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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질풍노도(疾風怒濤)의 계절,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정변

by 혜강(惠江) 2011. 6. 27.

               

나의 대학시절

 

질풍노도(疾風怒濤)의 계절

 

-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정변의 소용돌이  

 

 

글 · 남상학

 

 

 

  "내 대학시절은 질풍노도의 계절이었다.

나는 1960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대학생활의 시작은 큰 포부와 기대로 부풀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대학이란 요람 속에서

안이하게 꿈을 펼 수 없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고려대학교 교정 내 4.18기념탑

 

  내 대학시절은 질풍노도의 계절이었다. 나는 1960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대학생활의 시작은 큰 포부와 기대로 부풀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대학이란 요람 속에서 안이하게 꿈을 펼 수 없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꾀하면서 온갖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일삼았다.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사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고,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일은 추악하고 불법적인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로서 민주당 마산지부는 선거무효 선언과 함께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들어갔다. 무차별 진압에 나서 마산에서는 경찰의 사격으로 학생과 시민이 쓰러졌다. 이 무렵, 마산시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소년의 시체 한 구가 떠올랐다. 부정선거 항의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 군이 실종 20여일 만에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분노한 마산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진실규명은 외면한 채 무고한 시민들을 연행, 고문하였고, 이에 자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1960년 입학식을 치루고 대학생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대학의 상황은 편치 않았다. 민족의 얼을 바탕으로 “자유・정의・진리”를 추구하는 고려대학교로서는 학교 신문인 <고대신문>을 통하여 당시 시대상황을 심각하게 여기고 지식사회에 대하여 의미 있는 행동을 촉구하고 있었다. “제군은 베이컨의 이른바 현실에 대한 ‘예리한 관찰에 의해 얻어진 지혜’로써 진지하게 학문하여 성실하게 행동할 줄 아는 인간이 되라.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행동성이 결여된 기형적 지식인을 거부한다.”(고대신문, 1960년 4월 2일자 사설) 1960년 4월 개학을 맞은 고려대 교정에서는 3·15 부정선거와 마산시위 사건에 대해 토론회가 연일 이어졌다. 행동하는 지성을 자부하던 학생들은 드디어 4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교정 곳곳에 “급고! 12시 50분 전원 본관 앞에 집합할 사”라는 격문을 내다 붙였다. 본관 앞에 모인 학우들은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한 뒤 3000여 명의 학생들은 플랜카드를 앞세우고 교문 밖을 향해 질풍노도처럼 달려 나갔다.

  거리에서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과 합류한 시위대는 국회 앞까지 진출했다. 해질 무렵까지 시위를 마치고 경찰의 인도 아래 귀교하던 중 종로4가에서 뜻밖의 사태를 맞이한 것이다. 천일극장 옆 골목에서 100여 명의 깡패들이 쇠망치, 도끼자루, 쇠파이프, 벽돌, 갈고리 등의 흉기를 시위하는 학우들에게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미처 방어태세를 갖출 틈도 없던 학생들은 실신한 채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쓰러져 뒹굴었고, 200여 명이 부상했다. 길바닥에 흩어진 핏자국과 주인을 잃은 책가방, 구두, 손수건…. 4·18 고대생들의 봉기는 곧바로 다음날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4·19의 새날이 밝았다.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1960년 4월 19일, 동아일보에는 “현장에 경관 100여 명이 있었건만, 깡패 한 명도 미체포”란 기사가 실렸다. 고려대 학생들이 깡패에게 피습을 당했다는 소식에 민심은 완전히 돌아섰다. 대학생을 비롯하여 고등학생까지 이른 아침부터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국회의사당에 모인 학생 시위대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방향으로 달렸다. 부정선거 규탄과 학원의 자유를 요구했던 시위가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혁명의 대열로 바뀌고 있었다. 젊은 학생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시민들도 학생들의 대열에 합류했고, 서울시내는 온통 ‘민주’를 외치는 시위대열로 뒤덮였다. 이 무렵 시위대의 숫자는 이미 10만 명을 넘고 있었다.

   경무대로 향하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과의 공방은 치열했다. 최루탄과 공포 사격으로 저지하던 경찰의 1차 저지선은 민주신념에 불타는 학생과 시민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위대는 경찰의 최후 저지선인 경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소방차를 앞세운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m로 좁혀졌을 때,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경무대 사격을 시작으로 서울 시내 곳곳에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이 가해져 183명의 꽃다운 젊은 학생과 시민들이 사망하고 625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반공청년단 본부와 왜곡보도를 일삼았던 신문사를 불태웠으며,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소방차를 뺏고 경찰관서를 습격하는 등 항의 시위를 전개했다. 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자, 자유당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사태를 무마하려 했지만 민심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 대학에서 발행하는 신문에는 희생당한 학우들에 대해 조의를 표하는 글들이 무수히 올라오고 있었다.

   4월 25일, 독재정권의 종말을 결정짓는 시위가 일어났다. 제자들의 희생에 가슴 아파하던 대학교수들이 시민과 학생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면서 거리로 나섰다. 의대 교수들은 흰 가운을 입고 행진했다. 이에 시위대의 규모도 엄청나게 불어났다. 온 국민이 궐기한 것이다. 학생들의 평화시위마저 폭력으로 진압한 정권에 대해 국민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바라는 진정한 염원이 전국에 물결쳤다. 경무대를 지키던 계엄군은 실탄을 장전한 상태였지만, 처음부터 엄정중립의 입장을 지킨 군은 더 이상 국민의 희생을 원하지 않았다. 교수단 시위 이후 국민들의 요구는 이승만의 하야로 모아졌다.

   사태수습이 불가능함을 알아차린 이승만 대통령은 마침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부정선거를 자행했던 독재의 무리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4월 26일 오전 10시 이승만 대통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국민이 원한다면~ ”이란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새로운 민주시대를 염원하는 환호와 만세소리로 전국이 들끓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부통령 이기붕 일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마침내 자유당 정권은 종말을 고하고 불의에 항거한 민주이념이 승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4·19는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의의 독재 권력에 항거한 혁명이었다. 1960년 5월 3일자 ‘고대신문’ 특집 통합호 1면에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시인 조지훈의 시 한 편,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이 실렸다.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의분이 터져
   노도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 때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구실 창턱에 기대 앉아
   먼 산을 넋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2시 거리에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물결이
   의사당 앞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들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사랑하는 학생들아
   늬들은 너희 스승을 얼마나 원망했느냐
   현실에 눈 감은 학문으로 보따리장수나 한다고
   너희들이 우리를 민망히 여겼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린 얼굴이 뜨거워진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아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 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
   하늘도 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은 피리라.
   아, 자유를 정의를 진리를 염원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영원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이 시는 독재정권과 싸우다 피 흘린 제자들에게 바치는 스승의 헌시(獻詩)였다. 이 글에는 혁명 전 혼탁한 자유당 정권하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교수들의 자기반성과 혁명에 몸을 바쳤던 학생들에 대한 찬사가 담겨 있다. 조지훈 교수는 현대시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청록파의 한 분으로 우리의 존경을 받던 교수는 제자인 고려대생들의 4·18 의거를 힘찬 어조로 소리 높여 찬양했던 것이다. 조지훈은 시인으로부터 직접 강의를 받은 나는 물론 다른 학생들까지도 이 시를 읽으며 젖어 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 학생을 신뢰하고 인정해주는 스승의 마음 앞에서 학생들은 뜨거운 마음으로 환호했다. 아울러 우리는 조지훈 시인이 작시한 고려대학교 교가의 한 구절 “자유를 위하여 물결치는 가슴이여, 정의를 위하여 굳게 잡은 신념이여 (중략) 자유, 정의, 진리의 전당 고려대학교” 의 한 구절처럼, 독재타도의 선봉에 서서 4. 19의 도화선이 되었던 자신들의 행동에 대하여 한없는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세월이 지난 뒤 고려대학교는 본교 학생들의 4·18 항쟁을 기념하기 위하여 본관과 서관 사이 길가에 기념탑을 세웠다.


   自由(자유)! 너 永遠(영원)한 活火山(활화산)이여!>
   邪惡(사악)과 不義(불의)에 抗拒(항거)하여 
   壓制(압제)의 사슬을 끊고
   憤怒(분노)의 불길을 터뜨린
   아! 1960年 4月 18日
   天地(천지)를 뒤흔든 正義(정의)의 喊聲(함성)을 새겨
   그날의 噴火口(분화구) 여기에 돌을 세운다.

    * (주) 원문은 한자로만 되어 있다.

 

 

   고려대학교는 불의에 항거한 분노의 불길, 천지를 뒤흔든 정의의 함성이 솟구친 분화구였다. 후배들은 이 탑 앞에서 선배들의 위대한 업적을 두고두고 되새기며 기릴 것이다. 그러나 무능한 정치는 결국 그 이듬해 5·16군사정변을 불러왔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일부 장교들이 혼란을 명분으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면 내각은 붕괴되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약 3년간의 군정통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민주화를 외치던 캠퍼스는 혁명공약을 외치는 군인들의 군화에 짓밟히고, 삼엄한 계엄 속에서 숨을 죽여야 했다.

   군정기간 중 정변세력은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를 설치하고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으로 장기집권을 획책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의장 박정희는 조만간 원대복귀 하겠다던 애초의 혁명공약을 번복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의 대학생활은 부정부패에 대한 항거와 군사독재의 강압분위기 속에 이어져 나갔다.

 

 

 

 

 

*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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