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경아의 지극한 정성 - 전남 해남에서 미국 산마리노까지

by 혜강(惠江) 2011. 7. 1.

 

경아의 지극한 정성  

 

- 전라남도 해남에서 미국 산마리노까지

 

 

· 남상학

 

 

 

▲경아의 초청으로 방문한 헌팅턴 박물관 

 

    2005년, 내가 미국 서부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미국에 이민 가서 LA 근교 산마리노(San Marino City)에 살고 있는 경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국 도착 일정과 여행 계획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메일로 알려줬더니 다시 연락이 왔다. 일정을 하루나 이틀 정도 앞당길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고 주변 지역의 여행을 돕고 싶은데 문제는 자기의 한국 방문 일정과 공교롭게 겹친다는 것이었다. 경아는 내가 LA에 도착하는 날 아침, LA공항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내외는 당시 미국 동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는 둘째아들의 초청으로 서부여행을 예약해 놓고 있어서 도저히 변경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부득이함을 알렸더니, 경아는 무척 아쉬워하며, 다음에 미국 방문 기회가 오면 꼭 초대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런데 미국으로 떠나기 사흘 전 경아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자기의 한국행 출발 일정이 아침에서 저녁으로 조정되어 한나절의 여유가 생겼다며 그 사이에 만나고 싶으니 우리가 LA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자기가 살고 있는 산마리노(San Marino)에 와달라는 것이었다.  집에 초대할 수 있는 시간은 없어도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헌팅턴 식물원(Huntington Botanical Garden)에서 잠시 관광도 하고 점심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경아의 간곡한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 청을 수락했다. 아침에 LA공항에 도착한 아내와 나는 아들 식구와 함께 렌트한 차를 타고 헌팅턴식물원으로 향했다. 식물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아는 우리 부부와 아들 내외와 어린 손녀 등 다섯 식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본래 이 식물원은 19세기 캘리포니아 개발 초기 철도와 에너지 사업 등으로 큰 재산을 모은 헨리 헌팅턴에 의해 이루어진 곳으로 48만㎡에 도서관, 미술관, 야외식물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시간의 여유가 없는 우리는 야외식물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계 각국의 선인장을 모아 놓은 열대식물정원(사막 정원), 장미정원과 동백나무 정원, 일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원 등은 헌팅턴의 자랑거리였다. 정원을 산책한 후 경아와 우리 식구는 정원 내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같이 했다. 꽃과 나무가 우거진 식물원의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스테이크와 고급케이크와 과일로 식사를 했다. 오후에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하는 터라 긴 만남은 아니었지만, 경아는 최선을 다해 우리 가족을 접대했다. 그런가 하면 경아는 자신의 한국행으로 나를 만나지 못할 것에 대비하여 동기생 친구(신자연, 고성은)에게 한인타운의 한식당 <만나>에서 불고기 만찬을 대접하도록 주선해 놓았던 것이다.

   경아와 나 사이의 각별한 인연은 고등학교 3학년 때로 올라간다. 경아는 해남종합병원 원장의 귀동딸로 서울로 유학 와서 숭의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고3 때 나는 경아의 반을 맡아 국어를 가르쳤다. 경아는 수업시간마다 늘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태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연락이 끊겨 서로 소식을 모른 채 지냈는데, 어느 날 교무실로 우편물이 날아들었다. 뜯어보니 해남종합병원에서 발행되는 사보(社報)였고, 편집인이 경아로 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가 해남종합병원의 기획홍보를 맡아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었다. 경아는 사보를 발행할 때마다 내게 우송해주었다. 그리고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물어올 때마다 해남에 둘러볼 곳이 많다며 꼭 한 번 내려오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러던 차 1983년 겨울방학에 나는 함께 근무하는 선생님 네 분과 3박 4일간 일정으로 남도여행을 떠났다. 시외버스를 타고 여수로 내려가 오동도를 시작으로 고흥반도 앞에 떠있는 내나로도와 강진의 다산초당, 백련사를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해남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고택인 녹우당과 천년 고찰인 대흥사, 한반도의 최남단인 땅끝마을(土末)을 들러볼 계획이었다. 해남에 도착한 것은 셋째 날 정오쯤, 우리는 해남버스터미널 부근에 숙소를 정해놓고 점심을 먹었다. 나는 해남에 있는 경아를 떠올리고 경아에게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이곳까지 와서 전화도 없이 그냥 간다는 것은 도리가 아닌 듯싶어서였다.  
  
   내 전화를 받은 경아는 무척 반가워하며 어디냐고 물었다. 해남에 왔다고 했더니 일정과 인원을 묻고는 즉시 달려왔다. 잠시 후 구급차 한 대가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구급차에서 경아가 내렸다. 인사를 하자마자 상황을 설명했다. 자기가 타는 차는 마침 고장을 수리하러 공장에 들어가고, 다른 승용차를 가지고 오려 했으나 인원이 초과되어서 할 수 없이 구급차를 몰고 나왔다는 것이다. 경아는 선생님들을 불편한 구급차로 모셔서 죄송하다며 타라고 했다. 우리는 구급차를 타고 정해진 일정대로 신나게(?) 해남지역을 누볐다.    
  
   해남여행의 일정이 끝났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저녁을 드셔야 한다며 읍내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구급차가 멈추어 선 곳은 한정식 집이었다. 경아의 오빠가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정중히 안내했다. 경아는 우리를 대접하기 위하여 오빠까지 동원하였던 것이다. 오빠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동생의 스승을 위하여 각별히 예의를 갖춰 우리를 대접했다. 차려내온 큰상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상 위에는 40여 가지가 넘는 반찬으로 가득했고, 한겨울인데도 푸른 보리 새싹으로 끓인 된장국, 떡갈비, 삼합(돼지고기와 묵은 김치와 삭힌 홍어), 조기구이, 여러 가지 종류의 젓갈 등 산해진미로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곳은 남도 한정식의 대표식당 천일식당으로 이미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 뒤로 경아는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한 동안 잊고 지났다. 그런데 꽤 세월이 흐른 뒤 경아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미국에 정착한 후 겪어야 하는 이민생활의 애환과 함께 남편의 사업을 돕고 아이들을 키우는 재미로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로 나는 경아와 가끔 메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미국에 사는 경아를 미국 LA에서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1월 남가주숭의동문회 정기총회가 열렸을 때였다. 그 때 경아는 동기생들과 함께 나를 극진히 환영해 주었다. 본래 남가주숭의동문회로부터 초청을 받은 것은 나와 아내였지만, 이듬해 숭의 10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해외 동창회 임원들과 미리 상견례라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아내 대신 새로 교장직을 맡은 유재영 교장과 동행했다. 1월 18일, 우리가 투숙한 한인파운 메디슨 윌셔 프라자호텔은 숭의의 날이었다. 100여명이 넘게 참석한 동문들과 미국으로 이주한 옛 스승들이 함께 한 모임은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1부 예배에서 나는 설교를 겸한 신년메시지를 전했다. 2부에서는 참석자 소개, 남가주 숭의코러스(지휘:이선경)의 특별순서와 기별 및 합동 사진촬영이 있었다. 그리고 3부에서는 유명 MC(조창식)의 사회로 장기자랑, 마당놀이, 경품 잔치, 그리고 마지막에는 교가 제창으로 성대한 숭의동문회 모임이 끝났다. 주최측이나 호텔측 모두 예상치 못한 대성황에 놀라워하며 만족했다.  
  
   행사를 끝내고 호텔방으로 올라왔는데, 동창회 임원들이 찾아와 다음날부터 우리의 관광 일정과 모임들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뒤 회장이 주저하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인이 절대 비밀로 해 달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알려야 할 것 같다며 우리 두 사람의 초청 경비는 경아가 자청하여 부담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다음날 나는 경아 및 동기들(고성은, 신자연, 이명혜)과 함께 할리우드의 영화, 텔레비전 스타, 유명 뮤지션의 이름이 새겨진 별 모양의 브론즈 2,500여 개가 깔린 약 5㎞에 이르는 스타의 거리를 걷기도 하고, 블루베리 힐,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함께 구경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동문회 홍정자 회장 집에 초대되어 즐겁게 저녁만찬을 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도 전연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고 귀국하여 나는 경아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동문회의 공적 행사를 위해, 또 나를 위해 자진하여 경비를 부담해 준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경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늘 나에게 과분한 정성을 기울였던 것이다. 경아는 내 편지를 받고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성의라고 했다. 그리고 경아는 자기가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 <팔도강산>을 예로 들었다. 학생 시절 자기는 이 영화에서 김희갑 ․ 황정순 노부부가 독립한 1남 6녀의 아들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전국 팔도를 유람삼아 돌아보는 내용이 그렇게 좋아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퇴직한 내게 자식을 돌아보는 심정으로 미국여행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친자식도 하기 어려운 일을 경아는 행동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서울로 유학 와서 외로웠을 경아에게 나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교실에서의 가르침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경아는 큰 것으로 갚으려 했다. 돈이 있다고 되는 것만이 아니다. 존경과 감사도 특별한 정성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을 그는 실천했던 것이다.  나는 경아가 한국에 오면 깔끔한 식사 한 끼라도 같이하고 싶었다. 그런 뜻을 전했지만 경아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면서도 떠나가 직전에 연락을 주어 모두 불발로 그쳤다. 사제간의 정(情)도 때론 주고받아야 더욱 아름답게 꽃이 피는 법인데 좀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태도를 바꾸지 않은 한, 이런 나의 뜻은 영원히 미제(謎題)로 남을 것 같다. 나는 경아의 거듭된 사랑과 정성에 감사하면서도 끝내 갚을 길이 없다.  

 

 

▲ 헌팅턴 식물원을 방문했을 때의 우리 내외와 제자 김경아(왼쪽)

 

▲한국에 방문했을 때의 김경아(남양주 한강변 한정식집 '초대'의 입구)

 

 

*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