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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 일반

기행(奇行)과 자유분방, 중광 스님의 예술세계 - '중광 만행 卍行’전

by 혜강(惠江) 2011. 8. 10.

 

기행(奇行)과 자유분방, 중광 스님의 예술세계 


- 타계 10년 기념 '중광 만행 卍行’전을 다녀와서 -

 

글 남상학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는 8월 초 외출했다가 지인을 따라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걸레스님 중광 만행 卍行’전을 관람했다. 전시는 중광 타계 10년을 기념한 특별전이었다.

  작품들은 <만물(萬物)이 부처다> <만법귀일(萬法歸一모든 법은 하나로 통한다)> <나는 누구인가>로 구성했다. 전시장에는 필묵으로 달마와 학을 그린 선화(禪畵)와 글씨, 아크릴과 브러시로 그린 추상과 구상의 유화, 도자, 테라코타 등 작품 150여점과 <나는 걸레> 등 시작(詩作)원고, 행위예술, 영화 <허튼 소리>와 <청송 가는 길> 등 50여점을 전시했다. 2000년 곤지암에 지은 ‘벙어리 절간’의 풍경도 볼 수 있다.     

 

 

  나는 중광(1935~2002)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스님으로 기행(奇行)을 일삼았던 사람 정도로 이해할 뿐. 그러나 전시물을 감상하는 동안 기인의 평가를 넘어서는 그의 독특한 예술혼이 작품 곳곳에 고스란히 배어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예술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고 실천하는 그의 진면목이 나를 압도하면서 그는 한 시대의 탁월한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서화니 현대미술은 물론 행위예술, 도자기, 시, 영화 등 손을 안 댄 곳이 없을 정도로 전방위 예술가였다.

  그렇다면 중광의 다양하고 화려한 예술의 태도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점을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관의 속명은 고창률(高昌律). 1935년 제주도에서 출생한 그는 너무 가난했기에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였다. 병역(해병대)을 마친 뒤 1960년 26세 때 경남 양산 통도사 구하(九河) 스님의 제자가 되었고, 1977년 44세 때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까지 진출했고, 영국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 Society)의 초대를 받아 <나는 걸레> 등 선화선시(禪畵禪詩)를 발표함으로써 그의 예술세계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걸레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 사는 게다.
 삼천대천(三天大天) 세계는 / 산산이 부서지고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 / 넘실넘실 춤을 추는 거야
 나는 걸레

 남한강에 잉어가 / 싱싱하니
 탁주 한 통 싣고 / 배를 띄워라
 별이랑, 달이랑, 고기랑 / 떠돌이 모여들어
 별들은 노래를 부르오 / 달들은 장구를 치오
 고기들은 칼을 들어 / 고기회를 만드오

 나는 탁주 한 잔 / 꺾고서
 덩실 더덩실 / 신나게 춤을 추는 게다
 나는 걸레.

         
   -  重光의 <나는 걸레> 전편

 



  重光의 활동은 참으로 현란했다. 오염된 사회를, 그의 마음의 걸레로 더욱 쉬지 않고 쓱 쓱 닦아 내야 했다. 기승, 괴승... 그의 출판 도서류도 흥미 있다. <나는 똥올시다>(91) 종합예술집<9x9=50>(91) <나는 세상을 훔치(拭)며 산다>(94) 등을 보면 그의 정신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2년 뒤 1979년에 그는 조계종 종단으로부터 승적을 박탈당했다. 그 이유는 출가할 때부터 심한 방랑과 돌출행동으로 뉴스메이커가 되었고 계속된 파계, 기행으로 주목을 받았던 터에 그의 서슴지 않는 미치광이 행동은 결국 파계승이란 불명에를 안게 되었다. 승적을 박탈당한 후에 중광의 기행은 계속됐다. 성기가 확대 노출된 동물그림을 발표했고, 나체 상태의 허리에 대걸레를 끈으로 묶고 먹물을 찍어 화선지에 선화를 그리는 퍼포먼스를 공개했다. 미국 버클리대 강연에서는 여학생과 키스를 하기도 했다. 1985년 스님이 쓴 <허튼 소리>는 출간 직후 판매가 금지됐지만 1986년 영화 <허튼 소리>(감독 김수용), 87년에 연극 <허튼 소리>(연출 이용우)로 변주됐다.

  영화의 경우 ‘저속한 내용’이라는 이유로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10개 장면이 삭제되면서 걸레스님은 더욱 유명해졌다. 중광은 영화에 출연해 배우로 데뷔하는가 하면 CF 모델로 변신하기도 했다. 옥시크린 세제 광고에 출연하여 출연료 전액을 불우 이웃돕기에 사용했다. 그러나 건강이 쇠하자 그는 1998년 백담사로 들어가 선수행하며 달마그림에 몰두했고, 그 절 오현 스님으로부터 “바위처럼 벙어리가 되라”는 뜻의 농암(聾庵)이란 법호를 받기도 했다. 미국 버클리대 랭커스터 교수는 그의 ‘달마도’에 반한 나머지 ‘동양의 피카소’라고 칭송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가 보여준 불타는 예술혼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나는 그 이유에 대하여 어느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치열한 정신적 자유와 예술에 대한 혼신의 열정에서 기인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방랑과 파계를 일삼으며 세상을 거침없이 호방하게 살았던 그는, 그래서 차라리 자유롭게 온 우주를 품에 넣는 예술 하는 스님으로 프리즘 같이 변신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광의 여러 장르에 걸친 작품의 바탕에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정신세계는 선(禪)이었고, 선은 곧 중광 예술의 생명력의 근원이었다.      
  
  중광은 파계승이자 화단(畵壇)의 이단아였다. 화단은 정규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걸레스님 중광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중광은 이것에 개의치 않고 예술의 본질을 자유롭게 펼쳐 나갔다. 중광에게 삶은 예술이고, 예술은 곧 삶이었다. 세속적인 잣대와 무관하게 전방위 예술가로 활동한 걸레스님은 90년 시인 구상과 시화집‘유치찬란’을 출간했고, 중광과 함께 이 시대 3대 기인으로 불리는 시인 천상병·소설가 이외수와 시화집 ‘도적놈 셋이서’를 발표하는 등 세 권의 책을 냈다. 그해 영화 <청송으로 가는 길>(감독 이두용)로 대종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감로암의 어느 스님은 중광을 가리켜 “승려라기보다 행자(行者)를 자처하며 빈자 일등! 세속의 길, 열반의 길을 걸으며 중생을 위해 헌신하기를 혐오하지 않았고, 많은 불교관계 미술 작품으로 제도(濟度)에 그 기여가 컸다.”고 했다.  

  말년은 경기도 곤지암의 토굴 ‘벙어리 절간’에서 보냈다. 중광은 2000년에 열었던 달마전‘괜히 왔다 갔다 한다’를 끝으로 2002년 68세를 일기로 아깝게 불귀의 나그네로 떠났다. 그가 말한 대로 그는 “괜히 왔다 갔다 한” 사람일까? 그렇게 평가하기에는 그의 작품이 빛났고 화려했으며, 다양했다. 그리고 그 작품들 속에 자유분방하면도 강렬한 정신이 살아 있었다.  나는 전시장을 걸어 나오면서 어느 스님의 말을 떠올렸다. “그의 흔적으로 남겨진 삶의 발자국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지혜(wisdom)의 꽃잎을 본다. 반야(般若)의 빛을! 참된 지혜, 반야의 마음을 거기 빠뜨리고 간 것이다. 그는 중 이전에 시인이요 화가이던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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