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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 일반

신들린 詩, 국화꽃 옆에서 떠도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by 혜강(惠江) 2008. 11. 25.

 

신들린 시

 

국화꽃 옆에서 떠도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객원기자 이오봉

 

 

 

   국어 교과서에서 실렸던 ‘국화꽃 옆에서’ 라는 詩를 쓴 未堂 徐廷柱(1915-2000) 선생의 시문학관이 있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를 시인 김수경(前 서울大 치대 교수, 계간 文學精神 발행인)과 강인섭(前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인지 11월 3일, 길옆에 심어진 들국화들은 아직도 활짝 피어나질 않았습니다.  2001년 11월 선운리 폐교를 10억원을 들여 개축을 하고 문을 연 미당 시문학관에는 미당의 육필원고와 사진,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미당 초상화 등 그의 문학세계를 돌아 볼 수있는 1만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념 시문학관 옆 개천 건너에 未堂의 생가도 예전과 달리 초가집으로 다시 잘 지어 놓았더군요. 시골 초등학교의 시설을 그대로 이용하고 일부만을 개축을 한 시문학관은 조용한 시골 초등학교의 분위기가 그대로 풍기고 있었습니다. 잔디가 심어진 운동장과 교문이 있던 자리에 네모난 커다란 콘크리트 문만이 다른 시골 초등학교와 달리 보였을 뿐 이였습니다.

  소요산 북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시문학관 마당에 서서 보면 건너편 마을 뒷산에 미당 선생이 영원히 잠들고 있는 묘소가 아득하게 보입니다. 풍천장어로 유명한 풍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개울을 건너 미당 선생을 만나러 갔습니다. 노란 야생 국화를 잔뜩 심어 놓은 산언덕을 오르니 미당 선생과 부인 방옥숙 여사가 나란히 잠든 묘소가 고향 마을과 시문학관을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지금쯤 미당 선생 묘소 앞 언덕에 심어진 들국화들이 꽃망울을 터트렸을 터이지만 그 때만 해도 꽃망울을 단 짙푸른 야생 들국화 밭으로 남아 있였습니다. 석탑과 ‘무등을 바라보며’라는 그의 詩가 적힌 작은 시비가 그의 묘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어려운 郡 살림을 하면서 미당 기념 시문학관을 개관하느라 애를 썼던 前 이효종 고창군수 같은 분들이 있어서 오늘날의 기념문학관이 문을 열었지만 그동안 많은 수난을 겪었다고 합니다.


  시문학관이 문을 열고 얼마 안 있다가 ‘친일 시인 미당 서정주를 깍아 내리고 규탄하는 시민단체와 문인들의 항의와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원회 전북본부‘이라는 긴 이름의 단체 회원들은 한 때 시문학관을 폐쇄하고 ’기념 국화꽃 축제‘마저 폐지하라고 시문학관 앞에서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친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결국 시문학관에 미당의 친일 행적을 전시하여 마당의 문학세계를 제대로 평가하여야 한다는 일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미당의 詩 6편과 수필 3편, 소설 2편 등 친일문학 작품 11편을 문학관 안에 전시했다고 합니다.

   “친일을 했다는 것이 잘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 때 활동한 예술인 중 친일에 연루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언제까지나 미당의 詩를 친일의 굴레에 가둘 수는 없는 일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민예총 사무총장과 공동상임위원장을 지낸 문학계에서 참여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신경림(73) 시인이 언젠가 한 말입니다.  미당의 친일 행적에 대한 역사적 단죄보다 당대의 정황을 면밀히 검토를 해 미당의 삶 전체를 균형 있게 평가를 해보고 나서 그의 문학성을 우리 자산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신경림 시인의 주장에 동조를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몇 년 전 한 문학잡지에서 현역 시인 246명을 상대로 ‘좋아하는 시’ 3편씩 뽑아 본 결과 72명의 시인으로부터 미당의 詩가 제일 많이 뽑혔다고 합니다. ‘자화상’ ‘동천(冬天)’ 등 1회 이상 추천을 받은 그의 詩는 23편, 미당에 이어 백석(40명), 김수영(36명) 順으로 추천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당의 친일 경력에 비추어 그의 미학까지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80년대 후반부터 시단 안팎에 일어났던 점을 비춰볼 때 이런 결과는 의외였다고 다들 놀라워했습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 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詩의 이슬에도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신들린듯 詩를 쓰면서 한 평생을 살다간 미당 서정주, 자신을 그린 미당의 ‘자화상’이라는 詩입니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서 혼란스러운 한 세대를 살면서도 詩만을 쓰다가 바람처럼 가버린 미당의 육신은 편히 고향 땅인 질마재에 누워 있지만 영혼만은 세상이 하도 시끄러워 아직도 편히 쉬지 못하고 떠돌고 있을는지 모릅니다. 

 

  지난 4월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실은 4776명의 명단을 소개하면서 서정주도 포함시켰습니다. 다츠시로 시즈오(達成 靜雄)로 창씨개명을 하고 1940년대 일본어로 ’항공일‘과 같은 노골적인 친일 詩 등을 여러 편 섰다는 이유에서 이었습니다.

  어디 미당 선생뿐이겠습니까, 소설가 이광수, 채만식, 박태원, 최정희, 김동인, 정비석, 주요한, 이무영을 비롯하여 시인 노천명, 모윤숙, 김종한, 김기진, 김상용, 김동환, 김용제, 김안서, 문학평론가 백철, 곽종원 등 우리 현대 문학을 일으켜 세운 분들이 대거 포함되 있어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생전에 애교를 떨며 그의 치마폭에서 놀아나던 이들이 미당이 죽자 반년도 안 되어 친일 운운하며 미당을 향해 손가락질해대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세계적인 시인이라고 하는 한 원로 시인이 중심에 있고 그를 추종하는 문인들이 앞장을 서왔습니다. 이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의 도덕적 위선을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미당 선생은 그런 이들과 같이 이 땅에서 같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고 싫어서 곡기를 끊고 일찍 돌아가셨는지 모릅니다.

  늦가을 오후 하늘이 가슴 시리게 푸른 날, 미당의 시문학관을 나서서 앞마당을 서성거릴 즈음 어디선가 나지막하게 미당의 ‘푸르른 날’을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자네들 왔는가?” 미당 선생이 시문학관 전시실 앞에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우리 일행을 맞이하시는 듯 했습니다만 복분자 술 한잔에 얼굴이 붉그레 해진 일행들의 얼굴에서는 씁쓸한 웃음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출처> 2008. 12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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