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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1790

2009 동아신춘문예 당선시 : 술빵 냄새의 시간 / 김은주 <2009 동아신춘문예 당선시> 술빵 냄새의 시간 - 김 은 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 떼 지은 평일의 .. 2009. 1. 1.
2009 한국신춘문예 당선시 : 무럭무럭구덩이 / 이우성 [2009 한국일보 신춘문예/시] 무럭무럭 구덩이 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 2009. 1. 1.
2009 경향신춘문예 당선시 : 맆 피쉬 / 양수덕 <2009 경향 신춘문예 당선시> 맆 피쉬 양 수 덕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땡볕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맆 피쉬라는 물고.. 2009. 1. 1.
2009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 입춘 / 안성덕 <2009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시 당선작 - 입춘 - 안성덕 골판지는 골판지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끼리끼리 모여야 밥이 된다고 삼천변 요요要要자원* 파지 같은 생들이 마대자루에 빈 페트병 고봉으로 눌러 담는다 오락가락하던 진눈깨비가 물러간다 유모차에 생활정보지 걷어오는 할머니 치마.. 2009. 1. 1.
2009 국제신춘문예 당선시 :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 / 도미솔 [2009 신춘문예시 당선작]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 - 도미솔(도순태)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끝별 명왕성은 난쟁이행성 134340번이란 우주실업자 등록번호를 받았다 그때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한 남편은 지구에서부터 점점 어두워져 갔다 명왕성은 남편의 별 그가 .. 2009. 1. 1.
2009 매일신춘문예 당선시 :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 / 최정아 < 2009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 - 최정아 한 떼의 구름이 내게로 왔다. 한쪽 끝을 잡아당기자 수백 개의 모자들이 쏟아졌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의 모자도 나왔다. 그 속에서 꽹과리 소리와 피리 소리도 났다. 할아버지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어깨 흔들며 춤을 .. 2009. 1. 1.
2009 경상신춘문예 당선시 : 골목 안으로 열리는 봄날의 동화 / 정원 <2009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골목 안으로 열리는 봄날의 동화(童話) - 정원 ▲ 그림: 윤문영 봄은 아이들 시린 손끝에서 왔다 골목 안은, 어김없이 가위질 소리로 짤랑거리고 덩달아 온 세상 흰 밥풀꽃 가득한 뻥튀기 소리 와아, 골목 안 가득 풀려나오면 햇살처럼 환하게 웃음이 .. 2009. 1. 1.
2009 한라문예 당선시 : 오래된 잠 / 이민화 <2009 한라문예 시 당선작> 오래된 잠 - 이 민 화 ▲삽화 오승익(서양화가) 다섯 송이의 메꽃이 피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알리는 검은 적막을 깨고, 돌담을 딛고 야금야금 기어올라 초가지붕 위에 흘림체로 풀어놓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바람벽이 움찔 다리를 절면, 마당가에 선 감나.. 2009. 1. 1.
2009 불교신문 신춘문예시 당선작 : 가게 세 줍니다 / 유금옥 * 2009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 가게 세 줍니다 - 유 금 옥 나뭇가지에 빈 가게 하나 있었어요. 참새 두 마리가 날아와 화원을 차렸죠. (햇살 꽃방) 정말 그날부터 햇빛들이 자전거 페달을 쌩쌩 밟았다니까요 가게에 봄이 한창일 때는 산들바람도 아르바이트를 했죠. 사랑에 빠진 벌 나비가.. 2008. 12. 31.
2009 문화신춘문예 당선작 : 즐거운 장례식 / 강지희 * 2009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즐거운 장례식 - 강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 2008. 12. 31.
(시) 그날은 몇 날인가 / 남상학 그날은 몇 날인가 - 남상학 이 자리는 어디쯤인가 돌아보는 날은 불씨 하나 살아 남아서 모진 바람 부대끼며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이었지 한 방울 물이 모여 흐르는 저만치 강물처럼 오늘이 어제런듯 어둠에서 빛으로 늘 출발뿐인 길이었다 해도 허허로운 바람 소리 영혼의 불꽃은 흔들리고 하늘 꿈꾸는 동안 발자국마다 따라와 친구가 되어 내 곁에 눕는 그대 그림자 별이 눈을 뜨고 새벽 닭 울음으로 타는 불꽃 한 떨기로 비로소 환한 아침이 열리는 아, 그날은 몇 날인가. 시집 "하늘을 꿈꾸는 새" 2008. 11. 27.
(시) 빛의 작업 / 남상학 빛의 작업 - 남상학 한밤중에 어부(漁夫)들은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불씨를 찾아 짙은 어둠의 바다에서 갓 올라온 물고기 비늘 같은 광채(光彩)를 그물에 걷어 올린다 빛을 낚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눈부시다. 가장 날카로운 곡괭이로 암반을 쪼아내는 광부(鑛夫)들은 빛의 광맥을 따라 한 발짝씩 어둠을 뚫어내고 부싯돌 같은 빛의 원형(原型)을 쪼아낸다 빛을 캐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눈부시다. 살아 있는 의식(意識)을 위하여 길가에서 주운 하찮은 것들을 독특한 연금술(鍊金術)로 구워내는 시인(詩人)들은 외로운 밤을 홀로 앉아 싱싱한 언어를 갈고 닦는다 빛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눈부시다. 무형(無形)의 빛, 그 위대한 빛의 작업(作業)은 몇 년이 걸릴까 시집 "하늘을 꿈꾸는 새" 2008. 11. 27.
(시) 라보니어 / 남상학 라보니여 - 남상학 그 옛날 팔레스타인의 현자(賢者)처럼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불러 봅니다. 라보니여 낮게 더 낮게 작게 더 작게 이 땅에 오셔서 큰 스승으로 사신 이여 당신은 찬란한 빛이십니다. 사랑의 빛 용서의 빛 평화의 빛 정의의 빛 진리의 빛 라보니여, 당신과 더불어 한 점 빛이 되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가늘게 아주 가늘게 흔들립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을 그리는 마음이 불타듯이 라보니여, 우리 삶의 어둠 속에서 빛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넘치도록 기름을 부어 주소서. * 라보니(Rabboni)는 '선생'을 의미하는 히부리어, '랍비'의 또 다른 표기 시집 "하늘을 꿈꾸는 새" 2008. 11. 27.
(시) 자화상 / 남상학 자 화 상(自畵像) - 남상학 하늘 우러러 물빛 눈매를 닮은 학(鶴)이 운다. 아득한 간구(墾求)만이 표적(標的) 위에 나부끼기엔 이제 힘이 겨워 목을 흔들어 학이 운다. 다가갈수록 초조해지고 우러러 볼수록 달아나는 얼굴 빈 공간을 휩싸고 도는 바람 소리에 아픈 울음을 삼키다가도 태어날 때 이미 배운 습성(習性) 때문에 행여나 기다림에 가슴 조이며 하늘에 목을 올려 오늘도 학이 운다. 시집 '하늘을 꿈꾸는 새' 2008. 11. 27.
(시) 땅 위에 쓰는 글씨 / 남상학 땅 위에 쓰는 글씨 - 남상학 무리 속에서 당신이 허리 굽혀 땅 위에 글을 쓰듯이 나는 어둠의 골방에 숨어 감히 당신의 흉내를 내어 남몰래 글을 쓴다. 가녀린 새싹처럼 고개를 세운 나의 부끄러운 언어(言語)들은 어느 광명한 날 눈부신 태양 아래 당당한 얼굴로 나설 수 있을까. 용서할 수 없는 곳에 사랑은 용서하듯 증거할 수 없는 곳에 믿음은 증거하듯 잠자는 마음 속 양심을 푸른 생명처럼 일깨울 수 있을까. 돌팔매질 일보 전(一步前)에 하나씩 둘씩 슬그머니 돌을 놓고 돌아가는 기적 아닌 기적을 위하여 싸늘한 겨울 가지 끝에 매어 달린 메마른 나의 언어에는 언제쯤 하이얀 눈꽃을 피울 수 있을까. 아니면 어느 이른 봄날 화신(花信)이 오는 길목의 잔설을 헤집는 바람 되어 꽃샘 바람이 되어 무리 속에서 당신이 .. 2008. 11. 27.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 / 윤오영 방망이 깎던 노인 윤 오 영(尹五榮)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가는 길.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가지고 가려고 깎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던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었다. 더 깍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2008. 11. 26.
(수필) 끝없는 만남 / 안병욱 끝없는 만남 - 안 병 욱 왜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는가? 만나기 위해서다. 누구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을. 독서는 인생의 깊은 만남이다. 우리는 매일 가족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동료를 만나고 또 이웃을 만난다. 만남이 없이는 인생이 있을 수 없다. 인생은 끊임없는 조우요, 부단한 해후다. 우리는 같은 시대의 사람을 만나는 동시에 옛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옛 사람을 어떻게 만나는가? 책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 독서는 옛 사람들과의 깊은 정신적 만남이다. 만남에는 얕은 만남이 있고 깊은 만남이 있다. 불행한 만남이 있고 행복한 만남이 있다. 소비적인 만남이 있고 생산적인 만남, 창조적인 만남이 있다. 옛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들의 정신과 만나는 것이요. 그들의 사상과 만나는 것이다. .. 2008. 11. 25.
(수필) 고독에의 향수 / 안병욱 고독에의 향수 -안병욱 인간은 세 개의 눈을 갖는다. 첫째는 밖으로 향하는 눈이요, 둘째는 위로 향하는 눈이요, 셋째는 안으로 향하는 눈이다. 밖으로 향하는 눈은 자연과 객관적 대상의 세계로 향한다. 위로 향하는 눈은 신과 종교적 신앙의 세계로 향한다. 안으로 향하는 눈은 자아와 내면적 세계로 향한다. 청년의 사색과 관심의 특색은 내향성과 내면성이 있다. 그는 눈을 밖에서 안으로 돌리고 남에게서 자기에게로 돌린다. 청년은 주로 자아와 내면적 세계로 향한다. 그것은 자기 발견, 자기 탐구, 자기 성찰, 자기 응시의 눈이다. 내가 나의 내적 세계를 들여다보려는 눈이다. 사색에는 조용한 환경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색하기 위해서 주위의 접촉에서 격리되어 조용한 장소를 구한다. 더구나 자기 성찰에는 그러한 환경이.. 2008. 11. 25.
(수필) 하루에 한번쯤은 / 안병욱 하루에 한번쯤은 안병욱 1. 높은 하늘과 아름다운 자연을...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쯤은 높은 하늘을 쳐다보자. 별이 총총히 깔린 흰 구름이 시름없이 떠도는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한다. 우리의 생활은 자연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인간이 자연에서 자꾸만 멀어진다는 것은 병들어 간다는 증거다. 본래 인간은 자연의 아들이요 자연의 딸이다. 자연은 우리를 낳은 위대한 어머니다. 우리는 흙에서 나서 흙위에서 살다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발바닥이 흙을 밟지 않을 때 인간의 몸과 마음에는 병이 생긴다. 우리는 오늘날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서, 산업화 도시화라는 명목하에서 우리의 따뜻한 품이요, 어머니인 자연에서 자꾸 멀어져 가고 있다. 조용한 산길을 걷고, 맑은 풀냄새의 향기를 맡고, 깨끗한 시냇물에.. 2008. 11. 25.
(수필) 미리내 / 서정범 미리내 - 서정범 은하수를 우리말로 미리내라고 한다. 미리내는 '미리'는 용(龍)의 옛말 '미르'가 변한 말이고 '내'는 천(川)의 우리말로서, 미리내는 '용천(龍川)'이란 어원을 갖는 말이라 하겠다. 어원에서 보면 용은 하늘에서는 은하수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보통 학교 아이들이 기차를 본 횟수를 늘리기 위해 꼭두새벽에 일어나 달려가기도 하고 기차를 보려고 밤 늦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그리고 기차에서 얼마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느냐가 큰 자랑거리였다. 하루는 셋이서 새로운 기록을 내려고 기차 오기를 기다렸다. 선로가에 아이들이 있는 것을 보면 기적을 울리기 때문에 숨어 있다가 지날 때 바싹 다가서야 된다. 기차가 굽이를 돌아 나타났다. 뛰어나왔다. 뒤늦게 우리를 .. 2008. 11. 25.
신들린 詩, 국화꽃 옆에서 떠도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신들린 시 국화꽃 옆에서 떠도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객원기자 이오봉 국어 교과서에서 실렸던 ‘국화꽃 옆에서’ 라는 詩를 쓴 未堂 徐廷柱(1915-2000) 선생의 시문학관이 있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를 시인 김수경(前 서울大 치대 교수, 계간 文學精神 발행인)과 강인섭(前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인지 11월 3.. 2008. 11. 25.
(수필) 우덕송(牛德頌)/이광수 우덕송(牛德頌) 이광수 금년은 을축년(乙丑年)이다. 소의 해라고 한다. 만물에는 각각 다소의 덕(德)이 있다. 쥐 같은 놈까지도 밤새도록 반자위에서 바스락거려서 사람에게, "바쁘다!" 하는 교훈을 주는 덕이 있다. 하물며 소는 짐승 중에 군자다. 그에게서 어찌해 배울 것이 없을까. 사람들아! 소 해의 첫날에 소의 덕을 생각하여, 금년 삼백육십오 일은 소의 덕을 배우기에 힘써 볼까나. 특별히 우리 조선 민족과 소와는 큰 관계가 있다. 우리 창조신화(創造神話)에는 하늘에서 검은 암소가 내려와서 사람의 조상을 낳았다 하며, 또 꿈에서 소가 보이면 조상이 보인 것이라 하고 또 콩쥐팥쥐 이야기에도 콩쥐가 밭을 갈다가 호미를 분지르고 울 때에 하늘에서 검은 암소가 내려와서 밭을 갈아 주었다. 이 모양으로 우리 민족.. 2008. 11. 25.
(수필) 가을이면 앓는 병 / 전혜린 가을이면 앓는 병 전혜린 이 결별과 출발의 집념은 매년 가을이면 나에게 다가오는 병마이다.가을처럼 여행에 알맞는 계절이 또 있을까? 모든 정을 다 결별하고 홀가분하게 여행을 하고 싶어지는 계절이 가을이다. 엷어진 일광과 냉랭한 공기 속을 어디라고 정한 곳 없이 떠나 버리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난다. 매일 매일의 궤도에 오른 생활이 뽀얀 오후의 먼지 속에서 유난히 염증나게 느껴진다. 여름의 생기가 다 빼앗아가 버린 나머지의 잔해처럼 몸도 마음도 피로에 사로잡히게 되고 생 전반에 대한 지긋지긋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럴 때 어디로 떠났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출발을 생각하며 자기의 정해진 궤도 밖으로 튀어 나갈 생각에 몸부림친다. 이 결별과 출발의 집념은 매년 가을이면 나에게 다가오는 병마(.. 2008. 11. 24.
(수필) 심춘순례 서(尋春巡禮 序) / 최남선 심춘순례 서(尋春巡禮 序) 최남선 우리의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문학 아닌 채 가장 명료하고 정확하고, 또 재미있는 기록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림자와 생활의 자취는 고스란히 똑똑히 이 국토 위에 박혀서 어떠한 풍우(風雨)라도 마멸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우리 역사의 한 작은 학도(學徒)요, 우리 정신의 한 어설픈 탐구자(探究者)로서, 진실로 남다른 애모(哀慕)와 탄미(歎美)와 함께 무한한 궁금스러움을 이 산하대지(山河大地)에 가지는 것입니다. 자갯돌 하나와 마른 나무 한 밑동도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흥미(興味)와 또 연상(聯想)을 자아냅니다. 이것을 조금씩 색독(色讀)이나마 하게 된 뒤부터 우리 나라가 위대한 시의 나라, 철학의 나라임을 알게 되.. 2008. 11. 24.
(수필) 갑사로 가는 길 / 이상보 갑사(甲寺)로 가는 길 - 이상보 지금은 토요일 오후, 동학사(東鶴寺)엔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다. 새로 단장(丹粧)한 콘크리트 사찰(寺刹)은 솜이불을 덮은 채 잠들었는데, 관광(觀光) 버스도 끊인 지 오래다. 등산복 차림으로 경내(境內)에 들어선 사람은 모두 우리 넷뿐, 허전함조차 느끼게 하는 것은 어인 일일까? 대충 절 주변을 살펴보고 갑사(甲寺)로 가는 길에 오른다. 산 어귀부터 계단으로 된 오르막길은 산정(山頂)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어 팍팍한 허벅다리만 두들겼다. 그러나, 지난 가을에 성장(盛裝)을 벗은 뒤 여윈 몸매로 찬바람에 떨었을 나뭇가지들이, 보드라운 밍크 코트를 입은 듯이 탐스러운 자태(姿態)로 되살아나서 내 마음을 다사롭게 감싼다. 흙이나 돌이 모두 눈에 덮인 산길을 도란도란 이.. 2008. 11. 24.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幸福) / 김소운 가난한 날의 행복(幸福) 김 소 운(金素雲) 먹을 만큼 살게 되면 지난날의 가난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가 보다. 가난은 결코 환영(歡迎)할 것이 못 되니,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생활에도 아침 이슬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회상(回想)이 있다. 여기에 적는 세 쌍의 가난한 부부(夫婦)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옛날 이야기지만, 내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感動)을 안겨다 주는 실화(實話)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신혼 부부(新婚夫婦)였다. 보통(普通)의 경우(境遇)라면, 남편이 직장(職場)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反對)였다. 남편은 실직(失職)으로 집 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會社)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2008. 11. 24.
(수필) 불국사 기행 / 현진건 불국사 기행 현진건 7월 12일, 아침 첫 차로 경주를 떠나 불국사로 향했다. 떠날 임시에 봉황대(鳳凰臺)에 올랐건만, 잔뜩 찌푸린 일기에 짙은 안개는 나의 눈까지 흐리고 말았다. 시포(屍布)를 널어 놓은 듯한 희미한 강줄기, 몽롱한(흐릿한) 무덤의 봉우리, 쓰러질 듯한 초가집 추녀가 눈물겹다. 어젯밤에 나를 부여잡고 울던 옛 서울은 오늘 아침에도 눈물을 거두지 않은 듯. 그렇지 않아도 구슬픈 내 가슴(객수)이어든 심란한 이 정경에 어찌 견디랴? 지금 떠나면 1년, 10년, 혹은 20년 후에나 다시 만날지 말지! 기약 없는 이 작별을 앞두고 눈물에 젖은 임의 얼굴! 내 옷소매가 촉촉이 젖음은 안개가 녹아 내린 탓만은 아니리라. 장난감 기차는 반 시간이 못 되어 불국사역까지 실어다 주고, 역에서 등대(等待.. 2008. 11. 24.
(수필) 보름달 / 김동리 보름달 - 김동리(金東里) 새벽달보다는 초승달이 나에게는 한결 친할 수 있다. 개나리, 복숭아, 살구꽃, 벚꽃들이 어우러질 무렵의 초승달이나 으스름달이란, 그 연연하고 맑은 봄밤의 혼령(魂靈)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소식(蘇軾)의 ‘봄 저녁 한 시각은 천 냥에 값하나니, 꽃에는 맑은 향기, 달에는 그늘(春宵一刻値千金 花有淸香月有陰)’이라고 한 시구(詩句) 그대로다. 어느 것이 달빛인지 어느 것이 꽃빛인지 분간할 수도 없이 서로 어리고 서려 있는 봄밤의 정취란 참으로 흘러가는 생명의 한스러움을 느끼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단들 초승달로 보름달을 겨룰 수 있으랴. 그것은 안 되리라. 마침 어우러져 피어 있는 개나리, 복숭아, 벚꽃들이 아니라면, 그 연한 빛깔과 맑은 향기가 아니라면, 그 보드라운 숨결 같은.. 2008. 11. 24.
(수필) 구두 / 계용묵 구두 - 계용묵(桂鎔默) 구두 수선(修繕)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도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고,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귓맛에 역(逆)했다. 더욱이, 시멘트 포도(鋪道)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音響)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 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이 아닌 말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어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昌慶苑) 곁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노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2008. 11. 24.
(수필) 어린이 찬미 / 방정환 어린이 찬미 방정환 ​ 1​.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 볕 좋은 첫 여름 조용한 오후이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 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아니, 그래도 나는 이 고요한 자는 얼굴을 잘 말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의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은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것 같고, 이 세상의 평화라는 평화는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듯 싶게,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 고운 나비의 날개……, 비단결 같은 꽃잎, 아니 아니, 이 세상에 곱고 보드랍다는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 2008. 1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