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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 일반

문 닫은 ‘주당(酒黨)’의 해방구 ‘시인통신’ 애사(哀詞)

by 혜강(惠江) 2008. 9. 18.

 

문 닫은 ‘주당(酒黨)’의 해방구

'시인통신’ 애사(哀詞)

- 죽은 시인의 골목 ‘피맛골’ 아, ‘시인통신’의 시대여! -

 

 

김화성 동아일보 기자

 

 

 

 

 

 

만나면 우리

왜 술만 마시며

저를 썩히는가.

저질러 버리는가.

좋은 계절에도

변함없는 사랑에도

안으로 문 닫는

가슴이 되고 말았는가.

왜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서로들 외로움만 쥐어뜯는가.

감싸주어도 좋을 상처.

더 피 흘리게 하는가.

쌓인 노여움들

요란한 소리들

거듭 뭉치어

밖으로 밖으로 넘치지도 못한 채….

 

- 이성부 ‘만날 때마다’ 전문

 

 

1780년 음력 칠월 여드레.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사방이 탁 트인 중국 요동벌판에 들어서면서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아,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그 유명한 호곡장론(好哭場論)이다. 연암은 말한다. 사람들은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라, 기쁨이 넘쳐도 울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고, 즐거움과 사랑이 터질 것 같아도 울고, 욕심이 가득 차도 울게 된다고. 즉 원인이 무엇이든 가슴이 꽉 막힐 땐 소리 내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는 것이다.

 

1200리나 아득하게 펼쳐진 요동벌판.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하늘 끝 땅 끝이 맞닿아 아교풀로 붙인 듯’ 한 대평야. 연암은 비로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통쾌한 마음이 절로 들어 몇 번이나 무릎을 쳤다.

 

손바닥만한 조선 땅. ‘서로 나 잘났다’ 핏대 올리며 싸우는 좀팽이 선비들. 중국 변방의 토성쯤밖에 안 되는 땅에 살면서, 청나라를 오랑캐라며 업신여기는 턱없는 허세, 한 줌도 못되는 상투를 갖고 세상에 잘난 척은 다하는 거드름. 연암은 ‘갓난아기가 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우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답한다. 그것은 슬퍼서 우는 게 아니다. 두려워서도 아니다. 삶의 고행을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아기가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와서, 손도 펴보고 발도 펴보니, 참으로 가슴이 시원해서 나온 우레 같은 것’이다.

 

울고 또 울고

 

1980년대 대한민국 서울. 연암이 살던 때나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정권 시절. 겨울공화국. 숨이 턱턱 막히고 먹구름이 낮게 드리웠다. 자궁이 답답하고, 불알 밑이 뻐근했다. 장안의 논객 호걸들은 어디 울 만한 곳이 없었다. 모두 애꿎은 술만 퍼댔다.

 

하지만 울 만한 곳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인통신’이 있었다. 시인통신은 교보빌딩 옆쪽 피맛길 한 모퉁이에 있었다. 정확한 주소는 서울 종로구 청진동 300번지(현재 ‘소문난 집’ 자리). 탁자 두 개에 의자 예닐곱 개가 전부였다. 빙 둘러 빽빽이 앉으면 12명이나 앉을까. 그곳에 장안의 시인 묵객 소설가 문학평론가 화가 신문쟁이 영화감독 연극쟁이 철학자 사진쟁이 산악인 작곡가 전위예술가 노동운동가 사주쟁이 출판인 자유기고가 정치지망생 애국지사 어중이떠중이 온갖 잡것들이 밤마다 모여 “전두환 노태우 씨×놈”을 내뱉고,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논하고, 개똥철학과 구라들을 풀어댔다.

 

시인통신은 해방구였다. 그곳은 술집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카페라고 하기에도 뭐한 묘한 곳이었다. 차라리 목로주점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옴팡 집이라고나 할까. ‘문화 복덕방’이요 ‘사람 복덕방’이었다. 촉수 낮은 알전구만 뎅그렁하게 매달린 2평짜리 공간. 술꾼들의 낙서가 사방벽면 천장 탁자 위까지 가득했다. 그중엔 명화 뺨칠 만한 그림이나 멋들어진 붓글씨도 보였다.

 

 

‘아이들은 데모하고, 어른들은 술 처먹고, 누나는 화장하고, 선거하는 놈들은 좆나게 바쁘다’/ ‘ 有酒有樂 無酒無樂(유주유락 무주무락)’/ ‘죽었으면 죽었지 지금은 죽을 수 없다’/ ‘목숨 바치세요. 술 마시려면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봅시다’/ ‘수많은 남자가 살고 갔지만, 당당한 대장부가 몇이나 될까?’/ ‘맥주는 길고 소주는 짧다’/ ‘허무 그 단단한 놈’/ ‘잘 사는 놈이 법을 지킬 때, 못 사는 놈은 기분이 좋다’/ ‘방관은 죄악이다’/ ‘깨어있는 것은 입밖에 없나보다’/ ‘하늘이 어두운 새벽, 사람들이 어둡게 살아가고 있다’/ ‘누님이 너무 아름다워서 개수작했습니다. 누님은 여전히 누님이고 강물은 저렇게 흘러갑니다’

 

 

김재곤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툭하면 시인통신(이하 시통)에서 울었다. 눈물 콧물이 술잔에 뚝뚝 떨어지면, 그는 그 눈물콧물이 섞인 술잔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닦지도 않은 그 술잔을 가득 채워 선후배들에게 권했다.

 

“봄은 왔어도 봄 같지 않고,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데모하고, 국가는 그걸 총칼로 막고…. 이게 무슨 개 같은 역사냐? 왜 이 나라는 이런 슬픈 역사만 되풀이되는 것이냐?”

 

그는 ‘광주’이야기만 나오면 울었다. 그 자신 신문쟁이로서 무력감에 또 울었다. 그리고 ‘광주학살자를 처벌하라’며 분신한 그의 아우를 생각하며 울었다. 그의 아우는 서울대 경제학도였다. 그는 거리의 시위대를 보면 미칠 것 같다고 했다. 그 속에서 아우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는 것이었다. 그는 동아일보에 피 같은 칼럼을 썼다. 그의 글엔 분노와 슬픔 그리고 절절한 절규가 담겨 있었다. 그는 군사정권에 골칫거리요, 눈엣가시였다.

 

그는 늘 큼직한 책가방을 옆구리에 꽉 끼고 다녔다. 그 속엔 당시 외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던 영어원서가 가득했다. 그는 그 책들을 게걸스럽게 읽어댔다. 그의 집에도 방마다 책이 넘쳐났다. 그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선후배들에게 끊임없이 화두를 던졌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넌 그런 경우 어떻게 쓸 것인가?’

 

그는 한겨레 논설위원 김종철 김태홍과 자주 어울렸다. 그들도 김 위원이 울면 함께 눈물을 글썽였다. 당시 동아일보 후배이던 김지완 손석춘 기자도 그의 술친구였다.

 

가끔 당대의 논객 김중배 동아일보 논설위원도 자리를 같이했다. 술좌석에서 김중배 위원은 거의 말이 없었다. 작은 몸집에 까무잡잡한 얼굴. 외로운 눈빛에 약간 피곤한 표정. 늘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동료들의 말이 끝나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입가에 엷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어린애 같은 손님들

 

시인통신은 원래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시인 겸 소설가인 조해인, 시인 김선유 이도윤 이생진 이승철 임문혁 최정자, 추리작가 정건섭, 소설가 김우영, 문학통신 이지룡, 화가 김문조 박광호 서영준, 사진작가 김종구, 자유기고가 공정희, 교사 안철상, 문학청년 노광래 박경남, 해냄출판사 송영석, 출판인 이정한, 사업가 김명성, 방송인 김경원 등이 그 멤버였다. 가끔 천상병 시인이나 걸레스님 중광, 그리고 소설가 이호철 이외수, 전위예술가 무세중도 얼굴을 비쳤다.

 

 

이들은 1982년 종로통에 연락사무소 시통을 만들어 놓고, 틈만 나면 하나둘 모여 세상 사는 이야기나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했다. 술이 생각나면 서로 주머니를 털어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맥주를 사다 마셨다. 안주는 인근 밥집에서 동그랑땡이나 생선구이 혹은 순대국을 시켜다 먹었다.

 

낮엔 누구든 커피 한두 잔 알아서 타 마시곤 바구니에 500원씩 넣으면 됐다. 그 돈은 시통 운영비로 쓰였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주인 구실을 했던 시인 박종수 씨가 그때그때 필요한 비용을 갹출해서 근근이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두 달이지, 해가 넘어가자 빚이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박씨는 두 손을 들었다.

 

1984년 봄 한귀남(1944~)씨가 우연히 시통에 들렀다가 엉겁결에 덜컥 운영을 맡게 됐다. 당시 한씨는 빈 주먹에 아이 셋이 딸린 나이 마흔의 이혼녀 신세. 박씨는 “돈은 천천히 갚아도 되니 한번 해보라”고 했다. 한씨는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어린 세 아들 (당시 17,15, 12세)의 얼굴이 차례차례 눈에 어른거렸다. 우선 새끼들부터 살리고 봐야 했다.

 

“난 부잣집 딸로 태어나 비교적 큰 고생 없이 살았었다. 그러다가 사업하던 남편이 쫄딱 망하고 이혼까지 하게 되자 절망과 분노에 어쩔 줄 몰랐다. 그때까지 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시통을 맡은 뒤 한동안 난 그곳을 드나드는 그 괴물 같은 술꾼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툭하면 울부짖거나 욕설이요, 탁자가 엎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불쑥불쑥 던지는 알쏭달쏭한 해괴한 말들도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다. 밥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들은 ‘나라와 민족 타령’에 밤을 지새웠다. 정말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도 가슴에 젖어왔다. 모두 ‘어린애 같은 어른들’이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나는 시통하면서 비로소 인생초등학교를 마쳤다고 볼 수 있다.”

 

“손님들은 하나같이 소탈하고 인간적이었다. 난 주인이지만 신경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들이 오면 인근 구멍가게에서 맥주 몇 병과 마른안주를 사다가 놓아주곤, 병 숫자만 적어놓으면 그만이었다. 가끔 라면을 끓여주거나, 달걀말이 혹은 김치찌개를 해주면 어린애들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술값은 각각 호주머니에서 조금씩 갹출되어 내 앞에 놓여졌다. 난 그중 한두 명 있게 마련인 빈 털터리에게 교통비를 슬쩍 찔러주었다.”

 

한씨 자녀들은 시통 바로 밑 2평 지하방에서 두더지처럼 살았다.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점점 말을 잃어갔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술병과 찻잔을 정신없이 날라야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 동굴 같은 방에서 상머리에 앉아 묵묵히 공부했다. 고마웠다. 그걸 보면 다시 힘이 용솟음쳤다.

 

 

시한폭탄 ‘화가와 시인’

 

한씨는 하루 3만~4만원 벌면 그중 7000원은 옛 주인인 박씨가 시통을 담보로 빌려 쓴 일숫돈을 갚는데 써야 했다. 그 돈을 제하고 남은 돈 중 1000원으로 쌀을 사다가 먹고 살았다. 굶지 않는다는 것으로도 한없이 고마웠다. 바쁠 땐 자리를 비워도 별문제 없었다. 자기들이 알아서 돈을 놓고 가거나, 외상 땐 벽에다가 ‘아무개 맥주 몇 병 먹고 간다’고 써놓고 갔다. 그게 외상 장부인 셈이었다. 그들은 나중에 외상값을 갚고 나선, 그 벽 낙서를 쓱쓱 지워버렸다.

 

아이들은 그 습한 지하방에서 1992년 이사 갈 때까지 8년을 살아야 했다. 한씨는 지금도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어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지 못한 것도 가슴이 찢어질 듯하다며 울먹인다.

 

한씨가 시통을 맡은 이듬해인 1985년부터 손님들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초기 터줏대감들이 하나둘 이런저런 사정으로 발길이 뜸해진 것이다. 대신 화가 서영준과 시인 김홍성을 필두로 서라 벌예대 출신의 시인 소설가 화가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당시 술집들은 자정 이후엔 영업을 할 수 없었다. 소위 심야영업금지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어기면 엄청난 벌금을 내야 했다. 게다가 시통은 무허가라 한번 걸렸다 하면 풍비박산날 게 뻔했다.

 

하지만 시통은 무슨 똥배짱인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일찍 문을 닫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시통의 술꾼들은 밤 12시가 넘어도 전혀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되레 자정이 가까워지면 어디선가 2,3차를 끝내고 시통으로 꾸역꾸역 자꾸만 모여들었다. 한씨로선 애간장이 타고 환장할 일이었다.

 

그 와중에 박경용 시인은 대문 밖에서 “어이, 한 여사, 경용이가 왔소!” 하며 고래고래 소리부터 지르기 일쑤였다. 천상기 일간스포츠 기자는 들입다 철대문부터 걷어차고 들어왔다. 천하의 호걸 원강 스님이 그 뜨겁던 여름에도, 누더기 장삼 차림으로 “껄껄껄” 웃으며 들어서는 것은 정말 양반 중의 으뜸 양반이었다.

 

시인과 화가가 논쟁을 벌이면 그건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직관과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런지 이들은 조금도 지지 않으려 했다. 신문기자들은 이들의 논쟁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은 좀처럼 가슴을 열지 않았다.

 

 

멋과 흥이 있던 ‘심야 불쇼’

 

그래도 이런 건 봐줄 만했다. 그 다음 ‘심야 불쇼’가 문제였다. 소설가 최성각의 ‘봄비’가 울려 퍼지면서 노래가 시작되는 것이다. 최성각은 그의 선배 표성흠과 시통 단골식구였다.

 

“봄비를 맞으며 길을 걸으며, 외로운 거리의 비를 맞으며, 빗방울 떨어져 빗물이 되었나….” 이어 산악인 박인식의 애절한 ‘첫사랑’이 이어진다. “첫사랑에 나는 울었네. 첫사랑에 나는 울었네. 나팔꽃 필 무렵 손수건을 흔들면서….” 화가 서영준이 “씨팔 나도 한 곡조” 하며 벌떡 일어나 ‘선운사’를 노래한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산 타는 시인 권경업은 ‘산홍’으로 기를 죽인다. “산홍아, 너만 가고 나만 홀로 남았구나. 너 없는 이 설움 백년이 넘을 건가, 천년이….” 시인 송현도 청승맞게 ‘산장의 여인’을 들고 가세한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시인 김홍성의 ‘어디로 갈 거나’였다. 그가 노래 부르기 시작하면 좌중은 한순간에 숨을 죽이고 마른 침을 삼킨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내 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거나….”

 

고등학교 1학년 때 등단한 포항의 천재시인 박경용은 만담으로 레퍼토리를 슬쩍 바꾼다. “구룡포 앞바다에 메루치만 팔딱팔딱! 갈매기는 오락가락! 백성은 많고 먹을 것은 없고! 개×이 올씨다!!” 자유당 시절 그의 고향 국회의원 선거에 나왔던 어느 출마자의 연설을 흉내 낸다. 박 시인은 한번 입이 터지면 아무도 못 말린다. 결코 만담으로만 끝낼 사람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이 나오더니 자연스럽게 “황성옛터에 밤은 깊어”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돌연 “모란이 피기까지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시낭송이 줄줄 이어진다.

 

빙그레 웃고 있던 김종천 시인이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를 눈을 지그시 감고 읊는다. “알룩 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 온 함경도 사내…” 천상기 기자가 질세라 고려말기의 선승 나옹선사의 시를 읊조린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그 와중에 한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듣고만 있는 사람도 있다. 작곡가 한돌이었다. 곁에선 아직 기회를 못 잡은 이상범 이창년 서벌 신세훈 전연욱 정공채 진복희 허유 시인이 이제나저제나 끼어들 틈을 노리고 있다.

 

 

‘시인통신’의 벽은 예나 지금이나 낙서로 가득하다. ‘낙서’ 자체가 시다.

‘양말주’ 사건과 심야 단속의 추억

 

  불쇼는 노래만 있는 게 아니었다. A씨와 B씨가 벌인 희대의 ‘양말주와 빤스주’ 사건은 바로 그 무렵에 터졌다. 어느 푹푹 찌는 여름날 저녁, A와 B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팽팽한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은 이미 얼큰한 상태였다. 탁자엔 막걸리가 한 주전자 놓였다. A가 먼저 자신의 고린내 나는 양말을 벗었다. 그러고는 막걸리 한 사발을 그 양말에 걸렀다. 그 다음 젖은 양말을 비틀어 짜니 검은 땟국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막걸리 잔은 금세 거무죽죽해졌다.

 

  A가 “자 이 술 한 잔 받으시라!”며 B에게 내민다. B는 “좋아, 내가 마다할쏘냐?”며 단숨에 마셔버린다.

 

  이번엔 B차례. B는 바지를 훌훌 벗더니 와락 팬티저 훌러덩 내린다. 그러고는 그 노란 뭐 묻은 사각팬티 한쪽을 묶더니 거칠게 막걸리 한 사발을 거른다. 역시 B도 팬티를 비틀어 몇 방울 남은 것까지 짜낸다. “옛다 이거나 처먹어라!” B가 씩씩거리며 말한다. “처먹으라니, 드십시오 그래야지!” A가 맞받아친다. “드시든가 처 먹든가, 어쨌든 들이키라우!” 결국 A가 눈을 질끈 감고 쭈욱~ 마신다. 주위에선 박수가 터져 나오고 낄낄 박장대소가 터진다. 정말 다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그렇게 천둥벌거숭이들이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한밤중에 지지고 볶고 생난리를 치는데 시통에 무 일 없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어느 날 무허가 심야영업으로 주인 한씨가 새벽 1시에 종로경찰서에 잡혀간 것이다. 한씨가 조사받고 나오니 새벽 3시.  시통은 알전구 환하게 켜진 채로 빈 술병만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정면 벽엔 “누님은 잡혀가고 우리는 술도 못 먹고 노태우만 욕하다 간다”는 낙서가 쓰여 있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외쳤다. “누님! 누님! 저 (박)상우예요. 누님 걱정돼서 여태 우리들 집에 못 어요. 괜찮아요?” 소설 쓰는 상우 일행이었다. 역시 그들은 가지 않고 걱정하고 있었다. 한씨는 눈물이 핑 돌았다. 며칠 후 법원에서 등기우편이 날아왔다. ‘식품위생법 위반’에 벌금 30만원. 

 

  시통 식구들도 종종 벌금을 먹었다. 화장실이 멀어 문 앞에 양동이를 놔뒀지만 그걸 죽어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담벼락이나 전봇대에 실례하다가 경범죄 위반으로 벌금을 먹었다. 할 말 없었다. 동료들은 그걸 보고 재밌어 죽겠다고 낄낄거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벌금 소식에 시통 식구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이두엽 서울커뮤니케이션 대표가 펄펄 뛰었다. “개새끼들! 빈대 간을 내먹어도 유분수지! 누님 또 합시다. 내가 10만원 보태줄 테니…. 누가 이기나 해봅시다! 이 가난한 글쟁이들이, 계란프라이 해놓고 밤새 술 좀 먹기로서니, 불쌍한 누님 잡아다가, 벌금 매기다니…아이구 치사하다 치사해.”

 

  “그럼! 그럼! 하모! 하모! 개새끼 닭새끼 쥐새끼 염소새끼 모기새끼 빈대새끼 개구리새끼… 또 없냐? 치사한 새끼들….” 술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새끼에 새끼줄을 이어댔다.

 

  “뭐? 시통이 벌금 먹었다고?” 이번엔 ‘핏대’가 유난히 많은 신문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신문사 노조원들은 아예 시통에서 회의를 하거나 회식을 했다.

 

 

넝쿨의 시인 김신용

 

 

집 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중략)…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 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 동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 놓고 라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

 

-  ‘김신용 ‘도장골 시편-넝쿨의 힘’ 전문’

 

  1988년 여름, 지게꾼 시인 김신용이 화가 박광호와 홀연히 시통에 나타났다. 그는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보도블록 깔던 일용노동자였다. 구두닦이 껌팔이 지게꾼 매혈 어부까지 안 해본 게 없었다. 그 후 그는 가끔 나타나서 노트에 깨알같이 쓴 시를 슬며시 내놓곤 멋쩍어 했다.

 

  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지만 단 한 번도 공짜 술을 먹지 않았다. 한두 잔이라도 얻어먹었다 싶으면, 그 다음 반드시 그 빚을 갚고야 말았다. 당시 그는 서울역 앞 양동에서 한달 12만원 짜리 사글셋방에서 살았다.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이 나왔을 땐 시통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축하했다. 모두들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그 시집은 시통 식구인 김선유 시인이 당시 고려원 편집장이던 최승호 시인에게 보여주어 이뤄졌다.

 

  그는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기 위해 인세 200만원으로 1년치 방세를 내고 연탄을 들였다. 그는 쓰는 게 평생 소원이라고 말했다. 비록 1년 동안이지만 공사판 갈 걱정이 없어졌다. 먹고살 걱정 없이 맘껏 시를 쓸 수 있었다. 그는 1년 동안 낮엔 공사판 대신 남산 도서관을 찾았다. 밥은 한 끼쯤으로 때우고 미친 듯이 시를 썼다.

 

  김신용은 술이 얼큰하면 목에 걸친 수건을 풀어 색소폰 부는 흉내를 냈다. 한쪽은 입에 물고 다한쪽은 발로 밟고 그를 당겨 몸을 비틀었다. 그것은 마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짝에, 달덩이 같은 호박 한 덩이를 올려놓은’ 호박넝쿨 같았다. 아! 그 끈질긴, 기어가는 것들의 힘이여!

 

 

‘이사 퍼포먼스’와 ‘색시’ 마광수의 출현

 

언젠가는 떠나야 했다. 더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건물 관리인은 진저리를 쳤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이어지는 ‘심야 퍼포먼스’. 생쇼 불쇼에 난리 블루스…. 장안의 도깨비들이 벌이는 난장 된장 고추장 천장 마룻장 아수라장….

 

관리인은 “제발 떠나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또 시통 식구들이 나섰다. 순식간에 ‘시발연(시인통신발전연구회)’이 만들어졌다. 우선 단골 외상꾼들이 서둘러 외상값부터 갚았다. 화가들은 앞 다퉈 그림을 기증했다. 시인 소설가들은 원고료 일부를 떼어 내놓았다. 건축가는 새로 이사 가는 시통 내부 실내장식을 맡았다. 이렇게 300여 명으로부터 비록 적지만 소중한 성금이 모아졌다. 주인 한씨는 그동안 피같이 모은 돈과 일부 빚을 낸 목돈에 시발연의 성금을 보태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1992년 5월2일 밤. 시통 식구들이 한밤중 모두 나와 난데없는 ‘길거리 퍼포먼스’를 벌였다. 저마다 손엔 낙서판, 술잔, 나무의자, 접시, 잡지 사상계 등 온갖 잡동사니가 들려 있었다. 시통 이삿날이었다. 새 보금자리는 종로1가 농협과 무과수제과 뒤편(현 ‘르 메이르’ 자리). 1층만 무려 10평, 2층까지 합하면 20평이나 됐다. 하루 아침에 오막살이에서 대궐 같은 집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건축가 이홍기는 건물 여기저기 비틀어지고 구멍 난 데를 말끔히 손질했다. 화가 강찬모는 한쪽 벽면을 멋들어진 그림으로 채웠다.

 

그해 10월 시통 식구들이 또다시 한데 모였다. 이번엔 서울 서초동 법원 청사 앞. 모두 입에 ‘×자가 그어진 마스크’를 썼다. 또 다른 시통 식구 마광수 교수를 위한 모임이었다. 마 교수는 소설 ‘즐거운 사라’로 인해 청하출판사 사장이면서 시인인 장석주와 함께 검찰에 구속된 상태였다. 죄명은 음란물 제작 배포 혐의. 그날 시통 식구들은 연세대 학생 20여 명, 청하출판사 사람들 등 50여 명과 함께 ‘표현자유 수호’를 외쳤다.

 

술좌석의 마 교수는 범생이 그 자체였다. 거의 말이 없었다. 어쩌다 우스개 말이 나오면 겨우 희미하게 웃었다. 일부러 누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였다. 늘 뭔가 긴장하고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아이고 말도 말아요. 그 마 교수 완전 색시요, 색시. 언젠가 아가씨들과 악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데, 아 글쎄, 손이 파르르 떨리더라니까. 도대체 그런 마 교수가 왜 음란이니 뭐니 해서 유명하게 된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어느 날 감옥 생활을 끝낸 마 교수가 다시 시통을 찾았다. 들어갈 때보다 오히려 밝고 더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시통 식구들 덕택에 잘 지냈습니다. 고마워요. 나 거기서 많이 반성하고 공부했습니다.”


그는 노래도 불렀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를 걸어갈 때, 쇼윈도 글라스에 눈물이 고였다…” 그의 18번은 ‘명동 엘레지(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였다.

 

시통 식구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았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누군가 그에게 짓궂게 물었다. “마 교수, 지금도 손톱 뾰족한 여자와 긴 생머리에 뾰족구두 신은 여자를 보면 미칩니까?” 마 교수는 씩 한번 웃더니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이구, 이젠 자신 없어요, 무서워요.” 그 순간 “으하하하” 모두가 발을 구르며,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시통의 3세대 주역들

 

시통은 넓어지면서 한결 넉넉해졌다. 땅거미 어스름 내려, 시통의 꽃등불이 켜지면 ‘어린애 같은 어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하룻밤 많게는 120명 가까이 들끓었다. 100명 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시장바닥처럼 늘 시끌벅적 북적였다. 하지만 빈자리가 없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자연스럽게 합석하고, 어느 순간 한식구가 돼버렸다. 그러다가 때론 싸우기도 하지만, 금세 어깨동무 하고, 노래 부르며 울먹였다.

 

시통은 어느새 3세대를 맞고 있었다. 초창기 출범할 때 문인 예술가들이 1세대였다면, 1984년 한씨가 새 주인으로 자리 잡을 무렵엔 지사적 주당들이 2세대 주역으로 등장했다. 농협 뒤로 이사한 후엔, 각 언론사 노조팀, 당시 막 뜨고 있던 신규 광고회사팀, 386운동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들과 같이 왔던 샐러리맨들도 적잖이 합류했다. 바야흐로 세상은 휙휙 변하고 있었다.

 

시통에선 시낭송회와 출판기념회가 곧잘 열렸다. 각종 명목의 기념회 같은 것도 심심찮게 펼쳐졌다. 그즈음 산삼 심는 패거리인 ‘농심마니패’들이 시통을 아지트로 삼아 한세상을 희롱했다. 이들은 이산저산을 누비며 어린 묘삼을 심고 다녔다. 나중에 누가 캐 먹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우리 백성 중 누군가가 캐먹을 것 아니냐는 거였다. 어느 땐 백두산까지 날아가서 삼을 심고 오기도 했다. 이들이 자나 깨나 부르는 노래는 ‘농심마니의 아침’이었다.

 

‘농심마니 잘 있느냐

지난 밤 꿈속에서

산신령이 하신 말씀 귓가에 새롭구나

산삼은 이 땅에 뿌리요 배달의 정기

조선은 삼산 밭 산삼을 심자.

삼 심자 심봤다 이 나라 이 땅에

이 나라 이 땅에.’

 

 

전국 술집 중에 ‘붓글씨’로 벽에 낙서를 한 곳은 ‘시통’뿐이리라. 대부분이 화가의 작품이다.

산악인 박인식(대장), 산처녀 남난희 김경희, 작곡가 한돌, 시인 김홍성, 소설가 최성각, 사진작가 황상보 안성일, 연극연출가 최유진, 번역가 이상영, 칠보공예가 물빛, 작곡가 변규백, 자연보호운동가 이덕용, 여행가 박세경, 치과의사 김윤만, 기자 이평식, 또 다른 모임풍패의 김응하 박흥식 윤명철 등이 그 멤버였다. 하지만 여기에 김종철 논설위원, 재야 기호논리학자 신성준, 화가 서영준, 서울커뮤니케이션 대표 이두엽, 화가 박권수, 배우 이성룡, 치과의사 이승건, 시인 권경업, 영화감독 이만 이미례, 가수 이연실, 염색공예가 정윤숙, 장승조각가 신명덕 등이 시도 때도 없이 범벅이 되어 어우러졌다.

 

각 언론사 노조 팀들도 북적였다. 동아일보 김광원 위원장은 밤이 이슥해지면, 노조원들과 함께 몰려와 목을 축였다. 권영길 언노련 위원장도 단골 멤버였다. 그는 대단한 술꾼이었다. 아침이 부옇게 밝아올 때까지 마셔도,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후배들이 횡설수설에 버릇 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여도 전혀 미동 없이 묵묵히 들었다. 말은 거의 없었지만, 남의 말 듣는 데는 천하도사였다. 결국 마지막 한 사람까지 코 박고 쓰러지면, 그때서야 조용히 일어났다.

 

권 위원장은 2002년 민노당 대통령후보로 나서 뜻있는 선전을 펼쳤다. 대선이 끝난 후, 그는 시통에서 그의 멤버들과 함께 대선 뒤풀이를 가졌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어느 언론사 후배가 말했다.

 

“만약 투표가 아닌 술로 했다면, 권 선배가 대통령 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외상장부 들여다보고 후배 술값 갚아주는 선배도 많았다. 동아일보 이도성 기자는 ‘어느 편집부 후배 술값으로 쓰라’며 원고료를 통째로 맡겨놓곤 했다. 한국일보 김종우 기자도 가난한 후배들 술값 대느라 바빴다. 우먼센스 조대웅 국장은 후배술꾼의 적지 않은 외상값을 갚아주면서 “그 인간 술 먹으면 큰일 나요” 했다가도, 한두 잔 들어가면 “술꾼이 술을 못 마시면 어떡합니까? 다음엔 조금씩만 주세요. 내가 갚아줄게요”라고 말했다. 참으로 따뜻한 선배들이었다.

 

 

진짜 시인 된 ‘시통’ 주인장

 

시인 소설가 발길이 줄었다지만, 예술인들의 발길은 여전했다. 어느 날, 철학자 황필호 교수가 “아니 이런 곳에, 이런 묘한 데가 있었나?” 하며 나타났다. 구인환 교수의 안내로 시통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구 교수는 ‘낭만작가’이기도 했다. 흥이 나면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빼들고 멋들어진 춤을 추며 아리랑을 불렀다. “우리 집 시어머니는 야속도 하지, 그 잘난 것 하나 낳아줬다고 날 들들 볶네~” 이렇게 선창하면, 황 교수나 소설가 오인문 이동희 김정례 등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며 후렴을 불렀다. 곧바로 구 교수의 선창이 이어졌다. “우리집 서방님은 야속도 하지, 그 잘난 것 하나 갖고서 날 못 살게 구네~”

 

시인 노향림 박영하 장윤우, 문학평론가 신동한 윤병로, 소설가 윤후명 김병총 서종택 등도 이즈음 활발하게 시통을 드나들었다. 그중 하나였던 문학평론가 이명재는 당시 시통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

했다.

 

“농협 뒤에 쪽문 열면 도심에 자리한 문인 사랑방이 있다. 1990년대 초 작가 구인환 선생, 오인문 사백과 우연히 들렀다가 알게 됐다. 시골주막집 분위기라 정겨웠다. 아늑한 문인사랑방에 온 듯한 안온감을 준다. 어둑신한 나무층계로 퉁퉁 소리 나는 발자국 따라 2층에 오르면, 완전히 동네 친구 집에 찾아온 기분이다. 퇴색된 천자문의 한지로 도배된, 벽 군데군데에 걸린 거친 묵화그림이며, 서투른 붓글로 쓰인 글귀들 역시 옛날 시골 주막 같은 정취를 자아낸다. 밤늦게까지 문학담과 정담들이 무르익다보면 실내 분위기도 달아오른다. 맞은편 직장인인 듯한 남녀 젊은이들이 우리 테이블로 두부김치 한 접시와 맥주 한두 병을 보내오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은 이날 우리 모임 모습을 찰칵 카메라에 담았다가 다음에 전해주곤 한다.”

 

예전만 못하지만 화가들도 종종 나타났다. 200일 넘게 그림만 그리다가 갑자기 시통에 들러 몇날 며칠 술을 쏟아 붓는 화가도 있었다. 적색벽돌과 나무 문, 삐걱거리는 목조 고가. 목각으로 된 작은 간판. 마른 북어에 마요네즈, 마른 멸치 땅콩. 계란말이….

 

글쟁이들의 만취 강의는 여전했다. 그들의 언어는 남달랐다. 일상의 언어들을 걸러내어, 다시 구슬에 꿰어 내놓았다. 오가는 말마다 신선하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시통은 예술가들의 치열한 토론장이었다. 야전대학이나 마찬가지였다.

1993년 주인 한귀남씨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문학계간지 ‘포스트모던’에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이 된 것이다. 시는 ‘나의 토방’ 등 4편. 시통에서 시인들과 10년 부대끼면서 얻은 선물이었다. 한씨는 “어느 날 ‘내가 썩어가는구나’하는 생각이 덜컥 들어, 노트에 끼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이게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고 말했다. 시통의 시인 술꾼들이 한씨의 습작노트를 빼앗아 통째로 잡지사에 보낸 것이다. 한씨는 내친김에 2000년 계간지 ‘지구문학’에 소설 ‘피맛골에 부는 바람’이 실리면서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여고시절(서울 동명여고) 품은 문학의 꿈을 이룬 것이다.

 

  시통 이사 10년째인 2002년 봄. 외상장부 명단이 1000여 명에 가까워졌다. 어느 시인은 “외상값 대신 시 2편 써줄 테니 아무 잡지사나 갖다 주고 원고료 받으라”며 껄껄댔다. 화가들은 그림 한두 점 그려서 슬며시 내밀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시통엔 김재곤 논설위원만 가끔 눈물을 흘리다가 가곤 했다. 꺼이꺼이 목 놓아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맛길도 뭉텅뭉텅 허리가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교보빌딩에서 이어지는 피맛길 두 번째 골목인 시통골목은 재개발에 들어갔다. 무과수 제과, 조방낙지, 만나회관, 부산뽈데기, 천냥집, 아산 한우방이 사라졌다. 2003년 겨울, 시통도 인사동으로 떠났다. 인사동 시통(2004~2005 겨울)은 ‘갓 쓰고 자전거 탄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젊은 층 분위기와 영울리지 못하고 뱅뱅 겉돌았다. 시통 식구들도 한두 번 가보곤 고개를 저었다.

 

  2004년 11월 시통은 다시 청진동으로 돌아왔다. 청진동 해장국집(청진옥) 바로 뒷골목이었다. 그 골목은 교보빌딩으로부터 이어지는 피맛길 세 번째 골목이었다. 중국집 신승관, 한정식집 한일관 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2008년 그곳도 재개발에 들어갔다. 2008년 7월31일 시인통신은 결문을 닫았다. 피맛길엔 더 이상 어디 발붙일 데가 없었다. ‘삐까번쩍’ 새로 올라간 건물은 집세가 엄청났다. 그걸 맞추기 위해선 술값이 카페 수준은 돼야 했다. 그건 시통 식구들에게 오지 마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피맛길은 원래 서민들의 길이다. 말을 타고 종로 큰길을 지나는 벼슬아치들을 피해(避馬) 다닌 이다. 거들먹거리는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싫었던 것이다. 1980년대는 최루탄을 피해 들어왔던 피연길(避煙路)이었다. 조선 후기엔 ‘팔뚝거리’라고도 불렸다. 이 부근에 살던 양반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해장국 장사를 했는데, 그래도 양반 아녀자들이라 얼굴을 내놓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휘장 뒤에서 두 팔뚝만 내놓으면서 밥상을 내밀었다. 이후 ‘팔뚝거리, 팔뚝동네’라고 했다. 시통의 큰누나 한씨는 말한다.

 

 

그 많던 술꾼은 다 어디에…

 

  “고난의 시기엔 예술가들이 유달리 더 가슴앓이를 한다. 지난 세월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자니 나마저 껍데기가 열 번쯤은 벗겨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고통도 힘이었다. 그땐 누가 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지 다투다가, 끝내는 서로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린 격정의 시절이었다. 돈도 없던 추운 시절에 광기로 터질 듯한 남자들이 시통을 찾아왔다. 난 한번도 장사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들과 밥도 같이 먹고, 라면도 끓여주고 하면서, 식구처럼 그렇게 부대끼며 그 엄혹한 시절을 견딘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국 술집 중에 ‘붓글씨’로 벽에 낙서를 한 곳은 ‘시통’뿐이리라. 대부분이 화가의 작품이다. 산악인 박인식(대장), 산처녀 남난희 김경희, 작곡가 한돌, 시인 김홍성, 소설가 최성각, 사진작가 황상보 안성일, 연극연출가 최유진, 번역가 이상영, 칠보공예가 물빛, 작곡가 변규백, 자연보호운동가 이덕용, 여행가 박세경, 치과의사 김윤만, 기자 이평식, 또 다른 모임풍패의 김응하 박흥식 윤명철 등이 그 멤버였다. 하지만 여기에 김종철 논설위원, 재야 기호논리학자 신성준, 화가 서영준, 서울커뮤니케이션 대표 이두엽, 화가 박권수, 배우 이성룡, 치과의사 이승건, 시인 권경업, 영화감독 이만 이미례, 가수 이연실, 염색공예가 정윤숙, 장승조각가 신명덕 등이 시도 때도 없이 범벅이 되어 어우러졌다.

 

각 언론사 노조 팀들도 북적였다. 동아일보 김광원 위원장은 밤이 이슥해지면, 노조원들과 함께 몰려와 목을 축였다. 권영길 언노련 위원장도 단골 멤버였다. 그는 대단한 술꾼이었다. 아침이 부옇게 밝아올 때까지 마셔도,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후배들이 횡설수설에 버릇 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여도 전혀 미동 없이 묵묵히 들었다. 말은 거의 없었지만, 남의 말 듣는 데는 천하도사였다. 결국 마지막 한 사람까지 코 박고 쓰러지면, 그때서야 조용히 일어났다.

 

권 위원장은 2002년 민노당 대통령후보로 나서 뜻있는 선전을 펼쳤다. 대선이 끝난 후, 그는 시통에서 그의 멤버들과 함께 대선 뒤풀이를 가졌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어느 언론사 후배가 말했다.

 

“만약 투표가 아닌 술로 했다면, 권 선배가 대통령 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외상장부 들여다보고 후배 술값 갚아주는 선배도 많았다. 동아일보 이도성 기자는 ‘어느 편집부 후배 술값으로 쓰라’며 원고료를 통째로 맡겨놓곤 했다. 한국일보 김종우 기자도 가난한 후배들 술값 대느라 바빴다. 우먼센스 조대웅 국장은 후배술꾼의 적지 않은 외상값을 갚아주면서 “그 인간 술 먹으면 큰일 나요” 했다가도, 한두 잔 들어가면 “술꾼이 술을 못 마시면 어떡합니까? 다음엔 조금씩만 주세요. 내가 갚아줄게요”라고 말했다. 참으로 따뜻한 선배들이었다.

 

 

진짜 시인 된 ‘시통’ 주인장

 

시인 소설가 발길이 줄었다지만, 예술인들의 발길은 여전했다. 어느 날, 철학자 황필호 교수가 “아니 이런 곳에, 이런 묘한 데가 있었나?” 하며 나타났다. 구인환 교수의 안내로 시통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구 교수는 ‘낭만작가’이기도 했다. 흥이 나면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빼들고 멋들어진 춤을 추며 아리랑을 불렀다. “우리 집 시어머니는 야속도 하지, 그 잘난 것 하나 낳아줬다고 날 들들 볶네~” 이렇게 선창하면, 황 교수나 소설가 오인문 이동희 김정례 등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며 후렴을 불렀다. 곧바로 구 교수의 선창이 이어졌다. “우리집 서방님은 야속도 하지, 그 잘난 것 하나 갖고서 날 못 살게 구네~”

 

시인 노향림 박영하 장윤우, 문학평론가 신동한 윤병로, 소설가 윤후명 김병총 서종택 등도 이즈음 활발하게 시통을 드나들었다. 그중 하나였던 문학평론가 이명재는 당시 시통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

했다.

 

“농협 뒤에 쪽문 열면 도심에 자리한 문인 사랑방이 있다. 1990년대 초 작가 구인환 선생, 오인문 사백과 우연히 들렀다가 알게 됐다. 시골주막집 분위기라 정겨웠다. 아늑한 문인사랑방에 온 듯한 안온감을 준다. 어둑신한 나무층계로 퉁퉁 소리 나는 발자국 따라 2층에 오르면, 완전히 동네 친구 집에 찾아온 기분이다. 퇴색된 천자문의 한지로 도배된, 벽 군데군데에 걸린 거친 묵화그림이며, 서투른 붓글로 쓰인 글귀들 역시 옛날 시골 주막 같은 정취를 자아낸다. 밤늦게까지 문학담과 정담들이 무르익다보면 실내 분위기도 달아오른다. 맞은편 직장인인 듯한 남녀 젊은이들이 우리 테이블로 두부김치 한 접시와 맥주 한두 병을 보내오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은 이날 우리 모임 모습을 찰칵 카메라에 담았다가 다음에 전해주곤 한다.”

 

 

예전만 못하지만 화가들도 종종 나타났다. 200일 넘게 그림만 그리다가 갑자기 시통에 들러 몇날 며칠 술을 쏟아 붓는 화가도 있었다. 적색벽돌과 나무 문, 삐걱거리는 목조 고가. 목각으로 된 작은 간판. 마른 북어에 마요네즈, 마른 멸치 땅콩. 계란말이….

 

글쟁이들의 만취 강의는 여전했다. 그들의 언어는 남달랐다. 일상의 언어들을 걸러내어, 다시 구슬에 꿰어 내놓았다. 오가는 말마다 신선하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시통은 예술가들의 치열한 토론장이었다. 야전대학이나 마찬가지였다.

 

1993년 주인 한귀남씨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문학계간지 ‘포스트모던’에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이 된 것이다. 시는 ‘나의 토방’ 등 4편. 시통에서 시인들과 10년 부대끼면서 얻은 선물이었다. 한씨는 “어느 날 ‘내가 썩어가는구나’하는 생각이 덜컥 들어, 노트에 끼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이게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고 말했다. 시통의 시인 술꾼들이 한씨의 습작노트를 빼앗아 통째로 잡지사에 보낸 것이다. 한씨는 내친김에 2000년 계간지 ‘지구문학’에 소설 ‘피맛골에 부는 바람’이 실리면서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여고시절(서울 동명여고) 품은 문학의 꿈을 이룬 것이다.

 

 

시통 이사 10년째인 2002년 봄. 외상장부 명단이 1000여 명에 가까워졌다. 어느 시인은 “외상값 대신 시 2편 써줄 테니 아무 잡지사나 갖다 주고 원고료 받으라”며 껄껄댔다. 화가들은 그림 한두 점 그려서 슬며시 내밀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시통엔 김재곤 논설위원만 가끔 눈물을 흘리다가 가곤 했다. 꺼이꺼이 목 놓아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맛길도 뭉텅뭉텅 허리가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교보빌딩에서 이어지는 피맛길 두 번째 골목인 시통골목은 재개발에 들어갔다. 무과수 제과, 조방낙지, 만나회관, 부산뽈데기, 천냥집, 아산 한우방이 사라졌다. 2003년 겨울, 시통도 인사동으로 떠났다. 인사동 시통(2004~2005 겨울)은 ‘갓 쓰고 자전거 탄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젊은 층 분위기와 영어울리지 못하고 뱅뱅 겉돌았다. 시통 식구들도 한두 번 가보곤 고개를 저었다.

 

2004년 11월 시통은 다시 청진동으로 돌아왔다. 청진동 해장국집(청진옥) 바로 뒷골목이었다. 그 골목은 교보빌딩으로부터 이어지는 피맛길 세 번째 골목이었다. 중국집 신승관, 한정식집 한일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2008년 그곳도 재개발에 들어갔다. 2008년 7월31일 시인통신은 결국 문을 닫았다. 피맛길엔 더 이상 어디 발붙일 데가 없었다. ‘삐까번쩍’ 새로 올라간 건물은 집세가 엄청났다. 그걸 맞추기 위해선 술값이 카페 수준은 돼야 했다. 그건 시통 식구들에게 오지 마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피맛길은 원래 서민들의 길이다. 말을 타고 종로 큰길을 지나는 벼슬아치들을 피해(避馬) 다닌 길이다. 거들먹거리는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싫었던 것이다. 1980년대는 최루탄을 피해 들어왔던 피연길(避煙路)이었다. 조선 후기엔 ‘팔뚝거리’라고도 불렸다. 이 부근에 살던 양반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해장국 장사를 했는데, 그래도 양반 아녀자들이라 얼굴을 내놓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휘장 뒤에서 두 팔뚝만 내놓으면서 밥상을 내밀었다. 이후 ‘팔뚝거리, 팔뚝동네’라고 했다. 시통의 큰누나 한씨는 말한다.

 

 

그 많던 술꾼은 다 어디에…

 

“고난의 시기엔 예술가들이 유달리 더 가슴앓이를 한다. 지난 세월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자니 나마저 껍데기가 열 번쯤은 벗겨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고통도 힘이었다. 그땐 누가 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지 다투다가, 끝내는 서로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린 격정의 시절이었다. 돈도 없던 추운 시절에 광기로 터질 듯한 남자들이 시통을 찾아왔다. 난 한번도 장사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들과 밥도 같이 먹고, 라면도 끓여주고 하면서, 식구처럼 그렇게 부대끼며 그 엄혹한 시절을 견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그 ‘시통 식구들’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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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 박지원은 1771년 서른네 살 때 과거를 때려치웠다.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 조선 사람의 눈으로 조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 사나이 대장부가 닭벼슬보다 못한 벼슬 따위는 해서 뭐 하는가”라며 협객 백동수(1743~1816)를 길잡이로 삼아 전국을 떠돌았다.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1741~1793), 이서구(1754~1825)도 함께했다.

 

  이때 이덕무가 서른, 백동수가 스물여덟, 이서구가 불과 열일곱 살이었다. 이들은 개성 송도-평양-천마산-묘향산-속리산-가야산-충북 단양 등을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꺼이꺼이 질펀하게 울 만한 곳을 찾았다.

 

  “조선 천지엔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바다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황해도 장연의 금 모래밭을 거닐면서 원 없이 울어볼 만하다”

 

  1980년대 이후 시통을 수없이 들락거렸던, 그 열혈아들은 지금 다들 어디서 울고 있을까? 1987년 6월 그 뜨거웠던 여름, 광화문 일대에서 최루탄에 맞서 싸우다가, 밤 이슥해 시통에 들어서던, 그 자랑스러운 ‘해방전사’들은 앞으로 어디서 마음껏 울음을 터뜨릴까? 시통이 사라진 피맛길은 이제 ‘죽은 시인’의 골목이 되었다.

 

 

<출처> 2008.09.01 / 신동아 통권 5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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