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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평론> 한국적 허무주의(虛無主義)의 고찰

by 혜강(惠江) 2011. 6. 27.

 

<평론>

 

국적 허무주의(虛無主義)의 고찰

- 조병화의 <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

 

 

글 · 남상학



 

 


1.


   서구에 있어서 니힐리즘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무 것도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알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을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고르기아스(기원전 483-376)의 이 말은 현대에 이르러 니힐을 느끼는 인간으로 하여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살려고 하는 의지를 부정하고 인생은 허무하다. 생의 가치를 갖지 않았다"고 주장케 했다. 그들이 오랫동안 생활 이념과 가치 기준으로 삼아온 그리스도교 모럴은 '신의 추방(追放)'으로 상실되어 버렸고, 이성을 신주처럼 모시던 근대인은 과학 문명의 위협과 인간능력의 유한성 앞에 자기상실(自己喪失)의 뼈저린 체험을 겪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 혁명을 경험한 이성 숭배의 인간이 한때 인간능력의 무한성에 도취되어 신 앞에서 감히 오만의 눈을 부릅떠 봤지만, 그것은 오히려 서구 정신사의 근간을 이루어 온 헤브라이즘을 전면 부정하는 행위에 불과했다. 더구나, 이성에 의한 현대 과학을 구세주인 양 생각했던 현대인은 전후 두 차례의 대전을 겪는 동안 메커니즘 문명에 위기를 맛보며, 기계로 인한 비인간화의 쓴잔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미 슈펭글러에 의해 몰락(沒落)이 선언되어진 서구의 정신세계는 '카오스의 깊은 암야(暗夜)'(니체)로 하루아침에 변한 것이다. 무너진 바벨탑 앞에서 신으로부터 이반한 프로메디우스가 또 하나의 속박을 자업자득했을 때, 그의 행위는 모두가 '공허한 도로(徒勞)'가 아니면 무상의 방황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허무감, 무력감, 소외감은 자기혐오와 자기멸시의 감정을 낳고, 우울과 우수의 손짓이 아니면 방탕과 퇴폐의 몸부림을 보였던 것이다. 

2
  


   이러한 서구 니힐리즘의 만연과 더불어 한반도에도 8.15 이후의 사상적 공백기를 틈타 서구문명의 조가(弔歌)가 상륙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6.25의 처절한 민족적 비극이 삽시간에 생활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게 되자 여기저기서 한숨소리는 그 볼륨을 증대해 갔다. 이때에 시인 조병화(趙炳華)는 서민적 육성으로 고독, 불안, 포기, 초조 등의 감정을 노래하며, 시대감정의 대표적인 대변자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시인의 시가 모두 허무주의의 본령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느냐는 것은 수긍할 수 없지마는, 그것을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그 표면적 감정을 비교 검토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적 허무성이 서구 니힐리즘의 본체이거나 그 단편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며, 아울러 그 유사점도 논의해 보고자 함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적 허무성이 서구 니힐리즘과 유사점 내지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현상일 뿐 그 생성요인과 구조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생성한, 서로 다른 역사적 환경과 민족 간에 흐르고 있는 의식의 문제가 이 점을 명백히 해주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인이 일찍이 이성에 눈이 떠서 무한한 자유를 구가할 때 우리는 아직도 이민족의 굴레에서 굴종과 억압을 강요당했고, 저들이 찬란한 현대문명의 꽃밭에서 위대한 창조적 문화를 이룩할 즈음 우리는 외래사조의 와중에서 주체적 의식마저 희미해 갔고, 자본주의 거대한 생산 공장에서 다량의 생산품이 쏟아질 무렵 우리는 구호양곡과 물자의 구걸에 여념이 없었던 점에서, 한국적 허무주의적 특성은 그 생성을 우리의 역사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조병화의 시집 <밤의 이야기>의 48편의 시 속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엿보이고 있다.



  '아 역사여

  사색의 무덤이여

  침침한 회랑이여  불행한 자의 기록이여' (7장)            


  '역사가 마냥 나의 감옥이로구나.' (31장)


  '일체의 굴욕과 무자비한 힘을 걷고
  신라, 고구려...

  줄줄이 내려오는 한 민족' (32장)


  '역사와 조국이 잦아드는 들판에  너와 나는 살고 있다' (37장)


  '역사는 잔인한 학살이며' (41장)


  '이 역사엔 더 갈 곳이 없다' (44장)



   끊임없는 외침과 수난의 역사 속에서 갖은 비극과 침체의 밤을 거쳐 오면서, 그 병폐의 도정에서 허무성은 탄생했던 것이다. '잔인한 학살'인 역사는 더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출구도 도피처도 없는 극한상황 - 한의 침입과 사군 설치, 수, 당의 고구려 침입, 거란, 여진, 몽고족의 고려 침입과  고려의 몽고에의 예속, 두 차례 겪은 왜란과 호란, 그리고 청에 대한 사대의 예, 일제의 학정, 남북양단과 6.25의 참변, 독재자의 집정과 민주화의 혁명 - . 신고와 간난의 역사 속에서 파탄의 역사를 지속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오천년 우리의 역사를 읽고 느끼는 독후감은 수치와 모욕으로 얼룩진 비감뿐이다.
  
   객관적 여건에 의하여 지배를 받아온 피지배자의 역사에서 언제 스스로의 의사와 결단으로 나를 내세울 수 있었던가. 마냥 감옥이었던 역사 속에서는 적극적인 자기의지와 자기창조의 굳은 신념은 고사하고, 만신창이의 수척한 몰골만 겨우 유지해 왔을 뿐이다.
  
   따라서, 허탈 상태의 울음은 병폐한 조국과 역사의 폐허 위에서 터지는 통곡이었고, 우리의 몸부림은 억압에서 풀려나려는 비통의 몸짓이었고, 체념의 노래였던 것이다. "다민 나에게 있어, 항상 문제되었고, 문제되어 있는 것은, 시보다는 내 어둠이었고, 어둠이다.  이 해결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그 어둠과 마주 앉아 항상 심문을 받아야만 했다." (<밤의 이야기> 후기에서)
  
   어둠으로 통하는 밤의 어귀에서, 어둠과 마주 앉아, 심문을 받아야만 하는 생활은 '잔인하고도 쓸쓸히'(12장) 그저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차라리 '산다는 것은 굴욕을 말하는 것, 있어본다는 것은 위선을 말하는 것, 있다는 것은 기만을 말하는 것"(37장)이었던지 모른다.  궤도를 잃은, 이 어두운 여로의 연속에서 시인이 담을 수 있었던 감정은 불안, 초조, 포기, 희구 등 '비생존적 생존'의 종말의식 뿐이었다. 따라서 생존 자체가 무의미해진, <죽음>에 직면한 상황 속에서, 다만 스스로의 생멸을 응시할 수 있는 "역사의 의자' 그것으로서 족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허무성 - <죽음>의 상황이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곳' (2 장)


    '죽음으로 직행을 하는 거다' (17장)


   '지금 내가 있는 곳은 -
 

   일체의 부채도 없는 

   지하 5 메터 바로 그 곳' (18장)  


   '죽음만이 가득한 장소
빠져나갈 곳이란 없다' (44장)


   '실로 위대한 거란
 죽음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을 키우다 
   적당한  장소에서 작별을 하는 거다' (45장) 



    우리의 쫓기고 헐벗긴 역사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직감했을 때, 객관적 여건의 상황은 이미 <나>의 생존에 죽음을 강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생존은 무가치해 있었고, '인간이 태어난 곳도, 돌아가는 곳도, 사색하고 고민하는 이유도, 사랑하고 미워하는 이유도 죽음 때문이며, 인간이 도달하는 마지막 자리, 사상, 재산이 모두가 죽음'(8장)이라는 당연한 귀결에 당도한 것이다. 그러면, 이토록 허무의 그림자를 드리운, 구체적인 역사적 요인은 무엇인가?  이 문제의 규명에서 우리는 한국적 허무성의 구조와 그 성격을 살필 수 있다.



   '가난한 풀밭 머리에서

   가난한 풀만 뜯다  

   가난에 쫓겨 다니며 - 
   어머니께서 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17장)


   '가난을 골고루 삼천 만 다같이
 

   가난하게 하여라.' (29장)


   '푼돈으로 역사가 매매되는 쓸쓸한 장소' (28장)


   '굶주린 뱃속에 엉기어
 

   굶주린 그 곳에서 태어나  

   굶주린 젖줄을 빤 굶주린 목이여' (35장)


   '그리고 너와 내가 서있는

   땅덩어리 속에  가득히 괴어 있는 것은  
   번식과 빈곤' (38장)


   '가난한 나라의 길 잃은 시인처럼' (39장)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17장)의 보잘 것 없는 <가난>은 반만년의 역사를 지니고, 한반도라는 뼈아픈 풍토에서 자라온 한국민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아니 가질 수밖에 없었던 유일의 유산이었다. 항상 정치의 불모지대, 견제의 불모지대를 살면서, 우리의 살림에 끼어든 물질적 빈곤의 굴레를 벗어보지 못하고 견디어 온 역사, 그래서 우리는 '생존'에 매달려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 서구인들의 문제가 '실존'이었다면, 우리의 그것은 '실존' 이전의 '생존'이었다.  다 같이 극한 상황이라 표현되는 위기의 요소가 서구의 경우 기계문명에서 온 인간의 소외감, 뉴욕의 고층빌딩에서 풍기는 실존적 불안과 절망이었을 때, 우리는 전근대적 후진성에서 굶주린 배를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실상 있어야 했던 '우리'적인 전통문화의 모색은 요원한 꿈이었다. 민중은 항상 카리스마적 전제의 그늘 속에서 복종과 체념과 운명만을 부둥켜안고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적, 정신적 양식이 넉넉하지 않은 한국의 '밤'과 '어둠' 속에는 무력감과 허허로운 비애만이 가득 차 있었으며,  그것은 기계문명과 이데올로기의 팽팽한 대결에서 온 서구적 금속성이 아니라, 풀밭머리에서 정신적, 물질적 '가난'을 뜯는 식물적 푸념이라는 점에서 한국적 허무성의 성격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성격은 어떠한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수천 년 동안 민족의 정신적 근간이 되어온 유불의 '평정과 안일정신'에서 비롯된, 또 하나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항상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해 선고받았던, 철저한 인종의 미덕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서구에서와 같은 레지스땅스적 상황에 대한 대결도, 부정적 의지도, 질곡에서 탈출하려는 반항적 자세도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인간 스스로의 자주성과 인간탐구를 위해 자각된 성실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가치체계의 부정이라는 서구적 적극성이 없다는 말이다.

   다만, 가치의 상실이 아니라 '무가치의 연속'이라는 역사적 특수성이 반항보다는 무력감을 조성시켜 주었으며, 정신적 안주지가 없는데 대한 허탈감이 늘 우리의 의식구조에 잠재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서는 가장의 권위를, 시회에서는 장유유서의 도덕률을, 국가적으로 피지배자는 지배자의 절대성을 무조건 복종하였으며, 밖으로는 외적의 힘에 섣불리 반항하는 데서 오는 위협감에 떨기보다는 차라리 복종에서 오는 일시적 평화로 마음을 달랬던 것이다. 이러한 병증은 외적 여건이 불리하면 할수록 더욱 강하게 응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밤처럼 마냔 길기만 한 긴 동절엔 퇴적된 인간과 생존의 먼지 속에 끼어 이럭저럭 숨어서 살 수가 있을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대공이 풀리고, 대기가 풀리고, 마을과 도시, 골목과 길이 풀리고, 창과 마음이 풀리는 범이 되고 보니, 별안간 나에겐 일체를 상실한 마음 -"(40장) 이 대목에 이르면 인종과 도피정신은 하나의 미덕으로 포장되어 있다. 개방적이 아닌, 폐색된 상태에서 은거하는 충일한 기쁨,  이것은 노자의 자연예찬과 무이이화(무이이화). 불교의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정신과 다를 바 없다. 이 도피정신은 따지고 보면 무력감, 허탈감의 비극적 패러독스요, 가진 것 없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구조 속에 정립된 위장이며, 허세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 구조와 성격으로 보아 아시아적 특성과도 일치한다. 야박한 현실적 모순에 반발하지 못하는 동양적, 식민지적 기질은 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세동점의 서구적 야욕에서 오랜 침묵의 밤을 겪는 동안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동양의 우계처럼 떠 내리는

   캄캄함 일체를 갈아치워 내리는 무자비한 줄기 
   동양의 지혜처럼
공이었다.' (14장)

     
   '조국은 마냥 동양의 하늘

   낄낄이 손을 잡으며 사라지고 있었다.' (10장)


   '아시아 허허
 가시망 벌판' (36장)


   '
아시아 작은 반도, 경제의 불모지대  

   그리고 동양적 식민지 문화의 불모지대' (46장)

 

우리는 여기서 공초의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을 상기시켜 봄도 좋을 듯하다.

 


   '아시아는 밤이 낳아준 선물이다  

   밤은 아시아를 지키는 주인이요, 신이다 
  
아시아는 어둠의 검이 다스리는 나라요 세계이다'

 


    주인의식이 없이 유랑해 온 민족이 정착한 벽지의 세월은 동굴 속과 같은 길고긴 '밤'의 연속이었고, 이 후진성은 바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식민지를 벗어나지 못했던 동양적 통일개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한국적 허무성은 우리의 역사구조 속에서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특이성을 생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사실은 서구의 위기의식 내지 니힐리즘이 실상 우리의 역사와 사회적 구조에선 빚어질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면서도, 우리는 그 영향을 적지 않게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한 우리의 역사의식의 소산이 아니고, 뉴스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서구적 위기 속에 말려드는 경향을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외래문화의 유입과 이식을 즐겨서가 아니라 이미 현대라는 의식은 이 지구상에 어두운 그림자를 덮게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적 허무성의 특성은 이중적이며 복합적인 콤플렉스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 시인은 솔베르그에 보내는 시에서

 

   '나와 당신은 우리 서로 말과 눈은 같지 않지만 
   역사의 구석 생존의 기슭 - 그 자리에서
 인간의 어둠과 시간  
   그 밤을
 - 지금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28장)
 

   '지금 나의 마음은 비 내리는 구라파
   이 곳 그 곳 어디나 매한가지 
   죽음만이 가득한 장소
 빠져나갈 곳이란 없다' (44장)



   현대적 상황은 우리에게 자신의 짐을 지고 있으면서, 세계 문제를 또 '우리'의 문제로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한국 역사의 발전 상태가 서구의 그것과는 다르면서도, 외적 조건은 벌써 세계를 하나의 역사로 개편할 것을 강요하게 된 것이다. '생존'을 걱정하면서, '실존'의 무거운 짐을 벗기 위한 시지프의 노고가 우리에게도 절실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3


   이제 우리의 모든 논의는 이 허무적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모아져야 한다. 역사의 '어둠'과 '밤'을 배회하는 '길고 지루한 침묵의 여행'은 여기서 끝나야 하며, 밤들의 허허한 추방인 <밤의 이야기>는 과거 우리의 찬송가이면서,  '한국의 밤'에의 고별사가 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허무성의 극복을 위한 모든 작업은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부터 착수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앞서 살핀 바, 한국적 허무성의 생성요인에서부터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첫 단계로 민족적 주체역량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수난과 시련 속에서 삶을 뒷받침하는 정신적 터전과 마음의 기둥을 잃었던 것이다. 절대적 모럴 자체도 가진 것이 없이 '공'으로 살아온 역사의 전도엔 받아 누릴 것이 없었다. 더구나 본래적인 서구의 니힐을 마치 본래적인 '우리'의 것인 양 거기에서 우리의 가치나 이상을 찾으려 하는 흉내는 철저한 '우리 자체의 비(非)우리화'이며, 가치 없는 대지 위에 더 큰 비극을 조성하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현실적 상황 위에서 비극적 요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안일과 무사, 권위에의 무조건적인 복종과 인종이 더 이상  미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모랄 구조의 폐색성이 자유롭고 활발한 창조적 지성을 둔감하게 만든 것이다. 또 전통적으로 관념적 사고의 우위성이 경험적 행위 자체를 무시했던 점도 지적해야 한다. 비관하기 전에 낙관하고, 현실에 대한 객관적 비판과 투철한 파악력과 그것에 대한 판단력은 혼란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해부도인 것이다.  이것은 때로 모순과 불합리에 대한 강한 반항의 자세를 보일 수도 있다. 주체의식의 배양과 창조적 모럴을 파괴하려는 카리스마적 권위에 대항하는 선전포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반항은 합리적 사고와 실증적 실용주의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의식내용의 개선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외부적 상황에 대한 반항은 파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현실 구조가 이미 과거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역사적 의미를 포용하고 있으므로, '복종의 모랄'이 잠재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감안하면서 정체와 낙후를 모면하기 위한 조용한 지적 혁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현대라는 의식 위에서 이 이 땅에 들어와 만연된 서구적 니힐리즘의 극복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일찍이 니체는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도그마를 정립하였다. 사르트르나 까뮈의 초점은 모두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하여 소외의 인간, 절망의 인간은 천부의 선택과 결단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벽을 대결하는 의지를 가지고, 상황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새로운 가치체계의 창조를 이루지 못한 채 자기혐오, 자기멸시의 감정에 사로잡혀, 더욱 초조와 허탈 속에 좌절하여 몸부림치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키에르케고르는 초월의 의미로서 "사람은 신앙에 의하여 섭리 앞에 몸을 던져서 안식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불안이 극복된다."고 하여 선택의 자유를 내세웠던 것이다. 토인비도 현대 문명을 비판하면서 "현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종교의 문제다"라고 하여 기독교 정신의 재현을 외쳤던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엘리어트, 끌로델, 배르나소스, 모리아크 등이 자못 진지하게 이 방면의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현대의 절망적 인간의 궁극적 구제는 영원과의 관계에서 찾아보자는 점에서 동일하다. <밤의 이야기> 48장중에서 오직 한 편, 그는 희미하나마 구원의 가능성을 '하나님'에게서 찾아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  당신이 실로 계시온지 안 계시온지 모르나
  우리의 재산이라곤 당신뿐이옵니다.
  어려서도 그랬고 . 커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42장)

 


    그는 어느 모로 보나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러나 상실의 인간이 인간회복의 거대한 과제를 짊어지고 방황하는 동안, 그래도 다시 영원과의 관계에서 자아를 해석하려 했다면, 우리는 영원히 닫혀진 '신앙에의 길'에 물을 수밖에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마태복음 11: 28)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바위그늘'의 휴식(T. S 엘리어트)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근대인의 옵티미즘 속에 탄생한 니힐리즘, 지혜로운 솔로몬의 가슴 한가운데  간직될 수 있는 허무주의,  이것은 곧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할 줄 아는 자세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던 것이다. 

                                                            

4



   <밤의 이야기>는 시보다도 고백이었다. 예술이라기보다 한국적 허무성의 독백이었다. 병든 언어로 구축되어, 마치 장송행렬과도 같이 된 우리의 시는 하루 속히 건강 재검진의 절차를 밟을 필요가 있다. 반만년 동안 찌든 민족의 정신사에서 비극을 정화하기 위하여 빈곤과 탄식에 더럽혀진 조국의 창을 건전한 사상과 원대한 이상을 구현하는 참신한 언어로 닦아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먼저, 결여된 역사의식을 찾아 어떠한 외적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주체성을 확립하고, 거센 세계 정신사의 물결 위에 흐르는 니힐리즘의 요소를 제거하는 일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밤의 이야기>는 시인 자신의 말대로 <밤>들의 허무한 추방이어야 한다.       
 

 

<주> 이 글은 1963년 6월 1일부터 8월 15일 사이에 마련된 <20세기 강좌 >(박우사) 간행기념 신진논문 모집에 응모한 90여 편 중에서 입선된 작품이다. <二十世紀講座> 전7권 중 5권, <二十世紀韓國> 신진논단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 나는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출처>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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