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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나의 제천중·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by 혜강(惠江) 2011. 6. 27.

 

● 나의 중·고교 시절

 

나의 제천중·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 남 상 학

 

 

 

 

*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가운데), 왼쪽은 박태남, 오른쪽은 이길섭 *

 

 

  중학교 입학은 기적처럼 찾아왔다. 피난지 영흥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영월중학교에 입학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열과 누님 덕분이었다. 육지로 나온 뒤 누님이 영월 봉래초등학교 교사로 잠시 근무하고 있을 때, 나는 중학교에 가고 싶어 초등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1953년 영월 봉래초등학교 6학년 2학기에 재입학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기까지 1년 좀 넘게 공백기가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를 다시 다니고 졸업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초등학교에서 한 학기를 다니고 이듬해 졸업하면서 영월중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하나님은 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싶은 나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영월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입학식을 치루고 한 달도 채 못되어 누님이 건강 문제로 교사직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수입원이 끊어진 우리 가족에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장사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영월에서 가까운 제천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제천은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유동 인구가 많아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제천역 앞에 터를 잡았다. 1954년 5월 제천으로 이사하면서 나는 입학한지 불과 한달도 안 되어 영월중학교에서 제천중학교로 전학했다.

  다행히 입학식을 한지 얼마 안 되는 때여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학교 공부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교복을 입은 채로 어머니의 장사일을 도와야 했다. 어머니의 장사는 역전거리에 좌판을 펴고 노점상을 하는 것이었다. 과자류, 과일류, 그리고 기차를 타려는 승객들이 식사대용으로 먹을 수 있는 찐빵을 져내는 일이었다. 기차역은 기차 시간에 맞춰 손님이 몰리는 특성이 있어서 바쁠 때는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 일은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가 책가방을 던져 놓고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런 것쯤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일을 돕는 것보다 공부하기를 독려하여 급한 일이 끝나면 집으로 곧 집으로 나를 돌려보냈다. 공부를 소홀히 하여 성적이 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 어머니는 성적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선생의 자식’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예의범절을 잘 지키고, 정직하고 성실해야 함을 가르치셨다. 애비 없이 못되게 자라 '후레자식'이란 말을 듣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며, 모든 일에 있어서 다른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며 나를 깨우치셨다. 어린 두 동생이 있는 나로서는 두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면서 학교생활에 충실했고, 그 덕분에 성적은 항상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무렵 공교롭게도 화산동 우리 뒷집에 조인행 선생님이 이사를 오신 것이다. 선생님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정규학교를 이수하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우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분이셨다. 그런 까닭으로 조인행 선생님은 내 행동의 표상이 되었다. 형편이 넉넉지 못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는 것, 문제는 그 자신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무언으로 교훈해 주었다. 그런 선생님이 내 중학교 3학년 담임이 바로 우리 뒷집에 살고 계신다는 생각만 해도 든든했고 행복했다. 또 국어를 담당하셨던 박지견 선생님은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말로, 남이 뭐라 해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내게 일깨워주셨던 선생님이셨다. 중학교 시절은 이런 선생님 덕분에 보람 있는 기간이었다.

  순진하기만 했던 중학교 시절과는 달리 나의 고등학교 학시절은 나에게 자아 확립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앙생활, 교우 관계, 학생 활동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나 자신의 위치를 확보해 나갔다. 그 결과로 나는 2학년 때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남보다 뛰어난 지도력이 있거나 사회성, 적극성이 두드러졌던 것도 아닌데 3학년을 제외한 전교생의 리더가 된 것이다. 왜 내가 임명되었을까 궁금했지만, 아마도 학업성적과 생활태도 면에서 모범학생으로 인정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 당시 학도호국단은 본디 단체훈련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연마하며 민족의식을 고양함으로써 애국적 단결심을 갖추게 하기 위해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에 조직되었던 단체였지만, 지금의 학생회처럼 학생들 간에는 학생자치활동이 보장되는 학생의 독립기관이었다.

 

  나는 3학년인 위원장을 도와 1년 동안 학생의 대표로서 학교의 위상을 높이고, 학교와 학생 간에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학도호국단 기관지를 간행하는 일을 맡았다. 원고를 모으고, 편집하여 타블로이드판 신문 형식으로 간행했다. 비록 등사기를 이용한 것이었지만 처음 발행된 학도호국단 기관지는 학교를 대표하면서도 학교와 학생 간에 매개체로서의 구실을 하였고, 학생들에게는 의견이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해 나는 겨울방학에 충청북도 학도호국단간부 견학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충청북도 내의 각 고등학교 대표와 함께 2박 3일간 서울 견학에 참가한 일도 있었다. 시골뜨기로서는 처음 서울 나들이를 한 것이다. 나는 남대문, 덕수궁, 창덕궁, 비원, 국회의사당, 육군사관학교 등을 둘러보며 전통적인 우리 문화를 배우고 견문을 넓히는 소중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학생을 대표하는 역할은 한 해로 끝나고 말았다. 이듬해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에 입후보하였으나 선거에 낙선했기 때문이다. 낙선의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학교 안에서 그룹을 형성하지 않겠다는 나의 고지식한 성격 때문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내에는 몇 개의 클럽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이들 클럽은 학생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일종의 불량서클(패거리 집단)이었다. 그런데 선거를 하루 앞둔 밤, 가장 세력이 컸던 클럽의 대표 몇 명이 나를 찾아와 친교 협약(?)을 요구해 왔다. 말이 친교협약이지 자기 클럽에 입단하던가 아니면 자기들 편에 서 달라는 위협이었다. 위협을 무릅쓰고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그들은 다음 날 힘을 앞세워 동료와 하급생들을 협박하며 투표(선거)를 불공정하고 편파적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낙선되었고, 그 집단에서 이유 없이 기피인물이 되고 말았다. 불공정한 선거 결과는 학생들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이어졌고, 졸업기념 앨범조차 의견이 엇갈려 제작하지 못한 채 졸업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고등학교 3학년 간 내게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되었다. 주변에는 늘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강준철. 김경배, 박태남, 이길섭, 이만우, 그리고 이기봉, 천병기 등은 가깝게 지낸 단짝들이다. 또 이원종, 원종태는 자기의 시골집으로 초청하여 우정을 돈독하게 다졌던 좋은 친구였다. 그 중에서도 고마운 친구는 박태남이었다. 내 동생이 제천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사범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우리 집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서울로 이사갈 처지가 되었고, 나는 홀로 제천에 남아 3학년 과정을 마쳐야 할 형편이 되었다.


  이 때 친구 박태남이 자기 집에서 같이 지내며 공부하자고 제안을 함으로써 나는 1년 동안 친구에게 큰 신세를 졌다. 이 일은 친구의 호의이기도 했지만 아무 부담이나 조건 없이 흔쾌하게 거두어주신 친구 어머니의 그 후덕한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무리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임을 알면서도 이제껏 어머니에게 보은을 못하고 염치없이 살아가는 내가 부끄럽다. 더구나 친구 박태남은 폐암으로 먼저 갔으니 허망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그는 가고 없지만 강준철. 김경배, 이길섭, 장정식과 함께 모이는 이월회(일명 장수회)는 지금도 어김없이 매월 둘째 월요일에 만나 노년의 우정을 다져가고 있다.

  한편 고등학교 시절 좋은 선생님들을 만난 것은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중학교 시절의 두 분 선생님 외에도 나는 고등학교 시절 국사를 가르치셨던 장병환 선생님, 화학과 독일어를 가르치셨던 전상운 선생님의 가르침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장병환 선생님은 철부지였던 나에게 역사적인 안목과 분별력을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하셨다. 일찍이 키케로(M.T.Cicero, 106-43 BC) 가 ‘역사는 인생의 교사’라고 했듯이, 장 선생님은 나에게 인생의 교사로서 남아있다. 그리고 전상운 선생님은 신앙과 인생의 멋을 가르쳐 주셨다. 이러한 것들은 알게 모르게 내 인격 속에 나를 특정짓는 요소로 작용하여 인생관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의 지나간 추억들을 정리하다 보니 한 폭의 파노라마처럼 여러 장면들이 스쳐간다. 학교 벤드부의 행진곡에 맞춰 도로를 누비던 시가행진, 의림지, 탁사정, 희방사로의 소풍, 경주로 떠났던 수학여행, 설원을 누비며 달음질했던 토끼몰이, 힘들었지만 퇴비용 풀베기 등은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다.

  그러나 내 뇌리를 오랫동안 점령했던 기억은 뭐니 뭐니 해도 제천역 앞의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었다. 공부하는 틈틈이 어머니의 장사를 돕기 위해 늦은 밤 집과 상점(노점에서 진일보하여 가게를 얻었음)를 왕래했던 일들은 이제 까마득한 추억이 되었다. 미당 서정주는 ‘나를 키운 것 8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나에게 그 칼날 같은 바람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바람 속에 눈물로 얼룩진 어머니의 모습이 살아 있다.

 

 

 

 

*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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