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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 일반

황진이(黃眞伊)의 인생과 문학

by 혜강(惠江) 2007. 7. 20.

 

황진이(黃眞伊)의 인생과 문학

 

- 멋과 낭만 속에 빛나는 기교(技巧) 

 

 

글 : 남상학

 

 

 

 

 

  윤선주 극본, 김철규 연출로 황진이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KBS-2TV 수목드라마)가 방영된 후, 대하소설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 씨가 2002년 북한에서 발표한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여 상영되었다.

   “하인 출신인 가공인물 ’놈이’와 황진이의 비극적인 사랑을 담고 있다. 소설 속 황진이는 황진사가 여종의 몸에서 낳은 딸이지만 출생 비밀을 모른 채 양반댁 규수로 성장한다. 그러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찬 양반 사대부에 대한 복수심으로 송도 객주가에 기생으로 들어간다. 두 사람은 사랑을 불태우고 화적으로 변한 놈이는 관헌에 붙잡혀 효수형에 처해진다. 소설은 거침없는 성애장면 묘사와 질박한 우리말 어휘 등으로 남한에서도 인기를 끈 바 있다. 북한 소설이 남한에서 영화화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영화는 장윤현 씨가 감독하고 송혜교(황진이 역), 유지태(놈이 역)을 주연을 맡았다. 황진이, 실제로 그녀는 어떤 인물인가?  그녀가 남긴 몇 안 되는 시조 작품(時調作品)을 통하여 그녀의 문학을 조명해 보기로 한다. 


  황진이는 16세기에 활동한 우리나라의 이름 있는 기생이다. 그녀는 개성에서 살던 황진사(黃進士) 첩의 딸로 태어났다. 일명 진랑(眞娘)이라고도 했으며.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었다. 확실한 생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중종 때 사람으로 짐작되며 비교적 단명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진이는 어려서부터 수려한 용모에 서예와 가무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서 그 소문이 각지에 퍼졌고 또 많은 일화도 남겼다.

  황진이가 15세 되던 해의 일화이다. 한동네에 살던 총각이 그녀를 짝사랑하던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죽었는데,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대문 앞에 이르자 말뚝처럼 굳어져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죽은 총각의 친구가 이를 황진이에게 알리자 황진이는 소복단장을 하고 달려 나가 자기의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 주었는데 그제야 상여가 움직이더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일로 인하여 그녀가 기생이 되었다고도 한다.

  황진이는 첩의 딸로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기보다는 봉건적 윤리의 질곡(桎梏)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였다. 그 결심을 실천하자면 당시 그의 신분으로서는 불가능하였으므로 기생의 길을 걸었다. 당시로서는 오직 그 길밖에 없었으므로.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가창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 당대의 석학 서경덕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 당시(唐詩)를 정공(精工)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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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큼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으나,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는 데는 끝내 실패하자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당시 개성 사람들은 용모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황진이를 화담 서경덕(徐敬德).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 3절(松都三絶, 3가지 뛰어난 것)로 꼽아 자랑하였다. 황진이는 서경덕을 위해서 많은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변치 않는 정을 노래하고 있다. 황진이와 서경덕과의 관계가 나온 김에 둘이 서로 화답하여 지은 시를 살펴보면,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화담 서경덕이 지은 위의 시에 황진이가 화답한 시는,

  내 언제 신(信)이 없어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그리운 정에 떨어지는 잎 소리마저도 임이 아닌가 한다는 화담의 시조에 ‘지는 잎 소리를 난들 어찌하겠느냐’는 황진이의 안타까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 황진이는 성품이 소탈하여 남자와 같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불렀다. 그는 평생 화담 선생을 사모하여 반드시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선생의 거처에 가서 한껏 즐기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고, 또한 기생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고 인멸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전하는 작품은 6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 세련된 언어구사로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이 중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 언제 신이 없어〉·〈산은 옛 산이로되〉·〈어져 내일이여〉의 5수는 진본(珍本)《청구영언》과 《해동가요》의 각 이본들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황진이의 시조에는 연모의 시가 많은데 “동짓달 기나긴 밤을 ~'도 여기에 속한다. 송세양을 그리워하며 쓴 시라고 전해지는 작품을 보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외로운 밤을 한 허리 잘라내어 임 오신 밤에 길게 풀어 놓고 싶다는 연모의 정을 황진이만의 맛깔난 어휘로 노래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남녀간의 사랑은 밤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밤의 신비와 그 행복을 잠시라도 더 오래 지니고 싶은 애틋한 심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한국의 연가(戀歌)는 모두가 기나긴 밤의 노래다. 대낮이 아니라 밤을 아쉬워하고 밤의 정을 그리는 마음이었다. 고려 여인네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얼음 위에 대닢 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얼어죽을 망정

 이 밤 더디 새오시라더디 새오시라 

  -  고려가요 <만전춘(滿殿春)>에서

 

 

  임과 함께라면 얼어죽어도 좋으니 이 밤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그린다는 것은 곧 밤을 그리는 것이며, 사랑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곧 밤이 오래 계속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이었다. 그러기에 '춘풍처럼 따스한 이불' 역시 그런 밤의 행복을 마련하겠다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남녀 관계가 그 어느 나라보다 부자유스럽고 그 속박 또한 유별나게 엄격한 우리의 현실이기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위의 작품처럼 연모의 정을 노래한 작품으로는 “어져 내 일이야~”를 들 수 있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정(情)이란 그 대상이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욱 절실한 법. 떠나는 임을 만류할 수도 있었건만, 떠나게 두고서는 그리워서 애달파 하는 자탄(自歎)의 심정을 넋두리하듯 읊었다. 자존심과 연정 사이에서 한 여인이 겪는 오묘한 심리적 갈등이 고운 우리말의 절묘한 구사를 통하여 섬세하고 곡진하게 표현되었다. 이 노래의 표현상의 묘미는 중장의 ‘제 구태여’의 행간(行間)의 걸침에 있다. 황진의 작품 중, 아니 조선 시대의 모든 시조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뽑힌다.  

   황진이는 주로 남녀 간의 애정을 섬세하면서도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는데 이 시조는 그러한 대표작의 하나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시조는 황진이의 시조 중 가장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시조로 꼽히기도 한다. 황진이와 벽계수와의 이야기는 서유영(徐有英, 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자세히 전한다.      

  송도의 명기 황진이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황진이는 ‘풍류명사(風流名士)'가 아니면 만날 수 없다 하여 벽계수는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벽계수에게 “그대가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 말대로 해야 하는데 따를 수 있겠소?”라고 물으니 벽계수는 “당연히 그대의 말을 따르리다.”라고 답했다. 이달이 말하기를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여 황진이의 집 근처 루(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재빨리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일 것이오.” 했다.

   벽계수가 그의 말대로 작은 나귀를 타고 소동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들게 하여 누(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한 곡 탄 후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니 황진이가 과연 뒤를 ?았다. 취적교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가 동자에게 그가 벽계수임을 묻고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가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다 나귀에서 그만 떨어졌다. 이에 황진이가 웃으며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단지 풍류랑일 뿐이다”라며 그냥 가버렸다. 벽계수는 매우 부끄럽고 한스러워했다. 

  한편 구수훈(具樹勳, 영조 때 무신)의 <이순록(二旬錄)>에는 조금 달리 나와 있다. 종실 벽계수는 평소 결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해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가 사람을 시켜 그를 개성으로 유인해왔다. 어느 달이 뜬 저녁, 나귀를 탄 벽계수가 경치에 취해 있을 때 황진이가 나타나 “청산리 벽계수야 ~”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는 밝은 달빛 아래 나타난 고운 음성과 아름다운 자태에 놀라 나귀에서 떨어졌다.

   황진이는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변치 않는 정을 노래하기도 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황진이는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한 남정네와 금강산을 유람하기도 했는데, 살아생전에 많은 일화와 시를 남겼지만 금강산을 노래한 그의 시가 남아있지 않음이 유감일 따름이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人傑)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황진이의 임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이다. 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그는 마침 평안도사가 되어 가는 길에 송도에 들렀으나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절망한 그는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 임제(林悌, 1549~1587)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백호는 결국 파면을 당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된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위의 시조 외에도 그가 지은 한시에는 <박연(朴淵)〉·〈영반월(詠半月)〉·〈등만월대회고(登滿月臺懷古)〉·〈여소양곡(與蘇陽谷)〉 등이 전한다.

   재색이 뛰어나고 가창에 능했던 황진이. 서가(庶家) 출신임을 비관하여 일찍이 기문(妓門)으로 들어간 그녀는 세상의 풍류남아(風流男兒)와 영웅, 호걸, 시인, 묵객을 상대로 호화로운 일생을 보냈으나 마음에서의 시름은 떠나지 않았다. 한시와 서화도 남겼으나 그가 남긴 시조 6수는 조선조 문학의 으뜸이 되는 걸작에 속한다. 그의 작품 속에 빛나는 기교와 낭만 , 그 속에 담긴 의지와 정회는 우리 시조문학에 영원히 남아 굽이칠 것이다. 

 

 

황진이 우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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