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해당화꽃, 너는 내게 불붙는 꽃이었다.

by 혜강(惠江) 2011. 7. 1.

 

 

해당화꽃, 넌 내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다.

 

 

글 · 남상학

 

 

 

 

 

  해당화 꽃에 대해 전해지는 전설이 하나 있다.  당나라 현종은 어느 날 심향정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평소에 지극히 사랑하는 양귀비를 불렀다. 이 때 양귀비는 지난밤에 마신 술이 깨지 않아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양귀비는 황제의 부름을 거역할 수 없어서 황급히 나가기는 했지만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옥같이 흰 얼굴은 불그레한 홍조가 곱게 피어 있고, 두 눈은 가느다랗게 떴고, 몇 가닥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에 나부끼는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예쁘기만 했다. 현종은 한 동안 양귀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양귀비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아직도 술에 취해 있느냐?” 그러자 양귀비는 “해당화의 잠이 아직 깨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양귀비는 자신의 붉은 얼굴을 해당화에 비유했던 것이다. 해당화는 바닷가 모래땅에서 한 여름 해변 풍경을 장식하는 사랑스런 꽃으로,  아름다운 바닷가에 붉은 정열의 꽃으로 피어 아련한 그리움의 상징이 되었다. 때로 늦은 봄 해변에 아침이슬을 머금고 바다를 향해 피어있는 해당화는 어쩌면 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처럼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해당화가 곱게 핀 바닷가에서 나 혼자 걷노라면 수평선 멀리 갈매기 한두 쌍이 가물거리네. ~" (장수철의 <바닷가에서>라는 동요처럼 바다와 관련된 노랫말이나 시구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또 해당화는 선비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많은 문인 문객들의 예찬을 받아왔다. 그리고 먼 바닷가를 향해 끝없이 피워 올리는 홍자색 그리움, 그 그리움이 짙으면 원망의 마음이 붉은 열매로 맺히기 때문인지 해당화의 꽃말은 ‘원망’으로 불리기도 한다.  "해당화 피고 지는 어느 섬마을에……"란 노랫말도 철새 따라 떠나버린 연인(섬마을 선생님)에 대한 원망을 노래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꽃말과는 관계없이, 한여름 뙤약볕 아래 당당하게 핀 해당화를 좋아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서해의 작은 섬 이작도 해변에는 어김없이 해당화가 곱게 피었다. 해당화 핀 모래언덕에 서서 수평선 멀리 떠가는 배를 바라보며 수많은 그리움을 날려 보내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한 여름 해변에 뜨거운 햇볕을 받고 핀 정열의 꽃 해당화를 볼 때마다 나는 지난 추억을 되살리며 남다른 그리움에 잠기곤 했다.

  그런데 내게는 해당화의 이미지로 남아 있는 한 제자가 있었다. 외모와 얼굴 표정, 행동이 해당화와 꽤 많이 닮아 있었다. 그 제자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내게 국어수업을 받은 학생이었다. 훤칠한 키에 목이 길고, 미인형의 갸름한 얼굴에 눈이 서글서글해서 또래의 학생 중에서는 출중한 외모를 지닌 편이었다.

 

  그런데다 웃음을 띤 밝은 표정에 음성조차 낭랑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교실에 퍼질 때면 반 친구들은 지루함을 떨쳐버리고 활기를 되찾기도 했다. 반 학생들은 국어시간마다 싱글벙글 얼굴이 밝아지는 그 친구를 바라보며 ‘선생님을 좋아해서 그렇다’ 며 놀려주면서 즐거워했다.  나는 그 때, 그녀의 모습이 마치 여름철 바닷가에서 정열을 품어내는 해당화와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여학교에 근무하다 보면 유난히 따르는 학생이 있기 마련이다. 첫인상이거나, 평소의 언행이거나, 외모거나, 인간성이거나, 가르침의 특별함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성적인 매력 등 그 어떤 이유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선생님을 이상형으로 정해 놓고 선생님을 좋아한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가 상담을 받기도 하고, 멘토로서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지만, 그냥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관계는 훗날 멋진 추억으로 남아 인생을 풍요하게 만들어 가기도 하고, 졸업한 후에는 더욱 아름다운 인간관계로 이어가기도 한다.  그러므로 굳이 탓할 이유도 없고, 금할 방법도 없다. 따라서 이것을 이성간의 관계로 설정해 놓고 이상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교사는 따르는 학생에게 특별히 친근한 태도를 보이거나 다정한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학교에서는 경솔한 언행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면 하찮은 일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입학원서를 작성하느라 분주할 때였다, 나는 그 학생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택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는 말을 들었다. 때 마침 모(某)여행사에서 신입사원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나는 그 학생을 불러 여행사를 추천했다. 외모나 적성으로 보아 여행사 직원으로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갑작스러운 제의에 학생은 반가워했고, 다른 친구들이 대학진학을 위해 애태우고 있을 때 이미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여행사에 입사한 그녀에게 여행사는 좋은 직장이 되었고, 그 후로 여행업계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는 가끔, 바쁘게 돌아가는 업무 때문에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전화로 전해 왔다. 그러나 연말이면 여행사의 신년 캘린더와 크고 작은 수첩을 싸들고 찾아와 연말 인사를 잊지 않았다. 나는 그 때마다 “잊어버릴 만하니까 나타났구나.”라며 농담을 건네곤 했다.

  그렇게 몇 해를 지나고 1987년 나는 고등학교 교감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교의 책임을 맡은 나는 학교의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하여 체재를 정비하고 새로운 계획과 추진방향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구상 가운데 하나로 나는 교사들의 사기 진작과 활력을 불러 일으키고 교육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당차게 전 교직원의 해외연수를 구상했다. 
세계화가 화두로 대두된 시대에, 다른 학교보다 앞서서 교사 해외연수를 실시한다면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나의 이런 제의에 전 교직원이 환호했고, 이어 여행 시기와 기간, 대상 지역 등에 대하여 설문조사를 통하여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전교직원을 4개조로 나누고 해마다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4년에 걸쳐 <타이베이~화리엔~홍콩~마카오>를 4박5일로 둘러보는 계획을 확정했다. 여행 경비의 부담을 고려하여 가까운 곳으로 정한 것이다.  당시 대만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우방이었고, 두 나라 간에는 남다르게 우호가 깊었다. 여기에 홍콩과 마카오를 추가한다면 연수 장소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행 경비의 절반은 학교에서, 나머지 절반은 참가자 개인의 부담으로 한다는 것에도 합의했다.

 

  나는 여행사에 근무하는 제자에게 구체적인 자문을 구했고, 그 제자에게 책임 있게 진행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시작된 숭의여자중학교 교사 해외연수는 전교직원의 전폭적인 호응에 힘입어 1988년부터 1991년까지 4년간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첫 방문지인 대만은 국토가 분단된 우리와 처지가 매우 닮은 점이 있었다. 타이베이에서는 고궁박물관, 중정기념당, 총통부, 충렬사, 태화전, 국가희극원(국립극장)과 국가음악당(콘서트홀), 용산사와 화시지에 야시장을 둘러보고 타이완 동부 화리엔(花蓮)으로 이동하여 타이루꺼협곡의 장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홍콩은 세계 무역과 관광의 도시로 낭만의 리펄스베이, 레저타운 해양공원, 빅토리아파크에서의 야경 보기, 수상 레스토랑 점보(JUMBO)에서의 만찬을 즐기는 것이었고, 마지막 여행지인 마카오에서는 세나도 광장, 성바울 성당, 몬테요새, 카모에스 공원 등에 흩어진 유적들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당시 마카오는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포르투갈 식민통치 아래 있었고, 유럽과 동양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도시전체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나는 마지막 해에 참가했다. 앞서 세 차례는 남자 직원이 인솔했으나 마지막 해에는 제자가 동행했다.  제자는 "선생님이 참가하신 팀은 당연히 제가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제자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진행된 교사연수는 나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반면 제자는 선생님을 모신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라고 말했지만, 아마도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야 하고 부담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여행 기간 제자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같이 사진도 찍었다. 여행이 마무리되는 마지막날 저녁, 제자는 네게 "어떤 것으로 선물을 할까 고민했어요"라며, 예쁘게 포장한 것을 내밀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샤넬(CHANEL) 향수였다. 생전 처음으로 맡아본 샤넬 향수는 해당화꽃 향기보다 더 진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여행 중 같이 찍은 사진들을 일정별로 정리하여 작은 앨범을 만들어 제자에게 선물했다. 연수 여행을 잘 진행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첫 장에는 내가 쓴 <해당화꽃>이란 시 한 편을 붙였다. 이 시는 그녀의 이미지를 살려 즉흥적으로 쓴 것이지만, 나로서는 여행에 대한 특별한 추억을 제자와 공유하자는 취지였다. 앨범을 받아든 제자는 "이렇게 신경을 쓰실 줄은 몰랐어요" 라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뻐했다.

 

  명사십리 고운 모래밭에
  자랑스런 자태로 피어
  야무진 눈빛으로


  넌 유난히 불타오르고 있었지.

 

  내 눈길을 어쩌다 만나면
  마음은 좋아라 허공에 뜨고
  음성은 매끄럽게 푸른 하늘에서
  에메랄드 빛 구슬을 굴리고 있었지

 

  영영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들
  원컨대 지지 않는 꽃으로 남아 있기를
  히뜩 아쉬움 안고 돌아보는 날이었지만

 

  꽃 한 송이 저만치 거리에서
  으레 바다 노을을 매만지며
  로맨틱한 꿈을 꾸다가


  살며시 내게로 걸어와
  아름다운 한 묶음의 꽃타래를 목에 걸어주고
  ‘있어요, 여기 저예요’ 낯익은 목소리로
  다소곳 내 곁에 머무는구나.

  나는 이 시에 <너는 내게 불붙는 꽃이었다>라는 부제를 붙였다. 제자의 이미지는 내게 학생 시절이나 여행할 때나  ‘해당화 꽃’같은 그리움의 존재였다. 한때 소식이 뜸하다가도 잊지않고 불현듯 나타나 내 곁으로 다가서는 그런 존재였다. 나는 앨범을 받아들고 즐거워하는 제자에게 18행으로 된 시의 첫 글자만을 따서 이어 읽어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제자는 "어머!"라는 탄성과 함께 금새 얼굴이 해당화 꽃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명자야 넌 내 마음에 영원히 꽃으로 살아있다”

  이름이 ‘명자’였던 제자는 그 후로 여행업계에서 꽤나 잘 나가는 인사가 되었지만, 직장 재미에 빠져 늦도록 결혼을 하지 않는 그에게 결혼 시기를 놓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수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제자는 반가운 소식을 안고 달려왔다.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결혼식 주례를 부탁했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고 신랑과도 합의한 일이라고 했다. 나는 꼼짝없이 그녀의 결혼식에 주례의 자리로 불려나갔다.

  햇살이 따스한 초가을 오후, 나는 한강변 남서울웨딩홀에서 제자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 예식이 모두 끝나고 나서 신부어머니와 대화하는 중에 신부어머니가 내게 한 마디 건넸다. “선생님 같은 남자를 찾다가 결혼이 늦었습니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주례를 맡아줘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해당화꽃으로 남아 있던 그 제자는 이제 행복한 가정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불붙는 해당화 꽃 같은 마음으로 가정을 밝고 명랑하게 밝히며 살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숭의여자중학교 교사연수 인솔차 출장 중

 

 

  * 출처 : 졸저 <아름다운 여행>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