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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호된 죄값을 치른 제부도 여행

by 혜강(惠江) 2011. 6. 30.

 

호된 죄값을 치른 제부도 여행

 

 

글 · 남상학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제부도로 처음 여행을 간 것은 1973년이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나는 가깝게 지내던 영어과 지승일 선생님으로부터 제부도 여행에 대한 제안을 받았다. 여름방학 보충수업이 끝나면 고3여학생 두 명과 함께 제부도로 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을 받고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성숙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들과의 사적인 여행은 누가 봐도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고, 또 괜한 일로 좋지 않은 소문이라도 퍼지면 무슨 말로 어떻게 변명을 할 것이며, 결혼한 지 몇 년 안 된 내 아내에게는 무어라 말할 것인가?

  그랬더니 이들은 꼭 나를 동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학교 시절 내가 한번 담임을 한 적이 있었고,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서 2학년 때 다시 담임하면서 연속적으로 사제의 관계가 이어진 사이였다. 선생님은 재차 이들이 절실히 원하는 일이고, 대학 진학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터라 소원을 들어주자는 것이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우선 아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를 무척 따르는 아이들이고, 대학 입시 준비로 받는 스트레스를 풀어줄 수 있고, 여고 시절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는 일이라며 장황하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던 아내가 마지못해 허락해 주어 사제간 여행은 어렵게 성사되었다.

  여름방학이 후반부로 들어설 무렵이었지만, ‘말복의 무더위’라더니 늦장마 끝의 막바지 더위는 기승을 부렸다. 제부도까지 가려면 기차로 수원까지 가서 역사 맞은편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수원으로 이동하여 시외버스를 탔다. 복잡한 도시를 벗어난 버스는 어느 새 농촌의 멋진 풍경들 사이로 질주했다. 아스팔트가 안 된 울퉁불퉁한 길이었지만 우리는 정겨운 초가집과 영글어가는 곡식들을 바라보며 신나게 달렸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간간이 보슬비가 부렸지만 해방감에 들뜬 우리는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버스는 비봉, 남양, 서신을 거치며 승객을 내려놓고, 제부도로 들어갈 때에는 우리 일행 외에는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드넓은 갯벌에 돌과 자갈을 깔아 만든 제부도 길은 하루 두 번씩 물길이 열리므로 ‘모세의 기적’을 연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밀물 때는 물이 차서 그 길은 물속으로 자취를 감췄다가 다시 몇 시간 후에 열렸다.

  요즘 제부도는 엄청남 시설들이 들어서고 사철 사람이 몰리는 관광지로 탈바꿈했지만 그 때는 가옥이 통틀어 10여 채 정도였다. 그나마 제부도 뒤쪽(서쪽)에는 5~6채에 불과했다. 주민들은 모래땅에 땅콩을 심고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았다. 따라서 성수기를 제외하고는 한가하게 보내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도 숙소를 얻기 위하여 매바위 가까운 동네로 들어갔다. 하룻밤 지낼 숙소를 알아보았으나 도무지 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언덕 쪽 한 집을 소개받았으나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방이 둘은 있어야 하는데 난감했다. 우리가 타고 온 버스는 막차이고, 그 버스마저 우리를 내려놓고 이미 떠난 뒤였으니 어쩌겠는가.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 되어 서로 얼굴을 쳐다보던 우리는 하느 수 없이 짐을 풀었다.

  배낭을 풀고 나니, 잔뜩 내려앉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습도가 높아서인지 방안은 무덥고 답답했다. 기분을 전환할 겸 밖으로 나가자고 했더니 두 여학생은 방이 모자라 마음이 상했던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며 방에서 쉬겠다고 했다. 지선생과 나는 우산을 쓰고 해변을 걷었다. 해변은 약간의 바람기로 다소 시원했다. 멀리 제부도의 상징처럼 서 있는 매바위가 우리를 환영하는 듯했다. 마침 사리 때(간만의 차가 심한 보름이나 초하루 전후)라 썰물로 드러난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넓은 모래사장을 걸어 바다끝을 향해 걸어나갔다. 비 때문인지 사람들이 없어 우리만의 천국이었다. 이 넓은 모래벌판이 두 사람 차자라니 가슴이 활짝 트이는 기분이었다. 꽤 많은 거리를 걸어 나갔는데 저 멀리 고기를 잡기 위해 쳐놓은 그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정한 간격으로 지주를 세우고, 지주에 지탱하여 쳐놓은 그물은 밀물 때 물길을 따라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이 되어 바다로 이동할 때 퇴로를 차단하여 어획하는 방식이다. 원시적인 어획방식이지만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 물고기를 잡는 친환경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호기심이 발동한 우리는 그물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겨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물 군데군데 큰 꽃게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더운 날씨에 무엇이 바빠서 그물 주인은 거두지 않은 것일까? 섬이 오래 살았던 내 경험으로는 이 더위에 그냥 방치해 두면 밀물이 되어 그물은 다시 물에 잠길 것이고, 꽃게는 상할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상할 바에야 꽃게 몇 개 정도 따가면 어떠랴! 우리는 묵시적인 동의하에 별로 죄의식이 없이 그물에 매달린 꽃게를 몇 마리 챙겼다. 담을 그릇도 없으니 쓰고 온 우산을 위로 향하게 하여 우산에 담았다. 저녁 반찬은 훌륭하게 차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발길을 돌려 나왔다. 지 선생은 휘파람까지 불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어져 발길을 재촉하며 나오는데 멀리 마을 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어쩌나? 나는 순간 꽃게를 따온 것이 생각났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꽃게를 떠온 우리를 닦아세웠다. “남의 물건을 몰래 훔친 것은 절도죄이므로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며칠 전 이곳에 놀러온 사람이 꽃게 두 마리를 훔쳤다가 벌금 30만원을 냈다면서 기세를 올렸다. 변명도 하고 사과를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학생들과 함께 여행 와서 절도죄로 걸려든다면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벌금도 억울하지만 학생 앞에서 교사의 체면은 어찌되는 것인가? 이런 때는 그저 비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물에서 따온 꽃게를 다 내어주고 용서를 구하며 통사정을 했다. 한참 노려보던 여자는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알라’며 우리가 따온 꽃게를 거두어 가지고 가버렸다. 더 이상 곤욕을 치루지 않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우리는 힘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민박집에 돌아오니 그 사이 학생들은 저녁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는 저녁을 달게 먹었다. 우리가 상상했던 여름 밤 바닷가의 낭만은 쏟아지는 빗줄기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별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산책이라도 해야 하는데 하늘은 무심했다. 힘들게 얻는 기회를 의미 없이 보내게 된 것이 무척 아쉬웠다. 선풍기도 없는 비좁고 눅눅하고 무더운 방구석에서 한 밤을 보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더구나 이곳의 복병은 가공할만한 공격력으로 덤벼드는 모기의 습격이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해서 모기장을 얻어 치긴 했지만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어서 별 도움이 되질 못했다. 한 번 물리면 퉁퉁 부어오르는 섬 모기의 위력 앞에서 우리는 모기에 물린 곳을 긁느라 우리는 스승의 품위를 지킬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도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는 더위와 모기의 습격은 밤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방은 네 사람이 다리를 뻗고 눕기에도 비좁았다. 그런데 고3 여학생의 몸은 만만치 않았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남자들은 밖에서라도 잘 수 있다지만 그날은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밤이 깊어갔다. 예나 이제나 잠복을 타고난 나는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 세 사람은 모두 좁은 방에 앉아 있었다. 지 선생과 학생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밤을 꼬박 새웠다고 했다. 서로 몸을 부딪쳐야 하는 비좁은 방에서 선생님과 함께 잠을 청한다는 것 자체가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살인적인 더위와 모기떼의 습격 속에서 잠을 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리라. 자세히 살펴보니 내 몸엔 모기에 물린 자국이 여러 곳에 퍼져 있었다. 악몽을 꾼 것 이상으로 하루를 힘들게 보낸 우리는 다음날 서둘러 짐을 꾸려 서울로 돌아왔다.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위한 여행이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더 끔찍한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돌아온 여행이 되어 나는 미안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날 나는 그 끔찍한 한밤의 무더위와 모기떼의 습격이 남의 그물에서 꽃게를 따온 것에 대한 <호된 죄값>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변명해도 내가 저지른 행위 자체는 분명 불법이고, 마땅한 죄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된 죄값’을 치른 여행은 뒷날 남의 물건에 손을 대서는 절대 안 된다 는 경고가 되어 나를 일깨우곤 한다. 나와 동행했던 학생들도 여름철 제부도를 생각할 때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씁쓰레 미소를 지을 것이다. 만약 원한다면 그 옛날을 추억하며 다시 제부도를 찾아가고 싶다. 오늘은 하룻밤 고생하며 보냈던 그들이 몹시 그립다.

 

 

 

 


*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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