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군(軍) 생활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장교보직처 포병기갑과 근무 -
글 · 남상학
* 육군본부 근무 시절의 포병기갑과 동료들과 함께 (앞줄 우측이 본인)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이것은 우리나라 대표군가 가사의 일부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노래를 모르는 이가 없다. 군가이면서도 누구나 힘들 때 부르면 힘이 나는 그런 노래다. 현역 생활을 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전역한 사람은 호호백발이 된 뒤에도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흥얼거린다. 국방의 의무는 교육, 근로, 납세의 의무와 함께 국민의 4대 의무에 속하므로 대한민국 남아들은 누구나 일정한 나이가 되면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키는 병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런데도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병역을 기피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을 보면 참 한심한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재학 중 군대에 가는 것이 통례였는데 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대학을 마치고 입대했다. 그래서 당시 재학 중 입대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무 기간 단축이라는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나이 들어 군대생활을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입대를 앞두고 1965년 3월 18일 어머님이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시는 사건이 발생하여 군 입대 전부터 예기치 못한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생과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두 남동생만을 남겨둔 채 입대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1965년 5월 5일, 나는 어머님의 장례를 마치고 논산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달리는 차창을 통하여 먼 산을 바라보던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군 생활에 대한 불안감이나 초조감에서가 아니었다. 어머님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감정이 남겨진 동생들의 모습에 겹쳐지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세를 바르게 다잡았다. 이미 나는 입대를 앞두고 기도하던 중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장 10절)는 말씀에 붙들렸기 때문에 동생들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출가하여 지방에 살고 계신 누님의 가정이 서울로 이사하여 동생들을 돌보기로 하고, 그 준비기간 동안 큰어머님이 당분간 집안일을 봐 주시기로 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논산훈련소 28연대는 내가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태어난 곳이다. 전반기 신병 훈련이 한창 진행되던 어느 오후였다. 점심을 먹고 야외 훈련을 위하여 막사 앞에 정렬을 하고 있을 때 지프 한 대가 달려와 멎었다. 중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차에서 내리자 중대장이 달려가 거수경례를 했다. 이어 교관들까지도. 지프에서 내린 장교는 논산훈련소본부 군종참모였던 중령 박민수 목사였다. 안면은 있었지만 목사님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중대장의 호명을 받고 흙투성이 훈련복을 입은 채 박민수 중령 앞으로 나가 거수경례를 했다. 입대 하기 전 감리교본부에서 잠시 일을 돕고 있을 때, 목사님이 감리교 본부에 오셨다가 내 입대 사실을 아셨던 모양이다. 목사님은 감리교본부 교육국 청년사업부 간사로 일했던 차현회 목사님과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목사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열심히 훈련을 받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목사님의 방문은 고된 훈련을 받는 나에게는 큰 힘과 위안이 되었다.
전반기 훈련을 마칠 때쯤이면 훈련병들은 후반기 훈련을 받게 될 것인지 아니면 특과학교로 갈 것인지의 문제가 최대 관심사였다. 후반기 훈련은 고될 뿐만 아니라 훈련이 끝나면 전투병으로 전방 지역에 배치되는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나는 경북 영천에 있는 부관학교로 가서 인사업무 담당 교육을 받게 되었다. 나는 이미 709(인사행정) 주특기를 받고 있었으므로 부관학교로 가게 된 것은 인사행정병으로서는 정해진 코스나 다름 없었다. 부관학교에서 나는 인사행정병에게 필요한 교육, 예컨대 펜글씨 연습, 타이프라이터, 공문서 작성, 일보 작성, 전언통신문 작성 및 통보 방법 등 인사행정에 필요한 여러 교과과정에 걸쳐 교육받았다. 특히 부대 배치는 성적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에 열심히 교육에 임했다.
부관학교 시절, 나는 잊지못할 추억 하나를 갖고 있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친 뒤 훈련병들은 기간병들의 인솔로 금호강 강가로 나간 적이 있다. 강물에 더위를 식힐 겸 휴식의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훈령병들은 옷을 벗어던지고 함성을 지르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목욕을 마친 우리들은 자잘한 돌이 깔린 강가에 대열을 지어 앉았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강가에 환한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반별로 노래자랑이 벌어졌다. 몇 곡의 노래가 불려진 뒤 한 교육생이 자청하여 대열 앞으로 나가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안다성이 부른 “사랑이 메아리 칠 때”였다. 이 노래는 달밤의 분위기 속에서 청중을 압도해 나갔다. 마음 깊숙이 애절하게 파고들면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든 훈련병들이 한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바람이 불면 산위에 올라 노래를 띄우리라
그대 창까지 달밝은 밤은 호수에 나가
가만히 말하리라 못잊는다고 못잊는다고
아~~진정 이토록 못잊을 줄은 세월이 물같이
흐른 후에야 고요한 사랑이 메아리친다
꽃피는 봄에 강변에 나가 꽃잎을 띄우리라
그대 집까지 가을밤에는 기러기 편에
소식을 보내리라 사무친 사연 사무친 사연
아~ 진정 이토록 사무칠 줄은 세월이 물같이
흐른 후에야 고요한 사랑이 메아리친다.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어느 훈련병은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렸고, 또 다른 훈련병은 굵은 눈물을 닦아냈다. 또 어떤 훈련병은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두고 온 부모 형제, 아니면 애인을 그리워서였을 것이다. 나 역시 두고 온 동생과 여자 친구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노래의 위력이 이렇게 큰 줄을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달 밝은 밤의 분위기는 저마다의 가슴에 애틋한 사연을 떠올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그것은 교육이 끝나기 1주 전, 내 가장 친한 친구 박태남(朴兌男)이 위문차 나를 찾아 왔던 일이다. 서울에서 영천까지 그 먼 길을 찾아온 것이다. 당시 부관학교에서는 훈련 종료 1주전 토요일, 꼭 한번의 외박이 허용되므로 친구는 그 사실을 알고 토요일을 택해 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친구는 부관학교를 나와 이곳 영천에 있는 탄약사령부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지 얼마 안 된 터라 영천의 지리는 물론 이 지역 부대에 근무하는 사람 중에 지인(知人)들도 많았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부관학교를 마치고 부대배치를 받는데도 영향을 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날 밤 나는 부관학교 선배이자 친구로서 영천 시내의 한 여관에서 밤 늦도록 깊은 우정을 나눴던 것이다.
부관학교 졸업과 함께 나는 서울에 있는 육군본부로 발령을 받았다. 전체 수료생 200명 중에서 7명만이 육군본부로 배치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뛸 듯 기뻤다. 고민하며 기대했던 일이 최상의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미 내 처지를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확신했다. 훈련소에서 부관학교에 온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인데, 여기서 또 한번의 기적을 경험하다니.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기쁜 마음에 들뜬 채로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단숨에 육군본부 수용대로 달려갔다. 신병 신고를 하는데, 신고를 받는 육군본부 수용대 고참병장은 제천고등학교 선배이자 내 친구의 형님이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하나님은 내가 가는 곳마다 나를 위해 필요한 사람을 미리 예비해 놓으신 것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이 없었다. 반갑게 인사하고 나서 인사카드를 작성한 뒤 나는 육군본부의 각 부처에서 인원을 보충하려고 온 인사담당자들과 면담을 끝내고 그들을 따라 이동했다. 내가 따라간 곳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장교보직처라고 했다.
나는 인사참모부 장교보직처에 도착하자마자 또 신고를 했다. 그런데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 카드를 훓어 본 고참이 사무실 한켠을 향하여 누군가를 손짓하며 부르고 있었다. 저쪽에서 다가온 사람은 남자가 아닌 여자였고, 그 여자는 놀랍게도 대학의 같은 과 동기 여학생이었다. 대학 동창 여학생을 군대에서 만난다는 것은 전혀 의외의 사건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문관으로 임용되어 이곳에서 와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치고는 참 신기한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대한민국 육군의 최고 기관인 이곳 육군본부에서 군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인사참모부 장교보직처는 전투병과인 보병, 포병, 기갑을 비롯하여 항공 장교의 인사카드 작성과 인사행정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400여 평 가량 되는 넓은 홀에는 철제 캐비닛들이 즐비했다. 이 캐비닛은 대한민국 육군의 보병, 포병, 기갑병과 장교와 항공장교의 인사카드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내가 일할 자리는 장교보직처 포병기갑과였고, 그 중 기갑장교 담당이었다. 보병과 포병은 장교의 숫자가 하도 많아 계급당 몇 사람이 붙어야 하는데, 기갑장교는 영관, 위관 합하여 1,000명 미만이어서 나 혼자 담당했다. 따라서 내가 하는 일은 기갑장교 전원의 인사카드 작성과 관리, 진급심사카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매일 예하 부대에서 올라오는 일보를 근거로 변동되는 인사사항을 기록하고, 기갑장교 인사담당관인 주창돈(周昌敦) 중령의 업무를 돕는 일이 일과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기갑장교의 모든 인사업무는 주창돈 중령과 나, 단 둘의 몫이었다.
주 중령은 계급의 상하관계로 이어지는 특수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사병인 나를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전적으로 신뢰해 주었다. 그는 소탈한 인품과 정이 많았다. 그는 일병 시절부터 병장으로 제대할 때까지 나에게 한번도 얼굴을 붉히거나 화를 낸 적이 없다. 사사로이 전방부대에 가는 일이 있을 때는 나를 대동하는 것을 좋아했고, 내가 보신탕을 배운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영향이었다.
당시 숙소인 내무반은 길 건너 언덕 위(지금의 국방부 건물 부근)에 있었다. 업무가 끝나면 영내에서 저녁을 먹고 정문을 나와 길 건너 언덕으로 올라간다. 소속은 육본사 1중대 1소대 제1내무반, 육군 전체에서 선임 내무반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내무반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시 길을 건너와서 육본 정문으로 들어와 아침식사를 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근무지와 내무반이 대로(大路)를 사이에 두고 구별되어 있다는 것은 통제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으므로 단속 기간을 제외하고는 이 점을 악용하여 외출, 외박을 하는 등 내무반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병들도 있었다.
군 생활 중 1년에 한번씩 진행하는 장교 진급심사를 앞두고는 3개월 전부터는 진급카드 작성에 들어가야 한다. 진급카드 작성은 장교들의 진급을 심사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이므로 경력(지휘관, 참모, 교관 경력 등), 군사학교(초등군사반, 고등군사반, 육군대학 등)에서 이수한 성적, 상벌 사항, 부대 상급 지휘관이 준 고과점수 등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비밀을 유지해야 하므로, 본부사령실에 야근 통보를 내놓고 밤 10시 이후까지 사무실에서 작업을 했다. 이런 경우 매일 밤 9시 내무반 점호에는 참가하지 않아도 되었다. 규율 속에서 살아야 하는 군인으로서 점호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어찌 그리 반가웠던지. 특별한 업무를 맡았다는 핑계로 나는 군 생활에서 많은 자유(?)를 누린 셈이다.
1967년 10월, 나는 삼각지 육군본부에서의 행복했던 군 생활을 마치고 병장으로 제대했다. 30개월에 걸친 군 복무는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사내다운 담력과 의지, 끈기와 실천력 등을 배우는 계기였다. 입대 전 막막하기 만했던 군 생활은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심으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필요한 때, 필요한 장소에, 꼭 필요한 사람을 보내셨던 것이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내 군 생활 내내 함께 하셨던 것이다.
▲논산훈련소 훈련병 시절
▲ 육군 부관학교 인사행정반 304기 졸업기념 사진(1965. 8. 21)
▲육본사 근무 시절
▲육본사 근무 시절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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