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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에세이/아름다운 동행

“나 하나만이라도”의 박지견 선생님

by 혜강(惠江) 2011. 7. 8.

 

나를 키워주신 스승님  

 

“나 하나만이라도” 정신을 가르쳐주신 박지견(朴持堅) 선생님

 

 

글 · 남상학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수업 내용과는 상관없이 자주

 “나 하나쯤이야”라는 말을 칠판에 쓰시고

역삭빠르게 살아가려는 삶의 태도를 질타하셨다. 

 

그리고는  '나 하나만이라도' 라는 말을 그 옆에 큼직하게 써 놓으시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하셨다. 

 

 

 * 노년의 박지견 선생님 * 

 

  누구에게나 학창시절의 추억 가운데는 잊지 못할 선생님 한 분쯤 계신다. 그분이 있어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받게 되고 추억은 더욱 빛난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박지견 선생님을 만났다. 황해도 신계 출생이시며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을 나오신 30대 중반 가까이 되셨던 선생님은 시인으로서 우리에게 국어문법을 가르치셨다.  

  선생님은 용모와 차림에 있어서 유별했다. 뿔테안경 뒤로 비치는 예리한 눈빛과 콧수염, 파이프와 베레모는 선생님을 규정짓는 요소가 되었고, 선생님만의 멋으로 지금까지 나에게 진하게 남아있다. 선생님의 외모는 확실하게 독보적이고 개성적이어서 중소도시에 사는 삼십대 젊은 나이에 그런 특별한 차림이 쉽지 않을 터인데, 베레모와 파이프, 정장차림의 완벽한 모습은 선생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 시인 중에 조병화의 스타일을 닮았다고나 할까? 나는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본 뒤부터 ‘시인은 저런 차림이구나’ 생각했다. 선생님은 당시 이미『현대문학』지에 작품이 실려 중앙문단에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셨다. 시집으로 <청동경(靑銅鏡)>, <깜부기>, <도 아니면 개> 등을 세상에 남길 정도로.

   나름대로의 철저한 차림을 고집하신 선생님은 성품에 있어서도 만만치 않았다. 학생의 태도가 좋지 않거나 수업 태도가 조금이라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지없이 매서운 꾸중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다고 회초리를 들거나 또 다른 방법의 체벌을 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정신교육으로 야무지게 훈계했다. 남다른 생활 철학을 지니셨던 선생님은 교과목 외에 인생의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따라서 선생님의 강의는 유난히 힘이 있었고 열정이 넘쳤다. 술을 매우 좋아하셔서 간혹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수업에 들어오시는 때도 있었지만 그런 날 수업은 더욱 활기를 띄곤 했다. 시험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철저하게 이해시키고 설명해야만 다음 장으로 넘어가던 선생님만의 학습방법은 호기심 많은 나를 그대로 사로잡곤 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9월 초였다고 기억된다. 무더위가 가셨다고 하지만 점심시간 뒤의 5교시는 교사나 학생 모두가 힘든 시간이기 마련이다. 식곤증이 몰려오고 몸이 나른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5교시가 선생님의 시간이었다.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우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교실로 뛰었다. 좀 늦게 들어온 학생도 있어서 교실이 어수선하고 수업 분위기가 잘 잡히지 않았다. 순간, 선생님은 못마땅할 나타날 때 자주 나타나는 특유의 표정을 지으시더니, 수업 내용과는 상관없이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문구를 칠판에 크게 쓰셨다. 그리고 그 글 아래에 상반되는 문구인 “나 하나쯤이야”라는 말을 또 하나 쓰셨다. 그런 다음 선생님은 '나 하나쯤이야' 라고 생각하며 약삭빠르게 살아가려는 태도를 매섭게 질타하셨다. 그럴 때 선생님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고도 근엄했다.  

   "한 예로, 마을에 잔치가 벌어져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포도주 한 병씩 들고 와서 큰 술통에 부었다가 나누어 먹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셔보니 그건 술이 아니라 맹물이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었다. 나 하나 맹물을 가져와 붓기로서니 누가 알아챌까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만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가져와 잔치를 망쳤다면 그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겠는가?"  선생님이 제시한 이 예는 술을 좋아하신 선생님으로서는 적절한 비유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편안과 안일을 위하여, 혹은 손해를 보지 않고 약삭빠르게 살려고 한다. 질서 지키기만 해도 그렇다. 버스 정류장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끼어든다면 어찌 되겠는가?  금새 줄은 흩어지고 혼잡해질 뿐만 아니라 줄을 서서 기디리던 사람들은 얼마나 불쾌하게 생각하고 화를 낼 것인가.

 

  버스나 전동차, 지하철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하차하는 손님을 무시하고 서로 먼저 타려고 밀다가 다치거나 정작 내릴 사람은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또 혼잡한 교차로에서 차들이 나 먼저 가겠다고 끼어들면 서로 엉키고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뻔한 이치다. 사람들이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만을 고집한다면 아마도 세상은 일시에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약삭빠른 생각이 사회에 만연한다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교통질서뿐이겠는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구성원 모두가 지켜야 할 공중도덕, 청결, 복장, 생활 예절, 의무 등 전반에 걸쳐 “나 하나만이라도…” 라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자기 몫을 다할 때 사회는 건전하고 튼튼하게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임 있는 인간답게 "나 하나만이라도" 성실히, 열심히, 건전하고 정직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선생님은 세상을 아무렇게나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매섭게 질타하셨고, 의롭게 사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곤 했다. 진지하고도 열정적인 선생님의 말씀 앞에 학생들은 모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강의 후 선생님에게 붙여진 별명은 <나 하나만이라도 선생님>이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인간은 세 가지 유형의 삶을 살아간다고 했다. 첫 단계는 심미적(審美的) 삶의 단계요, 둘째는 윤리적(倫理的) 삶의 단계요, 마지막은 종교적(宗敎的) 삶의 단계라고 했다. 심미적 삶의 단계는 철없는 어린 시절 본능적 욕구에 따라 사는 삶이요, 윤리적 삶의 단계는 어느 정도 교양과 인격을 갖추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규범과 윤리에 따라 사는 삶이며, 종교적 삶의 단계는 종교적 진리에 따라 완전하고 참된 삶을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심미적 단계의 어린 시절이 아니라면, 인간은 적어도 종교적 단계는 그만두더라도 윤리적 삶의 단계에서 사람답게 살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나 하나쯤이야"라는 말일 것이다. 반대로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의 말이 있다면 그것은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말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허황한 생각과 그릇된 행동을 할지라도 "나 하나만이라도"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얼마나 밝아지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불의를 저지르고 부정하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나 하나만이라도" 정의롭고 건전한 자세로 살아가야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만큼 세상은 건전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그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장래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겠는가?  

  ‘나 하나만이라도’를 역설한 선생님의 강의는 한창 인생관과 가치관을 세워가는 나에게 강한 자극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 후로 내가 어느 처지와 환경에 처하든지 내 삶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지침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근면하고 성실한 점이 있었다면, 그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친구를 배려하고 이웃을 돌보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리고 불의와 부정에 쉽게 휩쓸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분명 "나 하나만이라도" 바르고 착실하게 살아보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지견 선생님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스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잊지 못하여 가끔 편지나 전화로 안부를 묻곤 했지만 자주 찾아뵙지를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직장과 교회 생활에 묶여 살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러다가 세월이 오래 흐른 뒤 2003년 가을 선생님이 노환으로 몸져누워 계시다는 말을 듣고서 돌아가시기 전에 찾아뵙기 위해 제천에 내려갔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입원한 병원을 찾았으나 상태가 너무 위중하여 중환자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되돌아오는 길에 나는 선생님의 시 한 편을 읽었다. 

  늙는다는 것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같은 것인 줄 알았지

  

  늙는다는 것이   

  흰 머리카락 느는 것과   

  같은 것인 줄 알았지.  
  

  늙는다는 것이   

  존댓말을 듣는다는   

  그런 것인 줄 알았지.

 
  늙는다는 것이

  시계바늘 그것과

  관계있는 것인 줄 알았지.


  늙는다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더군

  제 몫의 밥그릇 수가

  점점 적어지는 것이더군.

   -  박지견 선생님의 '늙는다는 것이'의 전문


  선생님은 내가 찾아갔던 이듬해인 2004년 4월8일에 타계하셨다. 나의 게으름으로 존경하는 스승님께  밥 한 그릇 챙겨드리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스승은 제자에게 인생을 좌우하는 큰 가르침을 주셨는데, 제자인 나는 그 가르침에 대한 보답을 해 드린 것이 하나도 없다.  이제 생전의 모습을 뵐 길이 없지만 선생님의 가르침 ‘나 하나만이라도’의 교훈은 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  나를 지탱해 가는 기둥이 되고 있음을 고백할 수 있다.

 

*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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