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현대적 징후(徵候)와 전환 의식(轉換意識)
- 사상의 전환기에 서서 -
글 · 남상학
"여기엔 물이 없고 바위뿐
바위만 있고 물 없는 모래밭 길"
-T.S 엘리어트 ‘황무지’에서
혼란과 무질서의 황야! 여기 황량한 지역에 비참한 경영을 지속하는 현대인은 ‘무상(無償)의 방황’이 아니면 ‘공허한 도로(徒勞)’란 제목의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조명 아래서 절대적 가치도 없는, 현대 문명이 던져준 뉴앙스의 주제들. 그리하여 저 트래지디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우리는 데카다니즘을, 니힐리즘을, 패시미즘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까뮈)는 근대적 지성의 무리들은 천부의 선택과 결단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저 만공(滿空)에 휘날리는 깃발처럼 벽을 대결하는 의지를 가지고, 무모한 부정과 반항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레지스탕티스트들도 무모한 부정과 반항 속에서 어둡기만 한 질곡(桎梏)에서의 탈출도, 새로운 가치체계의 창조도 이룩하지 못한 채 자기혐오와 자기멸시의 감정에 사로 잡혀 퇴폐와 허무와 삭막한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맹목의 반항은 심한 심리적 갈등만을 잉태시켰던 것이다. 현대의 부정은 현대문명이라는 위기적 상황 아래에서 싹이 트고 자랐다.
가슴 부풀었던 근대인의 벅찬 욕망은 자연과 사회라는 두 영역으로 줄달음쳐 하 많은 업적을 세웠으나 반면 인간에게 불안의 요소를 예시하고 있었다. 기계의 발명, 기술의 전진과 함께 저 놀라운 산업혁명은 일어났으나 굳게 믿었던 것처럼 현실은 지상천국의 건설보다는 비참과 부패와 죄악이 극한 최대의 지옥이 벌어진 것이다. 근대도시의 형성과 자본주의 생산, 근로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대립은 불가피 코뮤니스트들의 사회혁명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여기 또 자연주의에 반대하고 나타난 합리주의, 합리주의서 반대를 표명하고 나선 실존주의도 무(無)와 사(死), 불안과 전율의 장벽 속에 부단한 고난의 철리(哲理)를 아로 삭여 왔다.
신을 추방한 현대인은 이 찢기고 찢긴 현대사조 속에서 생의 목적과 생활이념을 지도하는 현실의 ‘산힘’ 을 상실해 버리고, 모든 윤리의식은 아예 귀찮은 악세사리라고 여기는 정도에까지 왔다. 우울과 우수에 젖어 신선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매너리즘의 현실 위에서 젊은 세대는 무력한 기성에의 불신을 표명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앵그리영맨이나 미국의 비트닉, 일본의 태양족, 프랑스의 앙티로망의 주인공들은 정신적 공백을 조선해 놓은 기성에의 반항을 감행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주체성의 확립도 없는 무조건의 반항은 까뮈의 도그마가 자기혐오의 표정으로 쉽사리 변하듯 아무런 창조정신이 없는 다다적 반항자세에서 자기멸시의 환각에 사로잡히는 슬픈 표정에 지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이 현대적 징후의 전부는 아니다. 현대적 지성에 의해 허무와 절망이 현재와 미래를 걸쳐 인류가 상속할 만한 유산의 가치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적 새 주체를 세워야겠다는 필요성의 절감에 따라 전환의식은 또 하나 현대적 징후의 하나로 싹이 트고 있었다.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현재의 혼란을 조성하였다고 한 카알 융은 ‘인류는 새로우 노아의 홍수를 준비하고 있다’고 경종을 울리는가 하면, 카알 야스퍼스는 현대의 과학편중의 경향을 경고하여 철학의 우위성을 주장하기도 하며, 로버트 오펜하이머(미국의 이론물리학자)는 ‘예술가 종교가에 의하여 대표되는 내면을 존중하는 인간과 과학자에 의하여 대표되는 기술의 진보를 맡은 인간과의 악수가 현대의 혼란을 넘어서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대 지성인들의 발언은 몰락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인간문화며 역사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간 존재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의 물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 수 없으며, 이것은 마침내 과거 인류를 노예상태로 몰아넣던 신, 그리하여 그에 반역하여 추방하기까지 한 신에 대한 향수를 더욱 느끼게 된 것이다. 이 전환의식은 자연과학의 분야에서 사색의 본격적인 전환으로, 자연주의를 반박하는 정신적 가치세계의 재발견으로, 전근대에까지 박물관의 골동품마냥 경원(敬遠)되어 온 카톨리시즘에의 재관심을 표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20세기 초두에 문학정신에 나타난 종교성만 하더라도 근대정신을 극복하는데 있어서의 하나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할 만하다. 모든 사물에 상징적으로 은현(隱現)하는 신을 붙잡았던 릴케의 유명한 <시도시집>이나 '엄밀한 구성에 의하여 고전적 정신과 카톨릭 정신을 결합'(폴 틸릭)했던 게오르게, 반휴머니즘에 앞장선 T.E 흄은 <생의 비극적 의의>의 인식 속에 현대적 성격을 획득한 종교적 태도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랫동안 폐기되었던 전통적인 가치를 초청한 것이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인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부버, 벨자예프 마르셀 등 모두가 종교성에 의해 20세기적 허무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
야스퍼스 철학의 실존체계는 철학적인 세계정립, 실존으로서의 자아 해명, 초월하는 것과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초월에의 길'을 뜻하고 있다. "초월 없이는 실존은 본래적 자기존재를 잃고, 세계정립은 그 가능적 깊이를 알게 될 것이다"(야스퍼스)라고 하여 초월을 위한 철학체계로 서의 그의 난파(難破)는 필연적으로 외각(外殼)이 깨진 뒤에 신생이 오듯, 내적자아의 <난파>는 마침내 시간에서 영원, 실존 뒤의 초월에의 길밖에 남지 못한다고 말한다.
포괄자(包括者)로서의 외각을 부정한 실존은 다시 자기부정을 통하여 영원한 존재에 돌입하게 되며, 초월자 신은 <난파> 저 쪽에 있어 오직 생명과 전실존(全實存)을 공허 속에 맡겨 얻어지는, 내면적 최후의 모험에 의하여 현존재는 초월자를 지시하는 암호를 얻게 되며, 이 암호의 해독은 비로소 새로운 현실과 생의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신에 대한 혁명적 회의까지도 포함하면서 순수하고 진실한 현대의 신앙을 확보하는 것이다. 유한한 현실에 눈을 감을 수 없는 인간은 모름지기 초월적 신의 존재를 부동(浮動)하는 실존의 근거로서 끝내 확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저 유명한 역사가요, 문명비평가인 아놀드 죠셉 토인비의 사관에서도 우리는 현대인의 역사적 전망에 하나의 큰 지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문명에 대한 종교의 구실을 높이 평가하면서 가장 심오한 정신적 법칙을 에스키러스의 두 마디 말 '고통을 통해서 참을 안다'에서 선언한 법칙, 또 신약성서의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히브리서 12장 6절)의 구절에 나타난 법칙에다 두고 있다.
제문명의 붕괴와 해체란 차라리 종교적 평면에 있어서 보다 높은 것을 향한 발판이라고 생각하고, 종교의 쉬임 없는 향상 운동에 봉사하고 촉진하는 것이 탄생-사망-탄생의 회전을 하는 제문명의 회전운동이라 보아, 마침내 '문명은 종교에 봉사하는 시녀'의 결론에까지 이른다. 그는 그리스도교 이후의 서구 세속문명을 "그리스도교 이전의 그리스, 로마 문명의 무용(無用)의 반복"이라고 보고, 민족 숭배(국가주의), 물질 숭배(공산주의), 개인숭배(민주주의)는 그리스도교라는 한 권의 책에서 떨어져 나온, 찢어지고 오독(誤讀)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헤어날 길 없는 현대적 심연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이 점에 대하여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떤 이유로 해서 운명은 그것이 생겨난 후로 최초의 수천 년 동안 걸어온 고난스럽고 타락적이며 전적으로 자살적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는 길을,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나마 간신히 지속해 나가지 못했을 것인가?"라고 심각한 질문을 던진 뒤, 현대의 위기를 조성한 문명의 종말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는 현대의 중류계급이 최근에 이룩해 놓은 기술적 발명에 포커스를 맞췄다. 전쟁과 계급으로 요약되는 두 관례와 제도 -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사회의 붕괴와 전 인류를 송두리째 근절시킬 위력을 잉태했던 것이다.
따라서, 종래에는 다만 수치스럽고 한심스런 것으로 그쳤던 제반 악이 이제는 참을 수 없으며,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쟉크 마리땡도 <과학과 기술적 숙련>을 개탄하면서,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파괴와 재화를 목도하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다. 가슴 부풀었던 근대인의 벅찬 욕망은 자연과 사회라는 두 영역으로 줄달음쳐 하많은 업적을 세웠으나, 반면 인간에게 불안의 요소를 예시하고 있었다. 기계의 발명, 기술의 진전과 함께 저 놀라운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 사회는 굳게 믿었던 지상의 천국이 아니라 비참과 부패와 죄악이 만연한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또, 근대 도시의 형성과 자본주의적 생산,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대립은 불가피 코뮤니스트의 사회 혁명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여기 또, 합리주의, 실존주의의 검은 그림자는 허무와 죽음, 불안과 전율의 장벽에 부단한 고난의 철리를 아로새겨 왔다. 신을 추방한 현대인은 이 찟기고 찟긴 현대사조 속에서 생의 목적과 생활이념을 지도하는 현실의 <산힘>을 상실한 것이다.
이 점에서 현대 위기의 요인은 (1). 과학 기술로 인한 인간의 파멸, (2). 인간 지상주의의 파국, (3). 기독교 신상의 상실(부정), (4). 자유주의의 몰락, (5). 맑시즘의 팽창과 그 도전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은 자기 소외의 비극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비인간화의 비극- . 그래서 카프카는 그의 작품 <변신>에서 인간을 벌레로 묘사했고, <성>에서는 개성을 상실한 인간을 상징하여 주인공을 익명으로 만들어 아무런 지시도 없는 세계 속을 방황하고 있다.
이 황야로 변한 현대의 지평, 마치 '흑사병균이 득실거리는 죽음의 도시'에 서서 까뮈는 부조리한 상황의 모순 '죽음' 앞에서 실존주의라는 반항의 기치를 높이 쳐들었다. 한계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개성 없는 3인칭적 현 존재가 지상명령으로 내세운, 이들 레지스땅스의 구호는 <사회 전체의 복지와 동시대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것이었다.
인간 운명에 책임을 진 현대의 새로운 영웅들 - 그래서 실존주의는 그들 말대로 '새로운 휴머니즘'이 된 것이다.(싸르트르)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까뮈)는 근대적 지성의 무리들은 천부의 선택과 결단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만공에 휘날리는 깃발처럼 <벽>으로 상징되는 현대상황에 대결하는 전사로 자청한 것이다. 허지만 주체성의 확립이 없는 무조건의 반항은 어둡기만한 질곡에서의 탈출도, 새로운 가치체계의 창조도 이룩하지 못한 채 자기혐오와 자기멸시의 감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끊임없는 시지프스의 도로(헛된 수고)는 심한 심리적 갈등만을 잉태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상이 현대적 징후의 전부는 결코 아니었다. 허무와 절망이 현재와 미래에 걸쳐 인류가 상속할 만한 가치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새로운 가치를 세워야겠다는 자각에 따라 또 하나 새로운 징후가 싹트고 있었다.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현대의 혼란을 조성하였다'고 지적한 카알 융은 "인류는 새로운 노아의 홍수를 준비하고 있다"고 경종을 울리는가 하면, 야스퍼스는 현대의 과학 편중의 경향을 경고하여 철학, 종교의 우위성을 주장하기도 하고,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예술가, 종교가에 의하여 대표되는 내면을 존중하는 인간과, 과학에 의하여 대표되는 기술의 진보를 맡은 인간과의 악수가 현대의 혼란을 넘어서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쟉크 마리땡도 "문명의 조직 속에서, 그리고 인간의 의식(과학자들 자신의 의식을 포함한) 속에서, 과학과 지혜가 화해되지 않고, 과학의 실제적 응용이 정당한 윤리적 의지와 인간 생활의 진정한 목적에 정확히 예속되지 않는 한, 내일의 세계에서 우리의 평화와 우리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과학과 지혜의 화해를 역설했다.
이제 위기로 표현되는 불합리의 시대는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사상의 전환점에 서서, 새로운 세계사의 저술을 위한 "서문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앙드레지드가 니체를 가리켜 '서문의 작가'라고 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며, 또 다른 서문의 작가들은 도처에서 마치 복음의 효모로서 열심히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이들의 활동은 '몰락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인간 문화며 역사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간 존재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의 물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 수 없으며, 이것은 역설적으로 마침내 과거 인류를 노예상태로 몰아넣었던 신, 그리하여 그에 반역하여 추방하기까지 한, 신에 대한 향수의 표현이기도 했다. 신의 사망을 선고한 니체가 인간주의에 비참하리만큼 잔혹한 자기 부정의 채찍을 가한 행위는 실상 신에 대한 동경과 탕아적 향수에 가득찬, 인간의 외경의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따라서 현대 역사의 밑바닥에 흘러온 전환의식은 자연과학의 분야에서 존재의 규명을 위한 사색의 분야로, 전근대까지 박물관의 골동품마냥 경원되어온 기독교 정신의 재관심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초두에 나타난 문학정신만 하더라도 기독교 정신은 전 근대정신을 극복하는데 하나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담당했다.
모든 사상에 상징적으로 은현하는 신을 붙잡았던 <시도시집>의 릴케, '엄밀한 구성에 의하여 고전적 정신과 카톨릭 정신을 결합'(폴 틸릭)한 게오르게, 카톨릭 신앙의 전도를 목적한 뽈 끌로델, 경이로운 원천에 도달하기 위해 사막을 건너야 했던 명예와 신뢰의 투사 샤를르 뻬기, 구속이야 혹은 원원한 멸망이냐의 도박을 위하여 신과 은총에 대결하는 죠르쥬 베르나소스, 충족될 수 없는 종교적 갈등을 그린 <레비아땅>의 쥴리앙 그린, 신의 은총만이 인간을 해탈시킨다고 믿어 '죄에 대한 인간의 투쟁'을 그린 <독사의 사육>의 모리아크, 반 휴머니즘을 앞세워 <생의 비극적 의의>를 탐구한 흄, 황무지 위에 종교성을 초청했던 엘리어트의 심오한 시정신은 모두 전환기의 가장 강력한 시대정신으로 등장한 것이다.
현대문학에 있어 이상의 지적 노력은 오랫동안 폐기되었던 전통적 가치에 대한 초청으로 현대적 니힐을 극복하려는 철학적, 신학적, 역사학적 탐구에 크게 힘입었던 것이다. 킬케골, 야스퍼스, 부버, 마르셀, 슈바이처, 토인비 등은 이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크게 공헌한 사람들이다.
야스퍼스 철학의 실존체계는 철학적인 세계정립, 실존으로서의 자아 해명, 초월하는 것과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초월에의 길'을 제시했다. "초월 없이는 실존은 본래적 자기존재를 잃고, 세계정립은 그 가능적 깊이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외각이 깨진 뒤 신생이 오듯, 내적자아의 <난파>를 통하여 마침내 시간에서 영원, 실존의 초월을 역설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초월자로서 외각을 부정한 실존은 다시 자기부정을 통하여 영원한 존재에 돌입하게 되며, 초월자 신은 <난파(難破)> 저 쪽에 있어 오직 생명과 전 실존을 공허 속에 맡겨 얻어지는, 내면적 최후의 모험에 의하여 현존재는 초월자를 지시하는 암호를 얻게 되며, 이 암호의 해독은 비로소 새로운 현실과 생의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신에 대한 혁명적 회의까지도 포함하면서 순수하고 진실한 현대의 신앙을 확보하는 것이다. 유한한 현실에 눈을 감을 수 없는 인간은 모름지기 초월적 신의 존재를 활동하는 실존의 근거로서 확보하고자 했다.
저 유명한 역사가요, 문명비평가인 아놀드 죠셉 토인비의 사관에서도 우리는 현대인의 방향을 지시받을 수 있다. 그는 문명에 대한 종교의 구실을 높이 평가하면서 가장 심오한 정신적 법칙을 에스킬러스의 두 마디 말 '고통을 통해서 참을 안다'와 또 신약성서의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히브리서 12장 6절)의 구절에 두고 있다. 제문명의 붕괴와 해체는 차라리 종교적 측면에 있어서 보다 높은 것을 향한 발판이라고 생각하고, 종교의 쉬임없는 향상 운동에 봉사하고 촉진하는 것이 탄생-사망-탄생의 회전을 하는 제문명의 발달로 보아, 마침내 '문명은 종교에 봉사하 는 시녀'의 결론에까지 이른다. 그는 그리스도교 이후의 서구 세속문명을 "그리스도교 이전의 그리스, 로마 문명의 반복"이라고 보고, 민족 숭배(국가주의), 물질 숭배(공산주의), 개인 숭배(민족주의)는 그리스도교라는 한 권의 책에서 떨어저 나온, 찢어지고 오독된 한 장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 수세기 간 우리는 분명히 그리스도교 신앙을 소유하지 않고서, 다만 그 내용에서 분리되고 세속화된 그리스도교적 인습에 매달려 살아왔음을 돌연 지금에야 발견하고 당황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슴에 무수히 못 박는 역사는 이제 막을 내리고,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인 갈보리 산에서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의미 내용으로 한, 새 역사의 출발을 위해 " 현대사에 대한 현재 우리의 전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토인비). 신이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에게 부여한 선택의 자유의지로, 정신생활면에서 이미 퇴락해 버린 세속적 상부구조(上部構造)를 다시금 종교적 기초 위에 환원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윤리적 생의 철학자이며, 온 인류의 성자라고 일컬음을 받는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말한다. "현대는 위기에 틀림없으나 윤리 운동에 의하여 현대 문명은 재건될 수 있다"고. 슈바이처는 그의 사상적 성격을 윤리적 이상주의에 두고, 현대의 인간이 정신의 상해를 입고 자유마저 상실한 혼란에서 헤어나는 길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윤리적 긍정의 세계관’을 지니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불안 속에서 희망을 저버리는 것은 생의 패배이며, 오로지 생과 문화의 유지는 생을 존중하고 살아가려는 데 있다. 문명의 생성, 발전, 소멸은 <생에 대한 외경의 세계관: Die Weltanschaung der Ehrgurcht vor dem Leben>의 유무여하에 달려 있는 것으로, 그 기초 요소는 윤리였던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요, 신학자요, 철학자인 그가 빛나는 자리와 영광스러운 명예를 거부하고 문명의 빛과 등진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의 원시림 속에 들어가 비참하고 불우한 토인들에게 따뜻한 의료의 손길을 펴고, 모든 생명 있는 것과 더불어 사랑, 헌신 또한 고통과 기쁨을 같이 나누는 것은 그의 ‘생의 외경의 윤리’를 실천하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이 밝히는 대로 고귀한 종교적 사명이며, 기독교의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려는 숭고한 사업이었다. "생의 외경의 세계관은 종교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의 윤리와 그 내면성에 있어서 기독교의 세계관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계에 속한다'고 하여 현대에 대한 그의 의식은 비록 염세적이었으나, 그 의욕과 희망은 진실한 기독교인답게 지극히 낙관적이다.
일찍이 T.S 엘리어트가 현대 철학에 있어서 가장 힘찬 위력이라고 말했던 마리땡도 그렇다. 낙조와 같이 불안한 몰락 직전의 현세기의 지평에 서서, 굳센 신념을 가지고 뿌리 깊은 전통과 영원한 예지, 구제력(救濟力)을 가진 기독교 정신에 기대를 걸고, 그리스도교가 문화의 밑바닥까지 침투하여 그 궁극적 목표인 영혼구제 뿐 아니라, 지상적 최선과 자연적 활동력의 발전을 그 모성체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전환의식 - 이것은 불안 절망의 위기의식과 아울러 현대적 징후인 것이며, 특히 종교에로의 전환은 20세기 지성의 강력한 발언이 되었다. 자신의 유한성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은 그 어디에나 의존하지 않고는 못 배길 존재이다. 하물며 이성과 이성의 대립, 과학과 과학의 대립, 무기와 무기의 대립이 빚어낸 공포와 위협의 상황 하에서 찢기고 상한 심령을 안고 방황하는 현대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진정한 종교라고 한다면 인간의 마음 속에 살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그에게 소망을 가지게 하고, 그에게 어떠한 비전(환상)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에 있으면서 현실에 집착됨이 없이 현실을 만족스럽게 극복 타개해 나갈 것을 요구한다. 실존주의 사상에서 볼 수 있는 허무의 감정도 결국은 그들이 진정한 생명과 관련되고 그리고 이로부터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오휴머니즘이나 네오로맨티시즘으로의 전환의 요구에도 일리가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현대에 보다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물질과 자연의 퇴락을 방지하기 위해 정신에로의 지향을 함께 동반하면서 철학과 형이상학이 목적하는 인간존재의 해결을 위하여 신에게 재관심을 표명하는 것이다.
실존 뒤에 초월되는 난파(難破) 저편의 신을 발견한 야스퍼스의 철학관, 문명의 생성 소멸의 원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의 인식에 의한 현대 위기로부터의 탈출 가능성을 제시한 토인비의 사관(史觀), 현대문명에 대한 위기관과 그것으로부터의 탈출 극복을 위한 ‘생’과 ‘세계’에 대한 윤리적 외경의 태도를 역설하는 슈바이처의 윤리관 - 이 모두가 한결같이 현대에 있어서의 종교의 의의를 웅변으로 말해 주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또 하나 역사적 에포크인 현대라는 지점에서 새 역사의 이정표를 종교성 위에 세워야 할 크나큰 과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질 중심의 세계에서 정신중심의 세계로, 인간 중심의 세계에서 신과 인간의 조화스런 세계에로의 전환은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하루 속히 수행되어야 한다. 신앙 상실의 현대는 ‘신의 탐구’로 인한 신앙의 부활시대이다. 이 안에서 네오휴머니즘도, 네오로맨티시즘도 그 완전한 빛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에의 길은 현대인이 이르기에 너무나 곤란한 점이 있으며, 그 도정(道程)은 매우 멀고 험하다. 교만했던 이성과 한계를 모르는 인간 자유는 닫혀진 문 앞에서 신앙을 결단하기엔 아직 용기가 부족하며, 이미 현대인의 시안(視眼)에 비쳐진 현종교는 세속화된 모습일 뿐, 아직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오려는 노력은 쉽사리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 큰 역사적 사명을 짊어진 기독교는 심각한 자아반성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지나친 물질주의나 맹종(盲從)을 강요하는 권위의식을 버리고 신과 인간과의 자유스러운 대화가 꽃 피울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어쩌면 이 땅의 교회는 그 본연의 자세에서 떠나서 프래그머티즘이 아니면 카리스마적 권위로서 허식(虛飾)과 맹종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형식주의도, 봉사를 잃은 안일주의도 배격하여야 한다. 프래그머티즘 속에 종교는 타락을 면치 못하고, 초자연적인 힘, 주술적인 힘을 포함하는 카리스마는 무조건의 맹종을 요구하여 진정한 신앙에 이르기에 장애가 되고 있다. 형식주의와 안일주의는 종교의 자살행위와도 같다. 신앙의 진의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와의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 이루어지며, 이 속에서 허무에 빠진 인간은 자기구제의 길을 얻을 수 있다.
또 값싼 앙가지망에 실패한 이 땅의 기독교는 일보 전진하기 위하여 3보 후퇴한다는 토인비의 말대로 본연의 위치로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자기침잠(自己沈潛)의 깊은 데가지망에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 고난과 죽음을 각오한 호소와 항거로서의 종교의 사회참여는 데가지망 속에 힘들여 얻어진 반성의 결과로 이룩될 수 있을 것이며, 이때의 기독교는 현대의 심연을 꿰뚫고 현대를 운행하는 소금기둥, 불기둥으로서 현대는 물론 시대를 따라 영구히 빛을 발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독교의 진리는 항상 그 어디서나 누룩과 같이 생명력이 퍼져 나가는 위대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방법 때문에 기독교는 지탄을 받아온 것뿐이다. ‘어마어마한 자연과학적 확증과 쟁쟁한 이론으로 합리주의의 승리와 인간주의의 만세를 합창하던 근대인들의 낭만은 황혼을 맞이한 듯했던 기독교가 채 주저앉기도 전 멸망의 비운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 이제 르네상스가 타기(唾棄)한 신의 절대주권을 현대적 의식에서 재발견할 때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떠도는’(창세기) 그때 눈부신 광채를 입으시고 나타나신 조물주 하나님이 이 혼돈한 세계에도 현시(顯視)하실 것을 믿는다.
<주> 이 글은 1963년 <현대인강좌> 완간기념 신진논문 모집에 응모하여 가작 입선한 작품으로, 「高大文化」(고려대학교총학생회 간) 제5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 출처 : 졸저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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