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자부의 편지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글 · 남상학
정년은퇴를 앞둔 어느 날, 둘째아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지를 고르고 우표를 붙이는 번거로움을 피해, 젊은 사람답게 내 홈페이지 방명록에 살며시 올려놓은 편지였다. 비록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인터넷 공간에 올려놓은 일종의 공개편지였지만, 다른 어떤 사람이 올려놓은 그 어떤 글보다 반가웠다. 대기업에 취직하여 밤늦게까지 일하다 야심한 시간에 퇴근하는 아들인데 제법 길게 써내려간 글에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진한 감사가 배어 있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로 시작된 편지에는 “아버지의 정년퇴임을 맞이하며 그동안 마음속 깊이 하고 싶었던 말, 그렇지만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해드린다”며, 자신을 위해 애썼던 일, 가족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진솔하게 써 내려갔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했다. 나의 좋은 버팀목이 된 아들이 쓴 편지였기 때문이다. 부모자식간에 사랑과 존경으로 가꾸는 가정이야말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글 쓰기는 재주는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장이 매끄럽고, 띄어쓰기 맞춤법에도 그리 흠잡을 데가 없었다. 편지의 전문을 옮겨본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께 편지를 쓴 것이 초등학교 때 어버이날과 1993년도 뉴질랜드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처음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어버이날 편지를 쓰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뉴질랜드에 있을 땐 오랜 기간 집을 떠나 있어 제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편지를 썼지만, 이제 아버지의 정년퇴임을 맞이하며 그동안 마음속 깊이 하고 싶었던 말, 그렇지만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전해드립니다.
돌이켜보면 감사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요. 어린 시절 제 실수로 눈을 다쳐 병원에 드나들 때는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이 그렇게 큰 줄은 몰랐지만 자라면서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공휴일이나 방학이면 우리를 데리고 가족여행을 다니셨어요. 겨울엔 하얗게 눈이 덮인 언덕에서 형과 함께 즉석 썰매를 탔고, 여름에는 바닷가에서 맘껏 물장구치며 싫증이 나면 갯바위낚시를 했어요. 파도치는 겨울바다의 추억과 바다에서 잡아온 물고기와 조개로 콘도에서 밥을 지어먹던 일은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대학에 들어가서 유럽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했을 때, 또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했을 때 기쁜 마음으로 보내주셨던 일은 평생을 두고도 잊지 못할 거예요. 아버지는 그 때 뉴질랜드에 가려면 육하원칙에 의거한 계획서를 보여 달라고 하셨지요. 귀찮다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A4용지에 적당히 만들어 보여드렸는데, 그건 모든 일은 규모 있게, 빈틈없이 하도록 훈련을 시킨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훈련이 지금의 저로 하여금 철저하게 업무를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인 것 같네요. 그때 아버지는 처음 차를 운전하셨는데 그때부터 고등학교 2년 동안 저를 이른 아침에 통학시켜 주셨지요. 대학에 진학하여 신촌에 있는 학교에 통학할 때에도 제 편의를 위해 2호선 동대문운동장 역까지 태워주셨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해서 남대문의 세브란스빌딩, 서소문의 중앙일보 빌딩, 그리고 현재의 삼성본관빌딩까지 제 근무지가 바뀌는 것과 상관없이 그 바쁜 시간에 언제나 저를 태우고 아침 출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퇴근시간이 늦어지시는 때에는 제게 전화를 하셔서 제가 회사에 늦게까지 남아있는지를 확인하시고 시간이 맞으면 같이 퇴근하셨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여 아버지 곁을 떠나는 바로 그 전날까지.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같이 아침을 시작하고, 저녁을 마무리한 날이 햇수로 15년이 넘었습니다.
아침 차안에서 여러 가지 얘기도 많이 나눌 수 있었지만 제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차에 오르자마자 잠이 들어도, 항상 도착지에 다다르면 조용한 목소리로 "이제 다 왔다, 잘 다녀오너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을 들으며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 저에게는 큰 행복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같이 아침을 일찍 시작함으로써 제가 그나마 모든 일에 어느 정도 성실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나이가 들며, 철이 들어감에 따라 그리고 결혼을 준비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가 더욱 깊어짐을 느낍니다. 아버지 보시기에 한없이 부족한 저를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으로 격려하시고 응원하셨던 아버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동일한 시간에 어머님을 모시고 퇴근하셨던 아버지. 권위보다는 사랑으로 집안을 가꾸고 모든 일에 솔선수범을 보이셨던 아버지. 부지런하시고 만사에 열심이셨던 아버지. 살다보면 한두 번의 실수도 있을 텐데저에게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저에게 정말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말씀으로 행동으로 일깨워주셨습니다. "제 인생의 최대 목표가 바로 아버지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저도 아버지처럼 훌륭한 가정을 만들어서 제 아들, 딸들이 장가하고 시집갈 때 우리 집안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것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만 드리는 말인데요. "저는 저의 집안이 최고로 자랑스럽습니다. 아침마다 한 식탁에서 아침밥을 먹으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던 우리 집, 가족들 간에 사랑이 넘치고, 친척들 간에도 화목하며, 저마다 각자의 처소에서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살아가는 저의 가족들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아가시는 어머니. 현명하시고 부지런하시며 남을 배려하고 베푸는 삶을 사시는 어머니. 항상 양보하고 마음씨 넓고, 똑똑하고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하나밖에 없는 형. 베풀기를 좋아하고,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시는, 그리고 서연이를 이쁘게 키우시는 마음 착한 형수님. 그리고 이쁘고 똑똑한 우리 집안의 보물 서연이. 믿음 있고 사랑이 넘치며 교양 있고 올곧으신 집안 어른들과 사촌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황미.
그동안 저를 이렇게 키우시고 가정을 아름답게 가꾸시고 학교를 훌륭하게 운영하시면서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언젠가 아버지 학교의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습니다. “우리 교장 선생님은 자상하고, 능력 있고, 모든 선생님들로부터 크게 존경 받는 분”이시라고. 그런 아버지가 이제 35년 6개월의 교직생활을 마감하시고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가실 것입니다. 아버지.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은퇴에 즈음하여 둘째아들 경우 올림
또, 이 글 밑에는 둘째며느리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버님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게 되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35년 6개월 동안의 교직생활, 한 기관의 장으로 17년 이상을 헌신하신 아버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기관장으로서의 마침과 또 새로운 시작에 가슴설렘으로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이 멋진 홈페이지의 오픈을 축하드립니다. 아버님이 살아오신 날들처럼 저희도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버님 항상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 황미 올림
이와 같은 편지는 큰아들 내외로부터도 날아들었다. 생일이거나, 결혼기념일이거나 명절이거나 특별히 인사를 하고자 할 때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4각의 예쁜 봉투에 담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제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은혜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아들 둘 키우시느라 그간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감히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 자체가 저희에게는 바른 교훈이 되고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희가 알고 있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을 다른 분들로부터 간혹 들을 때마다 자랑스러움과 존경스러움을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가 누구나 존경하는 분이라는 사실에 뿌듯함과 자부심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그 정도가 더해집니다. 지금까지 건강하셨듯이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삶에서의 만족감을 충분히 만끽하시고, 풍요로운 삶으로 시간들을 채워나가시기 바랍니다. 감사드립니다."
- 2001.3 큰아들 석우 올림
"아버님, 어머님! 41주년 결혼기념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늘 저희를 푸르고 넉넉하게 감싸 안아주시는 커다란 나무와도 같은 아버님, 어머님, 항상 감사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더욱더 넘치게 감사드려요. 늘 저희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셔서 서연이와 기찬이 저희들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희만 바쁜 것처럼, 저희만 힘든 것처럼 투정부리는, 부족함이 많은 저희들입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버님, 어머님의 모습 조금이라도 닮아갈 수 있게 노력하며 살게요. 지금처럼 건강하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평안히 사시기를 기도할게요. 감사드립니다."
- 큰며느리 주희 올림
나는 이런 편지를 보내오는 아들과 자부들이 한없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사랑과 감사로 꾸미는 부모자식간의 유대가 끈끈하면 할수록 그런 삶이야말로 살맛나는 행복이 아니겠는가. 나는 오래 전 어느 방송사를 통해 방송된 여성가족부의 가족사랑 캠페인의 광고 문구를 떠올려보았다. 여성가족부의 홍보대사로 활동했던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당시 22세)씨는 "엄마 아빠께 항상 감사해요. 생전에 아빠가 말씀하신 대로 자신감을 갖고 먼저 사랑하면 결국은 모두가 행복해져요"라고 말했다. 4년 전 작고한 이씨의 아버지는 사고로 척추 하반신이 마비됐으나 언제나 자상함을 잃지 않았고, 이씨의 어머니는 이씨에게 엄격한 피아노 훈련을 시켜왔다고 한다. 이씨는 손가락이 네 개뿐인데다 무릎 아래 다리가 없는 채로 태어났으나,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훈련 덕분에 6세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이씨는 각종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으며, 현재 연간 10회 이상의 독주회를 개최할 정도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여섯 손가락이 돼 준 가족의 소중함'을 주제로 얘기를 들려주는 그의 방송은 많은 사람을 감동케 했다.
부모는 누구나 자식이 잘 되는 것을 바라고 그를 위해 자신을 버린다. 사람 사는 세상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어찌 없겠는가. 행복은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겠는가.“사랑하면 결국은 모두가 행복해져요" 그의 음성이 지금도 또렷이 들려온다.
<출처>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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