례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떨쳐버리려고 했던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추측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속내를 정확하게 짚어내기가 어려웠고, 순간 내 머리는 점점 복잡해져 갔다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녀가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홀가분하게 만들었다. 한달쯤 지나서였을까? 나는 그녀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했노라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신파조의 연극 대사처럼 “부디 행복하기를 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고맙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 뒤 나도 결혼하게 되었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그녀의 소식을 간간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결혼하여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남대문시장에 아동복점을 경영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는 소식이 제일 먼저 들려왔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남편과 이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뒤로는 교회와 기독교단체에서 물질로, 음앋적인 재질로 열심히 봉사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는 어느 대학의 최고경영자과정에서 공부하다가 강사였던 지방의 모(某)대학 노(老)교수와 재혼해서 생활의 안정을 찾고 제2의 인생을 출발했고, 청주에서 기독교서점을 경영한다는 소식들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들려왔다.

   그런 과정 속에서도 그녀는 여러 경로를 통해 내 근황을 알고 싶어 했고, 또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주변의 사람들을 통하여 그녀의 근황에 대하여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는 아름다운 추억의 대상이면서 관심 있는 존재로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나는 두 번째 시집 <하늘을 꿈꾸는 새>를 출간하고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된 주소로 시집 한 권을 보내주었다. 얼마 후 그녀는 보내 준 시집을 읽고 예쁜 카드에 글을 적어 보내왔다.

   하늘을 꿈꾸는 새”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큰 감격과, 공감과 기쁨으로 읽었습니다.
   진솔한 삶의 고백들을 통해서 빛나는 영혼을 봅니다.
   맑고 신선한 충격이 내 얼룩진 영혼을 참회케 합니다.
   하늘을 향한 기도로 잉태될 세 번째의

   "사랑과 믿음의 시"를 기다립니다.
   하늘 아버지의 특별하신 은총이 함께 하시길.

 

* 그녀가 보내온 엽서 필체 *

 

 

  불과 몇 줄 안 되는 짧은 글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엽서를 받고 몹시 반가웠다. 그 동안의 역경과 시련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이제는 관조적인 자세로 자신을 돌아보는 성숙한 자세로 돌아와 있음을 간단한 글 속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번 만나고 싶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어온 노년의 문턱에서 담담하게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그녀의 비보(悲報)를 듣게 된 것이다. 손수 운전하다 큰 사고를 당하여 손을 써볼 틈도 없이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려 했던 그녀가 비명에 갔다는 소식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나는 그녀의 죽음 앞에서 왠지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꼭 짚어 무어라 얘기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어쩌면 그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는 고비에 내가 존재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그 후 나는 그녀가 비명에 갔다는 청주를 지나며, 조화 한 송이를 그녀의 묘 앞에 놓듯, <애도별곡>을 지어 그녀에게 바쳤다.

   더위 먹은 듯
   내 승용차는 카랑카랑한 소리로
   그대 심장을 가로질러 아스팔트길을 달린다.

   눈물로 얼룩진 네 젊은 날의 육필(肉筆)처럼
   덜컹 잘린 손가락 부서진 두개골
   거리에 뒹구는 살점, 흥건한 피

   몇 구비 고개 넘어
   척박한 땅에 꽃씨를 뿌린 세월인데
   누가 그 꿈 시샘하여 산산조각 앗아갔는가.

   미치도록 좋아
   생명과도 바꾼 아름다운 선율이
   스·타·카·토로 분절되어 끊어지는 길

   그 길 위에 부서진 잔해들이 모여
   오, 다시 일어서는 네가 보인다.
   원고지에 춤추던 그대 영혼처럼
   바람에 흩날리며 이리저리 나부끼는
   곡조 없는 춤사위가 보인다.

   춤사위는 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타오르는 불꽃이 되고
   접시꽃으로 피어 웃으며 달려오는구나.

   허공으로 향한 초점 없는 눈망울로
   그대 영혼 가슴에 보듬어 안고
   영원한 안식 위해 바람결에 띄우는
   애도별곡(哀悼別曲)

   청주를 지나며
   더위 먹은 듯 내 승용차는 힘겹다.


   산다는 것, 인간의 힘으로는 어느 것 하나 뜻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사는 것은 더욱 그랬다. 젊은 날 복사꽃 추억을 내게 안겨준 그녀는 비운에 갔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천국에서 복사꽃처럼 환한 웃음 짓고 있을 것이다.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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